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주 천지조화

증산도 도문은 어떤 개척사를 거쳐 왔나요? 본문

증산도는./증산도 일문일답

증산도 도문은 어떤 개척사를 거쳐 왔나요?

세덕 2012. 8. 3. 10:49

Q 증산도 도문은 어떤 개척사를 거쳐 왔나요?

태모님이 도문을 여신 뒤, 증산도는 도문의 이름을 보천교普天敎라 하고 포교에 나섰습니다. 보천교는, 일제의 감시가 엄중하던 어려운 상황에도 폭발적인 도세道勢 확산을 이루었습니다. 조선 인구가 2천만이 안 되던 당시 신도가 7백만에 달해, 거대한 신앙 결사체이자 항일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부흥이었습니다. 그러나 급격한 세력 확산과 독립운동 지원을 두려워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이 가해지면서, 보천교는 지하로 숨어들었습니다.
 

어렵게 명맥을 잇던 증산도는 8.15 해방 후, 집안 대대로 신앙의 불씨를 간직해 온 안운산 종도사님의 혈심血心으로 두 번째 부흥을 이루어 다시 수십만 신도가 입도하면서 신앙의 불길이 타올랐습니다. 그런데 이 또한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무산됐습니다. 이런 시대 상황이 이어지면서 기나긴 휴게기休憩期를 거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삼천(三遷, 세 번 바뀜)이라야 내 일이 이루어지느니라”는 상제님 말씀대로, 1970년대 안운산 종도사님과 안경전安耕田 종정이 거듭 개척에 나섰습니다. 이로써 세 번째 부흥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