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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 천상열차분야지도 본문

역사 이야기/잊혀진 역사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 천상열차분야지도

세덕 2012. 9. 25. 12:14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 천상열차분야지도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 천상열차분야지도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는 천문학자인 박창범교수가 쓴 저작의 제목입니다.

 

이 책은 그 동안 한국사에 기록된 수많은 천문기록, 즉 일식, 오로라, 달과 혜성의 움직임, 유성과 운석의 낙하 등 각종 천문기록을 통해 단군조선의 실체 및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강역과 기존 정사인 ‘삼국사기’의 진위여부 등에 대해 과학적 데이터를 이용하여 연구해온 저자의 생생한 연구의 성과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책이 발행되자 역사학계는 그 동안 논란이 되어 왔던 고대사 논쟁이 더욱 확산되었고 반론과 재 반론 등 학계의 연구가 더욱 풍부해졌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천문학에 대해 문외한이고 역사학 또한 일천한지라 이 책에 내용에 대해 시비를 논할 능력이 없지만 최소한 천문학자가 자신의 학자적 양심을 걸고 오랫동안 연구해온 내용이기에 기존 사학자들도 최소한 박창범 교수가 제시하고 있는 과학적 데이터들에 대해 진지한 연구와 검토가 이루어져야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좀 생소한 고 천문학이 더욱 발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여러 가지 내용들은 차차 기회가 되는 데로 소개하기로 하고 오늘 제가 설명하고자 하고 싶은 부분은 지난번 새 만원권의 도안으로 채택된 혼천시계에 이어 한번 소개하겠다고 블러그 친구들에게 약속했던 [천상분야열차지도]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경복궁내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에 들어서면 아주 커다란 비석모양의 돌 하나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돌에는 양쪽으로 여러 모양과 글이 적혀져 있는데 한쪽은 매우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고(편의상 이쪽을 뒷면으로 부른다) 앞쪽에는 누가 봐도 하늘의 별자리를 새겨놓은 것이란 걸 알 수 있을 만한 도형이 그려져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국보 제 2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 입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조선 태조본) 탁본. 200.9×122.8cm,

찍어논 사진이 없어 탁본을 보여드립니다.  원래는 흑요석

 

이 각석은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가 새 왕조의 표상으로 천문도를 갖길 원해 서운관(書雲觀)에서 〈중성기 中星記〉를 편찬한 다음 그에 따라 이 천문도를 석각한 것입니다.  

 

원 안에는 전통적으로 동양 천문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삼원(三垣)·28수(宿)·12차(次)가 모두 새겨져 있고, 그 둘레에는 천문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간단하게 적혀 있습니다.

 

원형 아래에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이름이 머리부분에 새겨져 있는데, 이는 천문 현상을 12차로 나누고 분야를 밝혀놓았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다. 그 밑에는 천문도의 제작과정과 참가자의 이름, 1395년(태조 4)에 만들어졌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이것은 권근(權近)이 쓴 것입니다.

 

이 각석은 세월이 지나 마모가 심해 판독하기 쉽지 않아 1687년(숙종 13)에 똑같이 다시 새긴 '복각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보물 제837호, 세종대왕기념관)을 새겼고 그것은 현재 세종대왕기념관에 보관전시 되어 있습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숙종본). 위 사진은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복사본

푸른색으로 보이는 부분이 은하수 입니다

 

우리나라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천문도는 대부분 이 각석의 탁본 또는 필사, 모방 한 것이니 현존하는 대부분의 천문도의 기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천문석각의 전체적인 구성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윗부분에는 12국분야 성수분도(星宿分度), 일수(日宿), 월수(月宿), 천(天) 그리고 8개 방향에 대한 짧은 설명이 사방에 있고, 석판의 중앙에 지름 76cm의 3중원이 그려져 있으며, 그 안에 모두 1,464개의 별들이 점으로 표시되어 있고, 별자리의 이름이 해당한 위치에 새겨져 있습니다.

 

아랫부분에서는 논천(論天)과 28수 거극분도(去極分度), 천문도 작성의 역사적 배경과 경과, 제작에 참가한 사람들의 관직과 이름을 적고 맨 끝에 홍무(洪武) 28년 12월에 제작하였다는 제작년도를 새겼습니다.

