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주 천지조화
왜 주회암은 흠잡을 데가 없다고 하셨는가? 본문
왜 주회암은 흠잡을 데가 없다고 하셨는가?
왜 주회암은 흠잡을 데가 없다고 하셨는가? |
상제님께서 “유가의 인물들이 흠이 많으나 주회암은 흠잡을 데가 없느니라.”(도전 4:14:3)고 평가를 하시고 유교의 진액을 거두기 위해서 주회암을 후천 유가의 종장으로 삼으셨다.
주회암(朱晦庵, 1130~1200). 주자(朱子). 남송시대 대유학자로서 북송 오현(五賢)의 학설을 계승, 종합하고 동시대의 불교, 도교 이론까지 섭렵하여 방대한 사상체계를 정립하였다.
그런데, 역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주자는 덕망 있고 온후한 성인의 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당시 주자의 친구이며 도학자인 장남헌이 주자에게 편지를 보내어 충고한 적이 있는데, “원회, 당신의 학문과 행동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바입니다만 눈앞의 사태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당신은 평소 남을 훈계하여 고치려 들기만 하며, 남을 틀렸다 하고 자신을 옳다고 하는 면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당신을 꺼려하여 의문점이 있어도 물으려 하지 않으며, 아첨하는 자가 많고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 이가 적습니다. 이처럼 성격이 치우친 것을 성찰하지 않으면 아마 언젠가는 유폐를 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또한 다른 친구인 여동래도 ‘적을 만들어 승부하기를 좋아하며 온화한 기상이 부족하다’고 평가를 하였다. 그리고 주자는 그의 제자들에게도 강직하게 대하고 잘못된 것을 직설적으로 지적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상제님께서 부유(腐儒)라고 지적하신 유가 인물의 그릇된 점은 무엇일까? 주자에 대해서는 왜 흠잡을 데가 없다고 하셨는가? 또 상제님께서 취하신 유가의 진액은 과연 무엇인가? 유가의 종장인 주자를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주회암의 생애와 사상
주자는 유학의 경전을 집대성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우주론에 관한 문제를 정리하여 자신의 사상체계를 정립하고 신유학을 완성한 인물이다.
우선 주자학의 창시자인 주자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서 살펴보자.
주희는 1130년 송나라 때 복건 남검주 우계현에서 아버지 주송, 어머니 축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의 송시열이 자신의 호를 ‘우암’이라 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한다는 뜻도 들어가 있지만, 주희가 태어난 우계현에서 따다 쓴 것이다. 주희의 자는 원회다. 호는 많은데 대표적으로 회암을 든다. 시호는 문공이다. 문공이란 시호는 최고의 존칭에 해당한다.1
(1. 본래 시호는 두 글자를 쓰는 것이다. 게다가 학자에게 있어서 글월 문자를 쓰는 건 가장 극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공은 학자로서는 최고의 시호를 받은 것이다)
주자가 4세 때, 아버지 주송이 하늘을 가리키며 “보아라. 저것이 하늘이란다”라고 하자, 보통 아이들과는 달리 주자는 하늘 위에 무엇이 있냐고 되물어 아버지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후에 그때를 회상하며 “나는 이미 5, 6세 때부터 생각에 잠겨 괴로워했다. 대체 천지사방의 바깥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 나는 꼭 끝이 있는 것만 같았다.”라고 하였다.
더불어 그의 논적(論敵)인 육상산도 비슷한 일화가 있는데 3, 4세 때 천지의 끝이 어디인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가 없어서 그 때문에 식사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아버지가 꾸지람을 하자 더 이상 그 문제를 입밖에 안 내놓았는데, 이론과 심론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철학의 문제를 천지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유소시에 “하늘 천 자에 하늘 이치를 알았고, 땅 지 자에 땅 이치를 알았으면 되었지 더 배울 것이 어디 있습니까?…”(道典 1:19:7)라 하셨고, 사부님께서도 ‘대도세계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생명의 부모인 하늘과 땅에 대한 본질적인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도전 1:19:7 미주)는 말씀으로 학문의 시작, 도의 근본뿌리가 천지에서부터 비롯됨을 말씀해주신 바 주자는 철학의 근본을 바르게 보았던 것이다.
주자의 아버지 또한 도학을 계승하였고 주자는 어려서부터 과거급제나 출세, 명리를 위해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로부터 전해 받았을 것이다.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 유명(遺命)에 따라 호적계(胡籍溪) 유백수(劉白水) 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李延平)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유학에 복귀하여 그의 정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의 강우(講友)로는 장남헌(張南軒) 여동래(呂東萊)가 있으며, 또 논적(論敵)으로는 육상산(陸象山)이 있었다.
그는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사록)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관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주자의 사상의 형성은 40세와 61세를 시점으로 나눠 볼 수 있다. 40세 때, 이발미발미발설(已發未發說)2이 정립된 것이 제 1차 각성이라고 한다면, 61세에 제2차 각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에 주자는 “긴 여정 끝에 『시경』과 『주역』에 관해서는 겨우 성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하였고 이 해 10월부터 『서경』, 『시경』, 『주역』과 『춘추』를 간행하였다.
(2.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은 중(中)을 말하는 것인데, 미발의 중은 마음속에 있는 치우침이나 편벽됨이 없는 성(性)으로서, 아직 사물을 접촉하지 않아 희로애락이 발생하기 이전의 상태를 말한다. 이 성에서 온갖 도리가 나오기 때문에 대본이라고 한다. 이발의 중은 이미 사물에 접촉하여 마음속에서 도리가 겉으로 발생할 때, 당연히 기뻐해야 할 때에 기뻐하고, 화를 내야 할 때에 화를 내어 도리에 어긋남이 없이 절도에 맞는 중절의 상태를 말한다. 이 때의 중(中)을 곧 화(和)를 말한다)
1. 근사록 1175년 주희(朱熹:주자)와 여조겸(呂祖謙)이 주돈이(周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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