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의 뜻은?
우리나라 민요 가운데 아리랑은 가장 상징적인 노래다. 우리나라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를 가더라도 아리랑이 없는 곳이 없다. 또 누구나 한 곡쯤 부를 수 있는 노래도 아리랑이다.
옛날부터 아리랑은 식견 높은 양반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가 아니라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지어 부르고 어깨 너머로 배워 부르고 했던 백성들의 노래, 즉 민요(民謠)인 것이다.
아리랑은 어느 시대에 생겨났는지 확실하지 않다. 일부에서 수천 년 전부터 불려지기 시작했다고 하나 추측에 불과할 뿐 문헌에 등장하기 시작 한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부터다.
아리랑이 처음 기록된 문헌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후기 천주교 신자였던 이승훈의 『만천유고(蔓川遺稿)』에 있는 ‘농부사(農夫詞)’의 한 구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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啞魯聾 啞魯聾 於戱也... (아로롱 아로롱 어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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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말이 지금 불리고 있는 민요 아리랑의 모태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아리랑과 비슷한 후렴구가 조선 후기에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리랑이 불려지기 시작한 보다 구체적인 시기는 1865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경복궁 중수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역을 하던 사람들이 원납전(願納錢)을 강요받고 부녀자까지 부역에 동원시키라고 하자 불만이 커갔다. 이 모든 것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던지 “차라리 귀가 먹었으 면 좋겠다”고 탄식하며 읊조린 ‘아이롱(我耳聾)’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아리랑으로 변해 전국적인 민 요에 붙어 아리랑으로 확산되어 갔다고 한다. 이때부터 아리랑이 전국적인 민요가 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밀양 아리랑의 배경이 되는 전설의 주인공 '아랑'을 추모하면서 아낙네들이 부른 노래 ‘아랑가’가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멋과 얼이 담겨있는 상징적인 어휘다. 이렇게 오랜 세월 구전된 아리랑의 뜻은 무엇인가. 아리랑을 제 아무리 잘 부른다는 사람도 이런 질문에는 설왕설래한다. 아리랑을 한민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노래로 여기면서도 그 뜻조차 알지 못하기에 '아리랑'은 매혹적인 연구 대상이 되어왔다.
1930년대부터 미미하게나마 연구되기 시작한 아리랑의 뜻을 찾기 위해 최근까지 수많은 학자들이 다양 한 접근을 시도해왔다.
고어(古語)에 의한 유추 방법, 전설에 의한 유추 방법, 문헌을 근거로 한 유추 방법 등 온갖 노력을 하며 아리랑의 뜻을 끄집어내려고 했으나 어느 것 하나 설득력 있는 정설(定說)로 평가받지 못했다. 오히려 아리랑의 뜻에 너무 집착을 하다보니 아리랑과 비슷한 어휘들을 아리랑에 결부시켜 구구한 설만 나오게 했다. 그러나 ‘아리랑’이라는 낱말이 뜻을 나타낸다고 하기보다는 음악적으로 리듬을 이루고 흥을 돋구 는 무의미한 사설(nonsense verse)에 가깝다.
지금까지 논의된 아리랑의 어원 가운데 대표적인 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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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난 전설을 근거로 한 학설로 알영정(閼英井)과 알영천(閼英川)에서 유래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妃) '알영'의 덕을 찬미하는 것으로, ‘알영’이 후에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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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아리랑의 배경이 되는 전설의 주인공 '아랑'을 추모하면서 아낙네들이 부른 노래 ‘아랑가’가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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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무렵(1865~1872) 전국에서 선발된 부역꾼들이 고향을 떠난 외로움과 사랑하는 아내, 연인과 떨어져 있음을 한탄하면서 "나는 님을 이별하네"라고 부른 아이랑(我離娘)에서 유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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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면서 발행한 원납전(願納錢)의 강제 유통으로 인해 백성들은 그 소리에 귀가 멀 정도였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내 귀가 먹어서 원납전 내라는 소리를 듣고싶지 않다"는 '但願我耳聾 不聞願我耳聾'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는데, 여기서 '아이롱'이 변해 아리랑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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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을 때 부역민들이 쉬지도 못하고 혹사당하자 자탄조로 '魚河 我多苦'라고 했다.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시기에도 부역민들이 이를 모방해 "나는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난다"는 뜻인 '魚河 我難離'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아난이'가 후에 '아라리'로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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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합방 후 노골적으로 심해져 가는 일제의 착취에 대해 감히 맞서지 말고 못 본 척 하라는 '아이롱'이 아리랑으로 되었다는 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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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에 널리 유포되었던 “일본아 일어난다 미국은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는 풍요(風謠)의 내용과 뜻이 통하는 설로 아미일영(俄美日英)을 경계해야 한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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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부터 가옥을 신축할 때 상조문(上樑文)에 '아랑위(兒郞偉)'란 글을 검게 쓰는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이상운(李尙云)의 설을 이능화가 소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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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을 고유어와 한자의 혼합적 해석을 통해 규명한 설로, '광명()을 찾아옴'에서 연유한 고개를 '아 리령(嶺)'이라고 밝히고 아리·어리·오리·우리에 관한 지명을 전국적으로 분포된 고개로 대동여지도에 찾아 문헌적으로 고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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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실에의한 유추설로 낙랑(樂浪)에서 남하하는 교통로의 관문인 자비령(慈悲嶺)의 이름을 '아라'로 보고 있다. 역사적 변동기에 유민들이 남하하면서 넘던 고개를 낙랑과 진번의 경계선인 자비령으로 생각해 낙랑-자비령-아리령 관계를 정립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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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어에 의한 유추적인 방법으로 동남(童男), 동녀(童女)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밖에도 여진어의 ‘아린’(고향)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아리고 쓰리다'에서 연유되었다는 설, 인도의 신(神)인 '아리람 쓰리람' 신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생겨났다는 설 등 무려 40여 가지 설에 이른다.
'아리랑'이란 매혹적인 용어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백인백색의 다양한 주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는 아리랑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각별하다는 반증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아리랑의 정확 한 어원에 대한 규명 없이도 그 가락과 그 노래에 무한한 포근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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