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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의 뿌리를 일깨우는 곳 사직社稷공원 본문

역사 이야기/잊혀진 역사

역사와 문화의 뿌리를 일깨우는 곳 사직社稷공원

세덕 2012. 8. 3. 11:20

역사와 문화의 뿌리를 일깨우는 곳 사직공원

역사와 문화의 뿌리를 일깨우는 곳 사직社稷공원

이해영 /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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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자락에서 만난 단군왕검님

서울시 종로구와 서대문구를 가르는 우람한 산자락이 있다. 서울의 서쪽 경계를 맡아 호랑이를 연상케 하는 늠름한 기상으로 수많은 시인 묵객 화가들에게 소재로 선택되었으며, 그곳에서 바라본 경복궁의 위풍과 종로의 활기찬 모습은 수도 서울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어진[인仁] 임금[왕王]의 뫼[산山], 인왕산이 바로 그곳이다.

인왕산 자락의 시원하게 뻗은 바위 길과 성곽들을 지나 다시 도심 속으로 내려오는 길. 남산에 있다 일제의 의해 옮겨진 무격신앙의 상징 국사당, 활 잘 쏘기로 유명한 동이족 후예들의 모습을 엿보게 해주는 황학정을 지나면 우리들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장소를 만나게 된다. 동아시아 문명의 종주국이자 동방 한민족의 황금시대였던 고조선을 여신 단군왕검을 모신 신전(神殿), 바로 단군성전이다.

봄이라고 하기엔 다소 쌀쌀했던 지난 3월 15일. 이곳에서는 단군왕검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어천절(御天節)> 행사가 열렸다. 고려시대 우정승을 지내신 행촌이암 선생의 『단군세기』를 보면 단군성조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단군왕검은 BCE 2370년인 신묘년 5월 2일 인시에 태어나셨고, 14세 때 비왕이 되어 대읍국의 국사를 맡아 24년을 통치하신다. 그리고 BCE 2333년 무진년에 신시배달의 법도를 되살려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재위 93년간의 통치를 마감하며 BCE 2241년 경자년 음력 3월 15일에 붕어하였는데, 이 날이 바로 어천절이 된 것이다. 이 때 모든 백성들이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하였고, 단기(檀旂)주1)를 받들어 아침저녁으로 애도하며, 그 덕을 가슴에 품고 잊지 않았다 한다. 이 전통이 계승되어 고구려의 을지문덕, 연개소문 같은 영걸들도 매년 3월이 되면 강화도 마리산에서, 또 10월 개천절에는 백두산 천지에서 천제를 봉행했다고 전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때에도 단군왕검의 어천절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행사가 치러졌다.주2)

오늘날의 단군성전이 있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낡고 노후된 과거의 단군성전을 개증축하려던 노력이 일부 몰지각한 종교인들의 반대로 몇 십 년을 표류하다 1990년에야 비로소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나마도 우리 민족의 국조(國祖)를 모신 곳으로는 그 격에 걸맞지 않는 규모이며, 어천절 행사도 민간 행사에 그치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일부 종교인들의 역사와 뿌리에 대한 무지와 편견, 오만이야 그렇다쳐도, 이를 바로잡는 역할을 해야 할 역사학계와 정부에서 이를 소흘히 대하는 데에는 참담한 마음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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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와 더불어 나라의 상징이 된 사직
단군성전을 뒤로 하고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다소 의아스런 광경을 만나게 된다. 사직단 광장에 있는 신사임당과 이율곡 선생의 동상이다. 물론 두 분 다 우리 역사상 훌륭한 인물임에는 맞지만 그 위치가 어색하다는 것이다. 왜 이 분들이 이곳에 있어야 할까?

여기에는 일제의 의한 문화침략의 잔재가 스며있다. 일제강점기 때 경복궁을 비롯한 조선왕조의 많은 문화유산들이 훼손 철거되고 공간에 대한 왜곡이 진행되었다. 그러면서 딱히 이해관계가 없는 사직단은 사직공원으로 변경되면서 부속 건물들이 철거되고, 해방 무렵에는 사직단과 유원(壝垣;사단과 직단을 싸고 있는 낮은 담)의 기단부만이 남게 되었다. 이후 역사 고증이 제대로 되지 않은 채 동상들이 난립하던 60년대 말에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선생의 상이 여기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국태민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사직단 안에 이 두 분이 계시는 모습은 생뚱맞은 느낌마저 준다.

일제 때 훼손된 사직단이 어느 정도 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85년 무렵이다. 서울시에서 <사직단 고증조사 및 복원기본계획>을 수립하면서 정비가 되었고, 사직단 복원과 함께 그동안 맥이 끊겼던 사직대제도 되살아났다. 대제(大祭)는 1988년 10월, 종묘제례 기능 보유자인 고(故) 이은표 옹의 고증과 재현이후 현재까지 보존 계승돼 오고 있는 것이다.

흔히 사직(社稷)은 종묘(宗廟)와 더불어 국가나 조정과 동일시되었다. 나라가 새로 건국하면 그에 따라 새롭게 사직단을 세워 제사를 모셨다. 이 사직은 국토의 신인 사(社;국토지주國土之主)와 곡식의 신인 직(稷;오곡지장五穀之長)을 함께 모시던 곳이다.

땅은 인간에게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봄에 씨 뿌리면, 여름에는 자라게 하고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그 결실을 안겨주어 백성들을 먹여 살려주는 은혜로운 존재였다. 여기에 인간이 온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존립근거가 땅이었기 때문에, 그리스 신화에서도 땅을 ‘가이아’라는 여신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 땅으로부터 얻어지는 곡식은 모든 먹을거리, 즉 녹을 상징한다. 그래서 천자나 임금은 이 사직단을 세워 곡식을 바치고 천지에 제사를 지낸 것이다.


