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주 천지조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 본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총 1,775자, 21자 마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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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비문은 발견 초기인 1880년 직전에 만들어진 원석 탁본의 내용입니다. 이 원석 탁본은 글자 수가 총 1,775개이며 그 중 21자가 마멸된 상태로 탁출되어 있는데, 마멸된 21자는 모두 성의 이름이므로 중요한 내용에는 마멸된 글자가 없습니다. 특히, 이 원석 탁본에는 광개토 대왕릉비 비문에 대하여 가장 논란이 많은 ‘신묘년 조 기사’의 진실을 밝혀 줍니다. 현재 상태의 비문의 신묘년 조에는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왜가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 백잔, ○○, ○라를 깨뜨려 신민으로 삼았다.)’으로 되어 있지만, 원석 탁본에는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倭寇新羅以爲臣民’이라고 분명하게 탁출되어 있어 ‘왜가 신묘년에 쳐들어오므로 우리(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이를 깨뜨렸다. 그런데 백잔과 왜가 신라를 노략질하여 신민으로 삼으려고 하였다.’고 해석하게 해 줍니다. 따라서 왜가 백제와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다는 일본의 해석은 참으로 허황된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出自北夫餘天帝之子母河伯女郞剖卵降世生而有聖德後爲將登王命駕巡幸南下路由夫餘奄利大水王臨津言曰我是皇天之子母河伯女郞鄒牟王爲我連葭浮龜應聲卽爲連葭浮龜然後造渡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不樂世位天遣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罡履龍頁昇天顧命世子儒留王以道興治大朱留王紹承基業還至十七世孫國罡上廣开土境平安好太王二九登祚号爲永樂太王恩澤洽亏皇天威武柳被四海掃除仇恥庶寧其業國富民殷五穀豊熟昊天不弔卅有九晏駕棄國以甲寅年九月廿九日乙酉遷就山陵於是立碑銘其勳績以示後世焉其詞曰
永樂五年歲在乙未王以稗麗不歸戍人躬率徃討過富山質山至鹽水上破其丘部洛六七百營牛馬羣羊不可稱数於是旋駕因過襄平道東來歸由力城北豊王偹狩遊觀土境田獵而還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倭宀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倭殘國軍至窠臼攻取寧八城臼模盧城各模盧城幹氐利城○○城閣弥城牟盧城弥沙城古舍蔦城阿旦城古利城○利城雜珎城奧利城勾牟城古模耶羅城須鄒城○○○男而耶羅城瑑城於利城農賣城豆奴城沸城○利城弥鄒城也利城大山韓城掃加城敦拔城○○○城婁賣城散那城那旦城細城牟婁城亏婁城蘇灰城燕婁城析支利城巖門民城林城○○○○○○月利城就鄒城居拔城古牟婁城閏奴城貫奴城彡穰城曾拔城宗古盧城仇天城○○○○○其國城殘不服義敢出百戰王威赫怒渡阿利水遣刺迫城殘兵歸穴就便圍城而殘主困逼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跪王自誓从今以後永爲奴客太王恩赦先迷之愆錄其後順之誠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將殘主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八年戊戌教遣偏師觀息愼土谷因便抄得莫斯羅城加太羅谷男女三百餘人自此以來朝貢論事九年己亥百殘違誓與倭賊通王巡下平穰而新羅遣使白王云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