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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고대화폐서 한글 발견' 주장에 中학자들 발끈

세덕 2012. 7. 4.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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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수도>           
(선양=연합뉴스) 신민재 특파원 = 중국 고대 화폐에서 한글로 추정되는 문자가 발견됐다는 한국 학자의 주장을 중국 학자들이 반박하고 나섰다.

4일 법제만보(法制晩報)와 환구시보(環球時報) 등 현지 매체들에 따르면 중국 학자들은 이번 주장에 대해 '정통역사의 관점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쑹전하오(宋鎭豪) 주임은 법제만보와의 인터뷰에서 "논란이 된 화폐는 한눈에 보기에도 춘추시대 연(燕)나라 화폐 '연명도(燕明刀)'로, 지금으로부터 약 2천500년 전의 것인데 한국 학자가 말한 3천600년 전과는 시간상으로 서로 맞지 않다"고 밝혔다.

쑹 주임은 이어 "고죽국(孤竹國) 역시 중국 상(商)나라 초기의 요서(遼西) 일대 제후국으로, 한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중국 진(秦)나라 이전의 문자는 통일되지 않아 분별이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화폐에 새긴 글자는 주조된 지역의 지명일 수 있는데 이런 지명은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식별할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쑹 주임은 "해당 시기에는 알아보기 어려운 문자가 매우 많은데 이를 모두 한글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은 해석이 아니다"면서 "춘추전국시대의 화폐를 3천600년 전 화폐로 보는 관점에는 반박할 가치도 없다"고 말했다.

상하이 푸단(復旦)대 한국연구센터 스웬화(石源華) 주임은 환구시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현행문자는 세종대왕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몇 백년밖에 되지 않으며 세종대왕 이전에 사용된 문자는 모두 한자이며 독음(讀音)만 달랐다"면서 "(한글의 고대창제설은) 믿을만한 증거를 더 내놓아야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한국의 주역연구가 이찬구 박사는 최근 신간 「돈」에서 고대 중국의 화폐인 첨수도(尖首刀)에서 한글로 추정되는 두 글자인 '돈'과 '노'를 찾아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박사는 해당 글자가 새겨진 첨수도가 3천600년 전 요서 일대에 세워진 단군 조선의 제후국인 고죽국에서 주조된 것으로 추정했다.

smj@yna.co.kr

첨수도와 연명도와 관련한 중국의 인터넷 사이트에 실려있는 자료를 풀어보면, 첨수도와 연명도가 단군조선의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바, 그 내용중에서 중요부분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1. 첨수도

도폐가 진입된 때는 춘추전국 시대이며, 다른 범위로 확대되었다. 먼저 연나라 영역내에서 첨수도(포괄적으로 "침수도")가 출현되었다.

*이상 첨수도와 연명도 원문 출처 http://big5.sc001.com.cn/news.sc001.com.cn/dictionary/04/04/20070519/084839.shtml


한편 다른 자료에 실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침수도와 첨수도의 제작은 일찌기 연나라의 건국시에 북방의 산융(山戎)부족이 주조한 것에서 연유한다. 명도에 이르러 곧바로 인식되는 것은 첨수도의 뒤를 이어 나온 것이며, 또는 근본적으로 첨수도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국제교류의 인연으로 나중에 독특하게 되어 연나라의 주요화폐가 되었다. 연나라의 건국초기에, 주조되어 사용된 화폐는 관중이 사용하게 한 포, 패폐와 같은 모양이다. 당시에 형성된 주나라 이주민들은 포, 패폐와 연 토착민들이 사용하던 도화를 사용하였다. 전국시기에 들어가서는 연왕 희쾌가 요순임금을 모방하여  대신 희지에게 선양하려 하였는데, 이에 연나라에 내란이 일어났다. (서기전311년) 소왕이 나라를 찾은 후 제나라의 방식을 모방하였다. 화폐제작에 있어 정부가 화폐를 주조함이 이익이 있다는 의도하에 관에서 주조한 명도를 내놓고 포폐와 병행하여 통용케 했다........다행히 민심이 연나라를 잊지 않고 각읍이 제나라에 항복하는 것이 분분하여 제나라를 배반하고 연나라로 돌아가서 태자 희평을 군주로 받드니 이가 소왕이다.

*이상 원문출처 : 
http://blog.roodo.com/lm123 


3. 첨수도의 국적 문제

위 첨수도의 글 내용 중에서,

"주로 장성의 안팎에서 유통된 까닭으로 "흉노도"라고도 부른다. "흉노도"는 일제시기에 승덕, 장자구 일대에서 일찌기 출토되었는데...... "첨수도"가 연나라 정부에서 주조한 "법화"가 아니며......연나라 영역 내의 여러 지방 민족이 상업적 수요로 주조한 화폐......말기에 "첨수도"상에 나타나는 "명(明)"자는 명도전의 선도가 된다."

라고 한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먼저, 침수도를 흉노도라고 명명함으로써 단군조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화폐라고 단서를 던져주고 있다. 흉노는 주로 만리장성의 안팎에서 할동하던 족속으로 대략적으로 서기전7세기경부터 태원 서북의 오르도스 지역에서 영정하 중상류 지역에 걸쳐 활동한 것으로도 나타나며, 승덕이나 장자구 일대는 흉노는 물론 산융과도 관련있는 지역이 된다.