역사의 뿌리의식을 바로세우는 길
서울지역 문화유적을 답사하면서 사직단을 일부러 찾기가 쉽지 않다. 교통이야 편리하지만, 서울에 있는 다른 궁궐이나 문화재들처럼 멋들어진 건축물도 아니요, 흥미 있는 이야기 거리가 전해오는 곳도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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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시대를 살아온 우리 선조들의 기도와 염원이 서린 곳이며, 하늘과 땅이 직접 소통하는 공간이었던 이 사직단은 눈으로 보기 보다는 발로 느껴봐야 하는 곳이다. 지붕 없이 하늘의 변화 현상을 온전히 맞아가며,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만물의 성숙을 도모하는 땅의 덕성을 직접 느껴야 하는 곳이다.

무릇 뿌리는 드러나지 않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근원되는 곳에 엄연히 존재하여 변화의 섭리와 생명현상의 조화를 주관하는 곳이다. 서울 종로구 사직공원에 있는 사직단은 땅의 덕성을 깨닫고, 내 생명이 다시 돌아가야 할 근원을 올바로 인식하라고 말해주는 듯 했다. 여전히 홀대받는 단군성전은 우리 민족의 혼과 역사의 뿌리에 대한 원시반본(原始反本;뿌리를 살펴 생명의 근본으로 돌아감)을 준엄하게 일깨우고 있다. 단군성조를 노래한 옛노래 한구절이 떠올랐다.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 (개천절 노래, 정인보 작사)

따뜻한 햇볕이 내리 쬐는 가정의 달 5월. 우리 역사와 문화의 뿌리를 되새기며 사직공원으로 온 가족이 나들이를 나서는 것도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1.단군세기,2010.8, 이암 원저,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2.사직단 정문-실측조사보고서, 2005.12,문화재청

 

- 사직단의 유래와 변천사

우리 나라 사직단에 관련된 기록으로는 고구려 고국양왕 때가 최초이다. 고국양왕 9년인 392년 국사(國社)를 건설하고, 종묘를 수리케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백제, 신라, 고려에서도 이런 기록을 발견할 수 있고, 조선의 사직단은 고려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건국 후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한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고려의 제도를 따라 법궁인 경복궁 동쪽에 종묘(宗廟), 서쪽에는 사직단을 설치하였다. 1395년(태조 4) 공사를 착수하여 설단(設壇)이 완성되자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신실(神室)과 신문(神門)을 세웠다. 사직단은 사단(社壇)과 직단(稷壇)의 동·서 양단(東西兩壇)을 설치하였는데 동단에는 국사(國社:正位土神), 서단에는 국직(國稷:正位穀神)을 모셨으며, 단에는 주척(周尺)으로 높이 2.5자, 너비 1자의 석주(石柱)를 각기 세워 후토씨(后土氏)와 후직씨(后稷氏)를 배향(配享)하였다.

유가 통치이념을 내세운 조선은 주례와 예기를 통해 도성 건설의 설계도를 마련했다. 그래서 북극성을 보고 위치를 선정하였고, 구획을 짤 때 경위를 각기 9로 나누어 정 가운데에 궁궐을 축조하려 했다. 이는 바둑판형구획인데, 우리 조상들은 원칙을 고수하기 보다는 자연친화적인 모양을 따라 경복궁은 적용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원칙인 좌묘우사(左廟右社), 즉 임금을 중심으로 해서 동쪽(左)에는 왕권의 정통성 상징하는 종묘를, 서쪽(右)에는 사직단을 두었다. 사직단은 천원지방 사상에 의해 방형(方形)을 띄고 있다. 반면 환구단은 원형(圓形)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환구단은 하늘을, 사직단은 땅을, 종묘는 왕의 조상들, 더 나아가 사람을 상징하면서 우리 민족 고유의 천지인삼재 사상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직단에는 1년에 네 차례의 대사(大祀:임금이 직접 참석하는 제사)와 선농(先農)·선잠(先蠶)·우단(雩壇)을 제사지내는 중사(中祀), 그 밖에 기곡제(祈穀祭)와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 사직단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사직서(社稷署:현재 어린이 도서관 근처)를 두어 제사의 수발을 맡게 했는데, 대한제국 성립 후에는 태사태직(太社太稷)으로 칭하고 신관제(新官制)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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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수천 년 동안 어린 아이의 머리에 고운 비단헝겊을 달아주는 단기(檀旂) 풍속은 바로 초대 단군왕검을 추모하는 조기(弔旗)의 변형이다. 이 단기는 그 후 음 변동으로 인해 댕기라고 알려졌고, 이는 우리가 모두 단군왕검의 자손이라는 증표가 되었다.
주2) 1921년 음력 3월 15일 어천절 행사가 거행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4월 30일자 신문에는 당시 법무총장인 신규식의 축사와 이승만 대통령의 찬송사가 남아있다. 특히 기독교인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찬송사는 당시 우리 국민들의 국조(國祖)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준다. “우리 황조는 거룩하시사 크시며 임금이시며 스승이셨다. 하물며 그 핏줄을 이으며 그 가르침을 받아온 우리 배달민족이리오. 오늘을 맞아 기쁘고 고마운 가운데 두렵고 죄 많음을 더욱 느끼도다. 나아가라신 본뜻이며 고로 어라신 깊은 사랑을 어찌 잊을손가. 불초한 승만은 이를 본받아 큰 짐을 메이고 연약하나마 모으며 나아가 한배의 끼치심을 빛내고 즐기고자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