王請命太王恩慈稱其忠誠特遣使還告以密計十年庚子教遣步騎五萬徃救新羅从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官軍方至倭賊退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从拔城城卽歸服安羅人戍兵从新羅城宮城倭寇大潰城內十九盡拒隨倭安羅人戍兵新羅寐錦遣使入从官軍告歸服請貢白王以倭戰破家僕潰奴客理以後是爲奴客家僕以戍太王顧辭倭賊敢出迎戰王師合戰破賊倭潰逃以官軍安羅人戍兵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唯國罡上廣开土境好太王大恩新羅寐錦遣家僕勾請太王命朝貢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步騎前鋒出石城圍連船擧兵叛王躬率徃討从平穰步騎前鋒相遇王幢要截盪刺倭寇潰敗斬煞無数十七年丁未教遣步騎五萬徃討倭寇从加羅路王師四方合戰斬煞盪盡所穫鎧鉀一萬餘領軍資器械不可稱数還破沙溝城婁城牛甶城鄒婁城舍蔦城那弥城廿年庚戌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中叛不貢王躬率徃討軍到餘城而餘擧國駭服獻出朝貢歸王請命王恩普覆於是旋還又其慕化隨官來者味仇婁鴨盧卑斯麻鴨盧椯社婁鴨盧肅斯舍鴨盧苦羅婁鴨盧凡所攻破城六十四村一千四百守墓人烟戶賣勾余民國烟二看烟三東海賈國烟三看烟五敦城民四家盡爲看烟亏城一家爲看烟碑利城二家爲國烟平穰城民國烟一看烟十訾連二家爲看烟俳婁人國烟一看烟卌三梁谷二家爲看烟梁城二家爲看烟安夫連廿二家爲看烟改谷三家爲看烟新城三家爲看烟南蘇城一家爲國烟新來韓穢沙水城國烟一看烟一牟婁城二家爲看烟豆比鴨岑韓五家爲看烟勾牟客頭二家爲看烟求底韓一家爲看烟舍蔦城韓穢國烟三看烟廿一古模耶羅城一家爲看烟炅古城國烟一看烟三客賢韓一家爲看烟阿旦城雜珎城合十家爲看烟巴奴城韓九家爲看烟臼模盧城四家爲看烟各模盧城二家爲看烟牟水城三家爲看烟幹氐利城國烟一看烟三弥鄒城國烟一看烟七也利城三家爲看烟豆奴城國烟一看烟二奧利城國烟二看烟八須鄒城國烟二看烟五百殘南居韓國烟一看烟五大山韓城六家爲看烟農賣城國烟一看烟七閏奴城國烟二看烟廿二古牟婁城國烟二看烟八瑑城國烟一看烟八味城六家爲看烟就咨城五家爲看烟彡穰城廿四家爲看烟散那城一家爲國烟那旦城一家爲看烟勾牟城一家爲看烟於利城八家爲看烟比利城三家爲看烟細城三家爲看烟國罡上廣开土境好太王存時教言祖王先王但教取遠近舊民守墓洒掃吾慮舊民轉當羸劣若吾萬年之後安守墓者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令偹洒掃言教如此是以如教令取韓穢二百廿家慮其不知法則復取舊民一百十家合新舊守墓戶國烟卅看烟三百都合三百卅家自上祖先王以來墓上不安石碑致使守墓人烟戶差錯唯國罡上廣开土境好太王盡爲祖先王墓上立碑銘其烟戶不令差錯又制守墓人自今以後不得更相轉賣雖有富足之者亦不得擅買其有違令賣者刑之買人制令守墓之
| 추모왕의 개국과 광개토왕의 치세 |
삼가 생각건대 옛날 시조 추모왕께서 창업의 기틀을 다지시니라.
왕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에게서 나셨으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니라.
왕께서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오시거늘 나실 때부터 성스러운 덕을 갖추시니라.
후일에 장차 제왕이 되시고자 수레를 준비하라 명하여 남쪽으로 순행하시다가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시거늘 왕께서 물가에 이르러 말씀하시기를 “나는 거룩한 하늘의 아들이요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둔 추모왕이니라. 나를 위하여 갈대를 잇고 거북이 무리를 떠오르게 하여라.” 하시니 이 말씀에 응하여 곧 갈대가 이어지고 거북이 무리가 떠오르는지라 이 강을 건너신 연후에 비류곡에 있는 홀본의 서쪽에서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시니라.
세월이 지나 세속의 왕위를 즐기지 아니하시니 하느님께서 황룡을 내려 보내어 왕을 맞이하게 하시거늘 왕께서 홀본의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밟고 하늘로 오르시니라.