또, 첨수도가 연나라 정부에서 주조한 법화가 아니라 연나라 영역내의 여러 지방의 민족이 상업적 수요로 주조한 화폐라 함으로써, 첨수도가 연나라의 공식화폐가 아닌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더우기 첨수도 상에 나타나는 명(明)이라는 문자가 첨수도 후대에 나타나는 명도전과 직접 관련됨을 나타내어, 명도전이 첨수도와 더불어 연나라의 화폐가 아님을 은연 중에 나타내고 있는 것이 된다.

이상으로, 첨수도가 연나라의 화폐가 아니며, 다른 민족이 만든 화폐라고 밝히고 있어 결과적으로 단군조선의 화폐임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른 민족의 일례로는 위 연명도에 관한 글에 나오는 산융부족을 들 수 있다.


과연 산융부족의 정체는 무엇일까?


4. 소위 연명도의 국적 문제


다시 위 연명도에 관한 내용 중에서,

"명도"는 연나라 건국보다 이른 시기일 수 있으며......침수도와 첨수도의 제작은 일찌기 연나라의 건국시에 북방의 산융부족이 주조한 것에서 연유한다. 명도에 이르러 곧바로 인식되는 것은 첨수도의 뒤를 이어 나온 것이며, 또는 근본적으로 첨수도의 일종이다.

라는 부분을 잘 살펴보면, 엄청난 역사적 사실을 도출할 수 있게 된다.

명도가 연나라 건국보다 이른 시기일 수 있다는 내용은, 연나라의 건국은 실제로 서기전1122년 주나라가 건국된 후, 삼감의 난을 평정한 공이 컸던 소공 희석을 연에 봉한 때가 되므로, 주나라 초기라는 것이 되며, 이 시기보다 더 이른 시기라 하여, 첨수도에 대한 글에서 침수도와 첨수도의 제작이 연나라 건국시에 북방의 산융부족이 주조한 것이라는 내용과 상통하고 있다. 이에 더하여 연명도는 첨수도의 뒤를 어어 나온 것이며 첨수도의 일종이라고 밝히고 있어, 첨수도와 연명도는 같은 주체가 주조한 것이라는 말이 된다.

결국, 침수도와 첨수도와 연명도는 춘추시대(서기전770년~서기전403년)보다 훨씬 이전이 되는 주나라 초기에 산융부족이 주조한 것이라는 내용이 되는 것이다.

과연 산융부족의 정체는 무엇일까?

5. 산융(山戎)의 정체

중국기록인 열국지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전665년에 산융(山戎)이 연나라에 쳐들어와 제환공이 관중과 함께 연나라를 도와 영지국과 고죽국을 정벌하였다 하고, 또 서기전651년에 산융(山戎), 이지(離支), 고죽(孤竹)을 정벌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고죽은 중국기록인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적고 있는 고죽국을 가리키는 것이 되고, 이지는 위 영지국과 같으며, 한단고기의 번한세가에서 적고 있는 요중12성의 하나였던 영지(永支)를 다른 글자로 적은 것이 틀림없게 되는데, 영지성을 일명 영지국으로 적은 것이 된다.

산융은 중국기록에 의하면 영지국 및 고죽국의 북쪽에 위치하던 나라로, 제나라 환공이 관중과 함께 정벌을 나섰다가 결국 포기하였으며, 사막지대가 있었던 지금의 내몽골 지역이나 그 남쪽 지역으로 추정되는 나라가 된다. 이 지역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구려국(句麗國)이 위치하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서기전108년에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하였다는 소위 한사군 중, 요산과 소요수가 소재하는 소위 고구려현을 포함하는 현도군의 위치는 성덕과 장자구 일대와 근접하거나 이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된다.

중국기록인 수경(水經)과 수경주의 기록을 보면, 소요수는 대요수에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합류하는 강이며, 대요수의 중류 쯤에 고죽성이 위치한 것이 되고, 대요수의 서남쪽에 흐르는 유수라는 강의 상류에 고죽과 관련된 영지가 위치한 것으로 되는데, 이 영지와 고죽과 소위 고죽성의 북쪽 지역이 산융지역으로 되는 것이다. 수경에서 적은 대요수는 그 위치상 지금의 영정하가 되고 소요수는 지금의 청수하가 된다. 

결국, 산융은 대요수가 되는 지금의 영정하의 북쪽에 위치하며, 대요수의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합류하는 소요수를 포함하는 지역이 되어, 소위 한사군 중 현도군과 관련되는데, 현도군 중에 고구려현이 있는 것이 되고, 고구려는 구려, 하구려라는 용어와도 관련되며, 이러한 단어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구려국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것이 된다.


6. 첨수도와 연명도는 단군조선의 화폐

이상으로, 첨수도와 연명도가 산융부족이 주조한 것이라 하고 있고, 산융은 영지와 고죽의 북쪽 지역으로서 연나라 밖에 존재하던 나라가 되며, 그 위치상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구려국이라고 추정되는 바, 첨수도와 연명도라는 도폐는 실상 연나라의 화폐가 아니라, 결국 단군조선에서 주조된 화폐임을 드러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소위 연명도라 불리는 도폐는 일단 연나라라는 국명을 빼고 그냥 명도전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하게 된다.



첨수도와 명도에 새겨진 글자의 국적을 차치하고서라도, 우리기록인 한단고기의 단군세기와 단기고사에 원공패전, 자모전, 패엽전, 방공전 등의 화폐주조에 관한 역사가 기록되고 있는데, 특히 대진국(발해) 초기에 대야발이 지었다는 단기고사에 의하면, 서기전1620년에 자모전(子母錢)을 주조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바, 화폐의 모양으로 보아 또한 첨수도와 명도가 주조된 시기가 주나라 초기 이전일 수 있다는 것으로도 보아, 이 자모전이 곧 첨수도와 명도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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