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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추상같은 절개와 태양같이 뜨거운 충의(忠義)를 사랑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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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민영환이 나라를 위하여 의롭게 죽었으므로 내가 청죽을 내려 그의 충의(忠義)를 표창하였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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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
1861년(철종 12)∼1905년(광무 9).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시호는 충정(忠正), 본관은 여흥(驪興), 병조판서 민겸호의 아들.
1878년 고종 15년 문과에 급제. 미국 공사로 있다가 1896년 고종 33년 2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례.
군부대신으로 있을 때 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와 신문명에 밝았으며, 처음으로 양복을 입어 사신으로 외국에 가는 사람의 변복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귀국 후 참정(參政)에 올랐고 훈장조례를 처음으로 공포하였으며 사신으로 해외에 여러차례 나가서 공을 세워 훈 1등에 이르렀다.
외부·학부·탁지부 대신을 역임하여 나라의 운명을 바로 잡으려 분투하였으나 독립당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대신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왕의 시종무관장으로 있을 때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기는 형세에 이르니, 우정대신 조병세와 함께 조약의 폐기를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1905년 11월 4일 새벽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고하는 유서를 남기고 단도로 자살하였다.
뒤에 시호와 함께 영의정을 받았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받았다.
위 유품 혈죽(血竹)은 충정공이 자결을 한 자리에서 피어난 대나무의 잎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자 일제가 베어내려 했으나 부인이 따로 보존하여 오다,
충정공의 종손인 민병기씨가 조모로부터 물려받은 유품들을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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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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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이 자결하고 8개월이 지나자, 피묻은 옷을 간직한 방에서 청죽이 솟아올라 인심이 술렁이자 일제 날조.
민영환 어른이 자결한 후 피묻은 옷을 간직했던 마루에서 대나무가 솟아 올랐다. 김은호 화백, 김우현 목사 등 청죽을 목격한 분들이 많았다.
민영환의 피를 먹고 대나무가 솟아났다는 이른바 혈죽 사건은 당시 언론에도 보도되어 화제가 되었다.
1906년 7월 5일자 대한 매일신보(현 대한매일)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공의 집에 푸른 대나무가 자라났다. 생시에 입고 있었던 옷을 걸어두었던 협방 아래서 푸른 대나무가 홀연히 자라난 것이라 한다. 이 대나무는 선죽과 같은 것이니 기이하다'
신문 보도대로 민영환이 순국한 지 8개월 후,피묻은 옷을 간직했던 방에서 청죽이 솟아올랐다.
대나무의 45개의 입사귀는 순국할 때의 나이와 같은 숫자여서 더욱 신기하게 여겨졌다.
혈죽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술렁이기 시작했다.당황한 일제는 혈죽이 조작된 것처럼 만들고자 했다.
그들은 대나무가 뿌리를 통해 번식한다는 점을 주목,집주변에 대나무가 있는지 면밀히 조사했다.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대나무는 찾지 못했다.
마루를 뜯어 내고 주위를 파내며 다른 대나무가 뿌리를 뻗어서 솟아난 것은 아닌가 확인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민영환의 손자 민병진씨는
'일제는 혈죽의 조작 증거를 잡지 못하자 대나무를 뽑았는데 쑥 뽑혔다고 한다. 만약 뿌리를 통해 번식했다면 대나무가 뽑혀 나올 리 없다'
고 말했다.
잊혀졌던 혈죽이 다시 세상에 얼굴을 내민것은 광복 이후,일제가 뽑아버린 대나무를 고이 수습한 충정공의 부인 박수영 씨에 의해서다.
박씨는 자줏빛 보자기로 대나무를 싸고 폭 8센티 길이 50 센티 정도의 나무 상자 속에 넣어 보관 했다.
고이 간직해온 혈죽은 유족들이 1962년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 옮겨지게 됐다.
고려대 박물관에는 혈죽과 1906년 7월 15일 일본인 사진기사 기쿠다가 촬영한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