 

이 석각의 중심 부분인 별자리 그림에는 중심에 북극을 두고 태양이 지나는 길인 황도(黃道)와 남ㆍ북극 가운데로 적도(赤道)를 나타내었고 북반구에서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별들이 총망라되어, 황도 부근의 하늘을 12등분 한 후, 1464개의 별들을 점으로 표시하였습니다. 이 그림으로 해ㆍ달ㆍ5행성(수성ㆍ금성ㆍ 토성ㆍ화성ㆍ목성)의 움직임을 알 수 있고, 그 위치에 따라 절기를 구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석각은 당대의 천문학에 대한 지식이 총망라되어 있을 뿐 아니라 당시의 여러 가지 역사적 귀중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석각에는 그 제작유래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조선 초 유학자인 권근이 적은 것으로 내용을 보면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구려 석각 천문도의 인본을 원본으로 삼고, 당시의 하늘의 모습을 참조하여 천문도 일부를 고쳐 새긴 것이라 적혀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귀중한 사실을 알 수 있는데 한가지는 고구려 시대에 이미 이와 같은 천문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과 조선 초에 그 내용을 수정할 수 있을만한 천문학 지식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많은 비판이 가해졌는데 특히 중국은 삼국사기에 중국에서 천문도가 고구려에 전해졌다는 기록을 가지고 중국 당나라 황제가 고구려에 천문도를 하사했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로 말도 안된 주장입니다.

 

첫째는 당시 당나라와 고구려는 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다투던 적대국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적대국에 당시의 황제-고구려에서는 태왕-의 고유한 권한인 천문학의 집약인 천문도를 하사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며

 

두번재로는 중국에서 전해졌다는 기록이 고구려가 망한지 24년이나 지난 뒤의 기록이란 점에서 신빙성이 떨어지는 주장입니다.

 

자 그렇다면 권근의 말을 부정할 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으니 일단 고구려의 천문도를 근거로 만들었다는 말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조선 초의 하늘에 맞게 수정했다는 부분인데 이것이 사실이란 점을 바로 박창범 교수가 밝혀내었는데 이는 천문학자가 아니라면 밝혀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컴퓨터의 발달로 지구의 자전과 공전, 북극이 2만 5천 8백 년 주기로 옮겨가는 세차운동을 컴퓨터에 입력시켜놓고 천문도에 그려진 별자리들의 위치를 북극과 적도의 위치와 비교하면 어느 시대의 하늘의 별자리인지, 어느 지역에서 관찰한 하늘의 별자리인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박창범 교수는 이러한 실험을 통해 천문도의 중앙부인 북극 주변은 조선시대 초의 하늘의 모습이고 그 바깥에 있는 별들은 서기 1세기경인 고구려시대 초기로 밝혀내었습니다. 관측자의 위치도 조선 초 천문도 중앙부의 별자리는 한양의 위도 38도로 나왔고 고구려시대의 바깥쪽의 관측지점은 위도 39~40도 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로서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구려의 1세기에 작성된 천문도를 기본으로 조선 초에 수정된 하늘의 별자리임이 확인된 것입니다. 또한 북극에서 남극까지 온 하늘의 별자리를 한데 모아놓은 관측연대상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전천성도 인 것입니다.

 

서기 1세기에 하늘의 모습이 이렇게 정확하게 그려놓았다니.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도가 남송때 [순우천문도] 에 비취어 볼 때 하느님의 자손이라 생각한, 즉 천손의 나라인 고구려 선조들의 위대함에 다시금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우수한 천문학적 지식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도 확연히 들어나 있습니다. 현재 서울시립 역사박물관에서 기획 전시중인 고구려 고분벽화 전에서 고분벽화에 새겨진 별자리의 내용을 보면서 그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덕흥리 고분 천장에 그려진 별모양, 역사박물관 고분벽화전에서 촬영

 

 

고분벽화에 표현된 동방과 서방의 쌍삼성, 남방의 남두육성, 북방의 북두칠성 등은 고구려 식 천문방위 관념을 나타내는 별자리이고 하늘의 28개 별자리는 방위 별로 7개씩 나뉘어 청룡, 백호, 주작, 현무로 형상화 되었는데 이 사신(四神)이 고분벽화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것도 고구려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벽화에 새겨진 하늘과 천상열차분야지도의 하늘을 대비시켜놓았는데 거의 흡사한 모습

역사박물관 고분벽화전에서 촬영.  삼각대를 사용하던지 수전증을 치료하던지...

 

또한 별자리를 표시함에 있어 밝은 별은 크게 새겼고 어두워질수록 크기를 작게 새기는 것은 우리나라의 천문도에만 볼 수 있는 독창적인 기법이기에 고구려의 천문기법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있던 고구려만의 것이며 당대의 하늘에 대한 관찰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고구려의 천문도를 기본으로 조선 초에 새로운 연구를 통해 새롭게 천문도를 계산해낸 학자는 누구였을까요?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설명문에는 모두 1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권근이 글을 짓고, 유방택이 천문계산을 하고, 설경수가 글을 썼다고 돼 있습니다. 권근은 문필가, 설경수는 원나라에서 고려로 망명한 당대 유명한 서예가여서 천문학과는 관련이 없고 뒤에 나오는 권중화역시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문관으로 역시 천문학자가 아니었습니다. 나머지 8명에 대한 역사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천문계산을 했다고 기록된 유방택은 어떤 인물일까요?