이때 세자 유류왕을 돌아보며 명하시기를 “도로써 정치를 일으키라.” 하시니라.
대주류왕께서 그 위업을 계승하여 도로써 정치를 일으키시어 왕업을 크게 발전시키시니라.
후에 대대로 왕위를 이어 17세손이신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니 성수 열여덟에 왕위에 올라 연호를 영락이라 하시니라.
태왕의 은혜로운 혜택이 거룩한 하늘에까지 미치고 위엄과 무력이 사해에 떨치며 부정한 무리를 쓸어 없애시거늘 뭇 백성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니 나라가 부유하고 백성이 풍요로우며 온갖 곡식이 풍성하게 익었더라.
그러나 하늘이 굽어 살피지 아니하여 성수 서른아홉에 수레를 타고 나라를 떠나시니라.
이에 갑인년 9월 29일 을유에 산릉으로 옮기어 모시고 또한 비를 세워 왕의 훈적을 기록하여 이를 후세에 널리 알리노니 이러하니라.
| 패려를 복속하시다 |
영락 5년 을미에 패려가 잡아간 백성들을 돌려보내지 아니하거늘 왕께서 몸소 군을 이끌고 패려를 토벌하러 가시니라.
부산과 질산을 지나 염수 위에 이르러 그곳 들판 위의 부락 여섯과 군영 7백 개를 깨뜨리시니 노획한 소와 말, 양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더라.
이때 왕께서 수레를 타고 양평도를 지나 동쪽의 역성과 북풍으로 돌아오시어 유람하시며 그곳을 두루 순수하시고 토지를 살피시며 사냥을 하고 돌아오시니라.
| 백잔의 항복 |
백잔과 신라는 본시 우리나라의 속민으로 예로부터 우리에게 조공을 바쳐 왔는데, 왜가 신묘년에 쳐들어오매 바다를 건너 이를 깨뜨리시니라.
백잔과 왜가 신라를 침구하여 신민으로 삼으려 하거늘 이에 왕께서 영락 6년 병신에 몸소 수군을 이끌고 왜와 백잔의 나라를 토벌하러 가시니라.
군이 왜적의 소굴에 이르러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고사조성, 아차성, 고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수추성, 남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농매성, 두노성, 비성, 미추성, 야리성, 대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누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민성, 임성, 월리성, 취추성, 거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발성, 종고로성, 구천성 등을 공략하여 차지하고 이어 백잔의 국성에 다다르니라.
백잔이 의 앞에 굴하지 아니하고 감히 백번을 싸우려 하는지라 왕께서 불같이 노하시어 아리수를 건너 성을 압박하시니 백잔의 군사가 제 소굴로 도망치거늘 이에 국성을 포위하시니라.
백잔의 국주가 당황하고 다급하여 포로로 남녀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며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스스로 맹세하기를 “지금 이후로 영원히 노객이 되겠나이다.” 하니라.
이에 태왕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앞의 허물을 용서하고, 뒤의 순수한 정성을 기억하겠노라.” 하시니라.
이때 성 쉰여덟과 마을 7백을 차지하고 백잔 국주의 아우와 대신 열 명을 데리고 군을 물리어 도성으로 돌아오시니라.
| 무술년 정벌과 식신의 조공 |
영락 8년 무술에 소수의 군을 파견하여 식신의 땅과 계곡을 탐색하게 하시니 군이 탐색을 마치고 그곳을 공격하여 막사라성과 가태라곡을 쳐서 남녀 3백여 명을 포획하고 돌아오매 이로부터 식신이 우리에게 조공하며 영사를 논하니라.
| 신라를 구원하고 임나를 정벌하시다 |
영락 9년 기해에 백잔이 서약을 위배하여 왜의 도적들과 화통하거늘 왕께서 아래로 평양을 순행하시는데 신라에서 보낸 사신이 당도하여 왕께 아뢰기를 “왜인들이 저희 신라 영토에 가득 들어와 성과 못을 파괴하고 저희 노객을 그들의 신민으로 삼으려 하니 왕께 귀복하여 하명을 청하나이다.” 하니 태왕께서 은덕을 베풀어 그 충성심을 치하하시고 사신을 돌려보내어 신라왕에게 비밀한 계책을 알리도록 하시니라.
