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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을주 천지조화
서효사의 역사관,신지비사 서효사의 역사관,신지비사 우리는 ‘서효사 역사관’을 통해 무엇보다 삼한관경제로 다스린 단군조선 전체를 조명해 봐야 한다. 큰 안목을 갖고, 지나족의 기록과 비교해 봐야 한다. 「서효사」 역사관은 후에 행촌杏村 이암李嵒이 쓴 『단군세기』와 조선 중종 임금 때의 찬수관撰修官(사관)을 지낸 행촌의 현손 이맥李陌이 쓴 『태백일사』를 통해 보다 명확하게 정리된다. 우리는 「서효사」를 통해 사마천이 『사기』에서 의도적으로 왜곡한 연나라 추장, 위만衛滿 이야기의 실체를 알 수 있다. 위만은 단군조선의 중앙 진조선 강역을 다스린 역사가 아니라, 삼한관경제의 서쪽 변방인, 기준왕이 다스리던 번조선 강역한 도적이다. 그런데 현 교과서에서는 번조선 말대의 역사를 전체 단군조선의 역사로 포장한 사마천..
단군조선 멸망의 이유 단군조선 멸망의 이유 단군조선은 신교의 삼신사상에 바탕을 둔 삼한관경제로 한민족의 고대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따라서 단군조선의 멸망 과정과 원인은 이와 관련된 사실에서 찾아야 합니다. 단군조선 멸망의 해답은 6세 달문단군 때 신지 발리가 지은 「서효사誓效詞」(일명 신지비사神誌秘詞)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서효사」의 핵심 내용인 신교의 삼신사상에 기초하여 성립된 삼한관경제(진한, 마한, 변한)를 시행하고, 삼경제도(소밀랑, 백아강, 안덕향)의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단군조선은 한민족 역사상 최대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이미 「서효사」에서 경계한 바와 같이 단군조선 말에 이르러 삼신사상이 쇠퇴하면서 삼한관경제가 와해되고, 단군조선도 종말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단재 ..
국통맥은 북부여北夫餘로-해모수 국통맥은 북부여北夫餘로 고열가단군이 “나는 이제 그만 물러나겠다” 하고선 산으로 들어가기 1년 전인 단기 2095년(기원전 239년)에 우리 민족 국통맥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바로 지금의 길림성 서란에 있는 웅심산熊心山에서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한 것입니다. 해모수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고리국 출신으로, 백악산 아사달을 점거하고 오가 부족장의 6년 공화정을 철폐하였습니다. 이에 백성들이 해모수를 단군으로 추대하였고, 이로써 단군조선을 계승한 정통 왕조 북부여北夫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단군조선의 멸망 과정에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단군조선 2,096년은 단군조선의 중심 세력으로 만주에 있던 진한(진조선)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고열가단군은 퇴위하였지만, ..
서방 경략의 교두보이자 방파제인, 번조선의 역사 서방 경략의 교두보이자 방파제인, 번조선의 역사 초대 왕 치두남蚩頭男과 낭야琅邪 중원 지역과 직접적으로 맞닿은 지역은 번조선 영역입니다. 단군조선 초기 중국은 국가의 존망이 달린 대홍수를 당하였습니다. 이전에 단군조선의 도움으로 보위에 오른 순舜은 9년 동안 계속된 물난리를 단군조선의 도움으로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단군왕검께서는 서방 한족을 제지하고자, 한족이 두려워하던 치우천황의 혈통인 치두남蚩頭男을 번한 왕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지금의 허베이성 개평 동북쪽에 있는 탕지보湯池堡에 수도를 세웠습니다. 이곳이 험독險瀆으로 왕검성王儉城이라고 칭하였습니다. 치두남은 허베이성 난하 부근인 요수遼水 주변에 12성을 쌓았습니다. 치두남이 세상을 뜨자 아들 낭야琅邪..