 

유방택에 대해서는 박성래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과학사)가 밝혀내었는데 유방택에 대한 유일한 기록은 고려 말 대표적 학자인 정이오(1347~1434)의 문집 <교은집>에 실려 있는 ‘유방택 행장’이 거의 유일하며 행장에는 “ 이성계가 천문 계산을 이룩한 공로를 인정해 유방택에게 개국일등공신을 주려 했으나, 그는 사양하고 개성 취령산 아래 숨어 지냈다 " 고 밝혔습니다.

 

또 유방택은 죽는 날 두 아들에게 “ 나는 고려사람으로 개성에서 죽으니, 내 무덤을 봉하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 고 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고 합니다. 그는 조선왕조가 시작되자 고향 서산으로 내려와 살면서 공주 동학사 삼은각을 짓고,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등 세 고려 충신들을 기렸다고도 합니다.  

 

유방택. 고려의 충신으로서 조선 개국이 못 마땅했지만 새로운 천문도를 통해 널리 하늘의 이치를 밝히고 농사에 밀접하여 백성에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이 미치는 일에는 기꺼이 동참했던 유방택.

자신의 정견을 넘어 나라와 백성의 이로움에 관계된 일이라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주를 아낌없이 내놓았던 진정한 지식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혹시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지난 4월 우리나라에서 새로 발견한 소행성 두 개에 우리나라의 학자 이름이 세계적으로 공인된 기쁜 뉴스를 들었습니다. 태양계의 한 구성원인 소행성은 주로 화성의 공전궤도와 목성의 공전궤도 사이에서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작은 천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날 한국천문연구원(원장 박석재)은 보현산 천문대 1.8m 광학망원경을 이용, 2000년과 2002년 발견한 소행성에 각각 '유방택(柳方澤. 1320-1402)', '이원철(李源喆. 1896-1962)' 이름을 헌정, 국제천문연맹(IAU) 소행성센터(MPC)로부터 승인을 얻었다고 18일 밝혔는데 이에 따라 2003년부터 우리가 발견, 소행성 이름으로 등재된 최무선, 이천, 장영실, 이순지, 허준, 홍대용, 김정호에 이어 8, 9번째로 우리 선조 이름의 소행성을 갖게 됐다는 뉴스입니다.  

 

왼쪽이 유방택 별, 오른쪽이 이원철 별

빨강,파랑 두개로 보이는 이유는 촬영된 시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유방택은 천상열차분야지도(국보 228호) 제작 천문계산부분의 총 책임자였으며 이원철은 1926년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으로 독수리자리의 에타별이 맥동변광성임을 밝혀낸 국내 첫 이학박사입니다.

 

 연구인력 수와 과학기술을 단순 비교하면 천문학 선진국에 비하면 보 잘 것 없는 우리가 새로운 학문적 쾌거를 이룩하여 우리나라 학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별자리들을 가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이란 조선시대 천문학 책에서도 나와 있듯이 우리는 이미 고대 때부터 관측이 가능한 별자리들의 우리나라의 이름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중 아주 일부분을 되찾아 오는 것일 뿐입니다.

 

현재에도 우리나라의 우수한 천문학자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고 있는 것도 이러한 고대부터 내려온 우수한 천문학의 전통이 남아있기에 가능한 일은 아닐까요?  

 

집현전에서 학자들이 잠든 모습을 보고 자신의 곤룡포를 벗어 덮어주던 따뜻한 세종대왕도 관상감에서 보고한 일식현상이 10여분 가량 지연되었다고 하늘의 지켜보는 일을 맡은 관리를 곤장을 때릴 만큼 하늘에 대한 관찰에 철저했던 우리 선조들의 빛나는 과학정신이 있기에 식민지와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경이적인 속도로 과학입국을 실현해 세계 경제 10대국 안에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지폐에 과학유물을 세가지나(혼천의, 천상열차분야지도, 보현산 광학망원경) 삽입할 만큼 과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이러한 우리 과학의 우수성에 대한 기록이며 2000년 전 우리 하늘에 새겨놓은 우리 역사인 것입니다.

 

 

참고자료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박창범, 김영사

[세종대왕과  그의 인재들]  박영규, 들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