영락 10년 경자에 교명을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게 하시니라.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의 도적들이 가득하거늘 관군이 성 앞에 다다르는데 왜구들이 후퇴하니라.
이에 왜의 배후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귀복하거늘 이에 안라국 사람을 병사로 삼아 성들을 지키도록 하니라.
한편 다른 관군이 신라성과 궁성에 이르니 왜구가 흔들려 크게 무너지거늘 성 안 신라군의 십중팔구도 후퇴하는 왜적을 모두 물리치매 이에 안라국 사람을 병사로 삼아 성을 지키게 하니라.
신라의 매금이 사절을 보내어 관군을 따르고 우리나라에 귀복하여 조공할 것을 청하며 왕께 아뢰기를 “왜가 저희와 싸워 가복을 깨고 저희 노객을 궤멸시켜 다스리며 저희를 그들의 노객과 가복으로 여겨 포로처럼 부리려 하나이다.” 하니 태왕께서 이 하소연을 들어 주시니라.
이때 왜의 도적들이 감히 군을 움직여 우리와 싸움을 하려 하는지라 왕사가 합공하여 싸워서 대파하니 왜구들이 궤멸하여 도주하거늘 이에 관군은 안라국 사람을 병사로 삼아 성을 수비하게 하니라.
예로부터 신라의 매금은 몸소 우리에게 와서 영사를 논한 일이 없었거늘 이제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께서 큰 은덕을 베푸시매 신라의 매금이 가복을 보내어 무릎을 꿇고 하명을 청하니 태왕께서 조공을 명하시니라.
| 갑진왜란 |
영락 14년 갑진에 왜구가 법을 어기고 대방 땅을 침입하니라.
왜구가 백잔의 군대와 화통하여 석성에 나타나 배를 나란히 줄지어 띄우고 성을 포위하며 거병하여 반기를 들거늘 왕께서 몸소 군을 이끌고 토벌하러 가시니라.
평양을 지나 보병과 기병을 앞세우고 왜군과 마주치매 왕당이 즉시 돌격하여 적의 뼈를 부러뜨리고 마구 찔러 소탕하거늘 왜구들이 무너지고 패하니 베고 죽인 자가 무수하더라.
| 정미년 원정 |
영락 17년 정미에 교명을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하여 왜구를 토벌하게 하시매 가라를 향해 진군하여 그곳에서 왜구들과 마주치거늘 왕사가 사방으로 합공하여 싸워서 베고 죽여 남김없이 싹 쓸어 내니라.
이때 노획한 갑옷이 만여 벌이요 군수물자와 무기는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더라.
도성으로 귀환하는 길에 백잔의 사구성과 누성, 우불성, 추루성, 사조성, 나미성을 공략하여 깨뜨리니라.
| 동부여를 정벌하시다 |
동부여는 본시 옛 추모왕의 속민이었다가 도중에 배반하여 조공을 바치지 아니하거늘 영락 20년 경술에 왕께서 몸소 군을 이끌고 토벌하러 가시니라.
군이 부여성 앞에 이르니 부여에서 크게 놀라 나라를 통째로 들어 엎드려 조아리고 조공을 바치며 왕께 귀복하여 하명을 청하거늘 왕께서 마침내 은혜를 베풀어 널리 감싸 안으신 후 군을 물려 환도하시니라.
이때 그 은화에 감복하여 관군을 따라온 자들이 있었으니 미구루 압로, 비사마 압로, 타사루 압로, 숙사사 압로, 고라루 압로이며 우리가 공파한 성은 모두 예순넷이요 마을은 1천 4백이더라.
(수묘인 연호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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