단군조선을 전하고 있는 국내 사료의 문제점 단군조선을 전하고 있는 국내 사료의 문제점 이상으로 단군조선의 역사와 역대 단군들의 치적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아마 지금까지 알던 조선의 역사와는 많이 다를 것이고, 간략하게 알던 단군조선 역사의 큰 맥을 잡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잘못 알게 된 단군조선의 역사와 관련하여 『삼국유사』를 비롯한 국내 사료의 문제점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환인천제의 환국과 환웅천황의 배달국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상고사가 단순히 환인, 환웅, 단군 3대로 이어진다는 역사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둘째는 단군왕검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1,048년을 혼자 다스리다가 산신이 되었다는 신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수도 이전에 따라 송화..
몰락하는 단군조선, 44세 구물단군의 치적-대부여 몰락하는 단군조선, 44세 구물단군의 치적-대부여 삼한에서 삼조선으로 구물단군은 삼한을 삼조선三朝鮮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로부터 삼조선이 비록 대단군을 받드는 제도는 그대로 유지하였지만 화전和戰의 권한, 즉 병권兵權은 이제 단군 한 분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단군조선은 우화충 반란 이후 국력이 급격하게 쇠미하였는데, 이렇게 된 실제적인 원인은 바로 병권의 분립에 있었습니다. 즉 44세 구물단군 이전에는 진조선의 천왕인 대단군 한 분이 중앙집권적으로 삼한(삼조선)의 병권을 집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삼조선 체제로 바뀌어 삼조선이 각기 전쟁 수행 권한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병권 분립은 단군조선 체제가 약화되어 붕괴의 길을 걷는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병..
단군조선 제3왕조 단군 임금들의 업적 단군조선 제3왕조 단군 임금들의 업적 아, 슬프구나! 부여에 부여의 도가 없어진 후에 한나라 사람이 부여에 쳐들어왔고, 고려에 고려의 도가 없어진 후에 몽골이 고려에 쳐들어왔다. 만약 그 당시에 미리 제정되어, 부여에 부여의 도가 있었다면 한나라 사람은 한나라로 쫓겨 가고, 고려에 고려의 도가 있었다면 몽골인은 몽골로 쫓겨 갔을 것이다. 신시에 나라를 연[神市開天] 이후로 국통이 있어, 나라는 이 국통으로 인하여 세워지고, 백성은 이 국통으로 인해 흥하였나니, 역사를 배움이 어찌 소중하지 않으리오?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서序」) 단군조선 제3왕조 시대 우화충의 난을 진압하다 43세 물리단군 말엽에 우화충于和沖이 사냥꾼들을 모아 큰 반란을 벌였습니다. 그 와중에 물..
43세 물리단군과 우화충의 역모 사건 43세 물리단군과 우화충의 역모 사건 43세 물리단군 때에 이르러 삼한관경제가 완전히 붕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바로 사냥꾼 우화충于和沖의 역모가 그것이었습니다. 재위 36년인 을묘년 기원전 426년 길림성 서쪽 내몽골 서쪽으로 추정되는 융안隆安의 사냥꾼 우화충이 장군을 자칭하며 무리 수만 명을 모아 서북 36군을 함락시켰습니다. 군대를 보냈지만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일개 반란군조차 진압하지 못할 정도로 조선의 국력이 쇠약해진 것입니다. 그만큼 삼조선 간에 협력 체계도 와해된 상태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에 우화충은 도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물리단군은 좌우 궁인과 더불어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배를 타고 내려가다가 해두海頭에 이르렀는데..
25세 솔나率那단군과 조작된 기자조선의 진실 25세 솔나率那단군과 조작된 기자조선의 진실 25세 솔나率那단군과 조작된 기자조선의 진실 25세 솔나단군 때는 결국 중원 지역의 왕조가 교체됩니다. 즉 주나라 문왕과 그 아들 무왕이 상나라 마지막 왕 주왕紂王을 벌하고, 동이족 출신의 재상 강태공의 보필을 받아서 주나라를 세웠습니다. 이때 은나라의 기자箕子가 허난성 서화西華에 옮겨 가 있으면서 인사조차 사절하였다는 기록이 단군 재위 37년인 정해년 기사에 나옵니다. 이후 기자는 산둥성 조현曹縣에 묻혔습니다. 이를 보면 중국에서 기자가 한반도에 건너와 왕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은 완벽한 허구입니다. 즉,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멸한 뒤 은나라의 폭군 주왕에 의해 투옥되었던 기자를 석방하고 그를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