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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중국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졸지에 수배자가 됐습니다. 물론 중국 정부가 아니라 스페인 사법 당국에 의해서입니다. 장쩌민 전 주석이 스페인에서, 혹은 스페인 사람에 대해서 무슨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좀 이해하기 힘든 이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장쩌민 전 주석이 재임 중인 시절에도 티베트 독립 움직임에 대해 중국 정부는 매우 단호하게 대응했습니다. ‘단호한 대응’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중국 내에서의 티베트인들의 독립 투쟁은 사실 외부로는 거의 알려지지도 않습니다. 언론 통제 때문이죠. 티베트인들은 대신 해외에서 티베트 독립 운동에 대한 중국 당국의 탄압 실태를 알리기 위한 활동에 적극적입니다. 국내에서도 종종 티베트 문제에 대한 전단지를 돌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스페인에도 티베트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단체들이 있습니다. ‘코미테 데 아포요알 티베트’, 즉 ‘티베트 지지 위원회’ 같은 곳들입니다. 이들 단체는 스페인 법원에 티베트에서 벌어진 인권 탄압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장쩌민 전 주석과 리펑 전 총리 등이 부하들을 동원해 티베트인들을 고문하고 대량 학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스페인 법원은 지난해 11월 장 전 주석과 리 전 총리 등 5명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발부가 미뤄지다가 드디어 지난 10일 이스마엘 모레노 판사가 공식 서명함으로써 영장이 발부됐습니다. 모레노 판사는 이 체포영장을 집행하기 위해 국제형사경찰기구, 즉 인터폴에 장 전 주석 등을 체포하라고 요청했습니다.따라서 장 전 주석 등이 중국을 떠나 인터폴에 가입하고 있는 국가를 여행할 경우에는 언제든 체포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도 인터폴 가입 국가입니다. 물론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 가능성을 고려할 때 실제로 이들을 체포하려 들 국가가 과연 있을까 싶기는 합니다. 하지만 스페인처럼 체포영장을 발부하는 나라도 있으니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장담하기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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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법원이 장 전 주석 등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하자 중국이 발끈했습니다. 중국으로서는 당연한 일이겠죠. 화춘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1일 정례 브리핑에서 “스페인의 관련 기관이 중국의 엄정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조치를 취한 데 대해 강한 불만과 함께 결연한 반대를 표시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또 “중국 정부는 스페인 당국에 우리의 엄정한 입장을 전달할 것”이라면서 “스페인 정부가 달라이 라마 세력의 분열 기도를 정확히 보고 관련 문제를 적절히 처리함으로써 양국관계의 건강하고 안정된 발전을 도모하기를 희망한다”는 말도 덧붙였답니다. 연합뉴스가 전한 내용입니다. 중국으로서는 지난해 11월 체포영장 발부가 결정됐을 때에도 강하게 반발했었는데 영장이 실제로 발부가 되자 발끈한 겁니다.
그럼 중국 안에서 벌어진 일인 티베트 독립 운동에 대한 탄압을 이유로 제3국인 스페인에서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바로 ‘보편적 재판 관할권’(universal jurisdiction) 때문입니다. 스페인에서는 전쟁 범죄, 그리고 반 인류 범죄나 대량학살 같이 국제법에 어긋나는 범죄에 대해서는 어느 나라에서 일어났든 재판할 수 있는 관할권을 자국의 ‘국가 형사 법원’(Audiencia Nacional, 영어로는 National Criminal Court)에 부여하고 있습니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있는 이 법원은 그동안 칠레의 학살자 피노체트 전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를 시작으로 외국에서 벌어진 학살이나 인권 침해 범죄 등의 가해자에 대한 적극적인 재판권 행사를 시도합니다. 영국에서 체포됐던 피노체트는 실제로 스페인으로 끌려갈 뻔 했습니다. 결국 칠레로 송환하는 걸로 결론이 났습니다만. 또 르완다 학살범들, 전직 나치 요원들, 가자 지구를 폭격한 이스라엘 관계자 등등이 스페인 국가 법원의 관할권 행사 대상이 됐습니다.
그런데 장쩌민 전 주석 문제는 이전의 다른 반 인권 범죄자들에 대한 체포 시도 때와는 많이 다른 강력한 후폭풍을 몰고 왔습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이른바 G2로 부상한 중국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으니까요. 세계 경제에 미치는 중국의 막강한 영향력을 생각해보면 이 또한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중국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한 스페인 정부는 전전긍긍했습니다. 지난해 처음 영장 발부가 결정됐을 때부터 정부가 아니라 법원이 한 일일 뿐이라며 서둘러 해명하더니, 의회에서는 다수당이 나서서 이 보편적 재판 관할권 행사를 제한하기 위한 법률 개정안을 제출했습니다. 사실 이 법원의 지금까지 활동이 기본 취지는 훌륭하지만 실제로 문제가 된 사람을 스페인으로 끌고 와서 재판하지도 못하면서 국제적인 분란만 초래한 경우가 많았다는 현실도 감안이 됐다고 합니다. 물론 지금껏 가만히 있다가 법률 개정안까지 나온 건 역시 중국 때문이라고 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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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 다수당이 법안을 내놓았기 때문에 이변이 없으면 통과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법안이 통과되면 법원은 앞에서 언급한 반 인류 범죄들 가운데 범인이 스페인 국적자이거나 스페인 내에 있는 외국인인 경우만 관할권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현재 영장이 발부된 장쩌민 등은 체포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겠죠. 반 인류 범죄는 세계 어디에서 일어난 일이든 어느 국가나 형사 처벌을 ‘할 수 있다’거나, 한 발 나아가 어느 국가나 이런 범죄를 발견하면 처벌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건 명분만으로 보면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이런 일은 통상 그런 일이 일어난 해당 국가의 사법권에만 맡겨서는 제대로 조사나 처벌이 어렵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런 코스모폴리탄적인 이상이 외교적, 경제적 실익을 넘어서기는 어렵다는 현실을 이번 장쩌민 체포영장 사건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 대한 정면 도전이 결국은 제도 자체의 대폭 축소를 불러오게 됐습니다.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스페인에서 중국은 프랑스에 이어 두 번째의 채권국입니다. 양국의 교역 규모도 상당한 수준입니다. 이런 현실적인 벽이, 보편적 재판 관할권을 통한 반 인류 범죄에 대한 단죄라는 이상을 가로막은 셈입니다.
심석태 기자stshim@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