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주 천지조화
참진리를 깨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다 본문
참진리를 깨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다 |
조승현(남, 35세) / 캐나다 벤쿠버도장 / 도기 133년 11월 11일 입문
외국생활 14년 동안
사람은 왜 태어났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할까?
이런 생각들이 항상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조상님은 구시대의 유물?
저는 한국에서 대학 2년까지 마치고 남들이 부러워한다는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을 마친 뒤 1995년 온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 왔습니다. 항상 미국생활을 동경해왔고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을 합리적이라며 내 민족 내 조국의 현실상황을 비판하고 서양문화를 동경하면서 살아온 저로서는, 한국이라는 조국에 대해서는 애착도 미련도 없었습니다. 그저 자유분방한 서양인들의 삶을 쫓아 나도 그들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욕망으로 살아왔을 뿐입니다. 그런 저에게 조상님들이란 그저 구시대의 유물같은 의미밖에 없었습니다.
인생의 목적을 찾아 떠난 여행
그러나 14년간 외국생활을 하면서 서양인들의 일부분으로 살아보겠다는 생각은 어느 순간 이루지 못할 신기루처럼 보여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피부색과 사고방식이 다른 서양인들 사이에서의 생활이란 결국 허무함과 뭔지 모를 공허함만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때 제게 신앙이란 그저 자연스러운 기복의 수단으로밖에는 더 이상의 의미가 없었습니다. 3대째 천주교 신앙을 해오던 집안인지라, 어려서부터 하느님과 예수님밖에는 모르면서 자라왔지만, 그런 신앙생활은 허무함을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1999년 서른을 앞둔 안타까운 마음에 이대로 그냥 나이만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홀로 한달간 중국여행을 갔습니다. 여행을 통해서 얻은 것도 많았지만, 그중 무엇보다도 인간은 고귀한 존재이고 내가 마음을 열면 상대방도 마음을 연다는 평범한 진리를 체험하고 돌아왔습니다.
상해임시정부를 방문한 것은 저에게 중요한 경험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민족에 대한 자긍심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느끼게 해주었으니까요.
여행이 허무함을 채워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그후 또다른 여행을 준비하였지만, 6년동안이나 함께 산 아내는 저의 이러한 방랑벽이 싫어서 무척이나 여행을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고만 싶은 저는 시간이 갈수록 갈증만 더 심해졌고 혼자 떠나는 여행만이 유일하게 답을 찾을 수 있는 길이라는 막연함에 인생의 목적을 두고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9.11테러와 2002월드컵
그런데 9.11사건으로 인해 돌변하는 미국의 태도를 보면서, 막연히 좋다고만 생각하고 무조건적으로 추앙했던 서양의 가치관과 서양문화에 대한 기존의 생각들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이득에 관계된 일이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냉정히 등을 돌리는 서양인들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을 맞이하여, 별로 관심없이 지켜봐오던 한국팀의 선전에 감동했고, 한국인으로서 대단한 자부심을 느꼈으며 너무나 자랑스러웠습니다.
그즈음 월드컵 뉴스로 인해서 인터넷 이용시간이 늘다보니, 자연스럽게 가끔 들르던 충격대예언 사이트에 자주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개벽, 태을주, 증산도라는 단어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면서 사이트를 통해서 개벽에 대한 정보와 한민족의 역사에 대한 것을 읽고 정말이지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치 지난 30여년 인생이 눈가리개와 귀마개를 하고서 본래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 한편의 커다란 연극 속에 속아서 살아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전부터 예언에 관심이 많았던지라 더 자세한 것들을 알고 싶어서 사이트의 많은 글들을 헤집고 들어가 봤습니다. 결국에는 ‘태을주를 읽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더군요. 그럼 도대체 태을주가 뭔지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개벽에 대해서 써놨다는 『이것이 개벽이다』라는 책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개벽책을 읽고
그래서 개벽책을 읽고 싶다는 글을 올렸고 저를 인도해주신 변경미 성도님께서 2003년 6월쯤 책을 보내 주셨지요. 책을 읽는 와중에 인간의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회사동료의 부인이 갑자기 심장이 멎어서 세상을 달리했기 때문입니다. 아주 단란하고 화목했던 가족이었고 최근에 딸을 낳아서 좋아했었는데 주말 저녁 쇼파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세상을 달리한 것입니다. 저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또다른 충격이 뒤를 이었습니다. 예전부터 알던 형의 여자친구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불과 4일 간격으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장례식장에서 관 속에 누워있는 그분을 보니, 인간의 삶이 얼마나 덧없고 내가 과연 올바르게 잘살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러면서 진리는 있는 것인가, 과연 하느님은 계신 것인가, 왜 이런 불공평한 일들이 생겨나는 것인가에 해답을 얻기 위해서 더욱더 개벽책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며 읽는 개벽책 속의 증산도 진리는 너무나도 강력하고 깊게 마음속에 와닿았습니다.
특히 개벽책을 보내주시면서 정성스럽게 노란색 사인펜으로 주요 구절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줄을 쳐서 보내주신 변경미 성도님의 정성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도장이 없는 곳에 살다보니 메신저로만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꾸준히 도움을 많이 주셨고, 국제부의 남현주 성도님께서도 도움을 많이 주셨습니다. 두 분이 저를 입문의 길로 인도하신 거죠.
인간은 우주의 열매이고 이 세상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제시해주는 증산도의 진리는 커다란 충격으로 와 닿았습니다. 주변 식구들에게 진리를 전하다 보니, 좀더 진리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일었습니다. 책을 더 많이 부탁드렸고 진리책, 도훈말씀 등을 읽어보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증산 상제님은 참하나님
중독(中毒), 일독(日毒), 양독(洋毒)에 절어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 있는 한민족의 고대사에서부터 조상님들의 음덕에 감사조차 못하고 제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던 저의 어리석었던 삶을 반성하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하느님이신 우리 증산 상제님을 바로 알게 되었다는 점이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가족들에게 처음 설명할 때는 ‘강증산이란 사람이 있었는데’에서 ‘강증산이라는 분이 있었는데’로, 결국에는 ‘우리 증산 상제님이’로 바뀌어가면서, 제 자신이 새로운 사람으로 재차 태어나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시점에 인터넷 도전을 읽으면서 상제님의 인간적인 면을 많이 생각하게 되고 천주교에서 얘기하는 하늘에 계신 얼굴없는 아버지가 아니라 이 땅에 강세하시어 억조창생을 위해서 고생하시며 천지공사를 보시고 가신 우리 증산 상제님을 마음속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증산도의 진리를 탐독하고 인터넷 도전을 읽고 태을주 수행을 시작하면서 인도여행을 준비했습니다. 그때 잠시라도 한국에 들려 입문을 할 수 없겠냐는 변경미 성도님의 제안에 일정을 바꿔서 인도여행 후에 한국을 들르기로 했습니다. 인도 여행 내내 세계의 반대쪽에 사는 사람들의 어렵고 고통스런 삶을 피부로 느끼면서, 이 세상의 고통과 허무함을 증산도의 진리로 이해하는 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입문
2003년 11월 6일 한국에 도착하였는데, 복마가 훼방을 놓았는지 몸에 이상이 와 병원에서 주사맞고 링거를 꼽고 어느 정도 회복이 된 연후에야 도장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버스역까지 마중 나오신 변경미 성도님과 첫 대면을 한 뒤 도장으로 가서 포정님을 뵙고, 먼저 상제님께 인사를 올렸습니다.
드디어 내가 생각하고 꿈에 그리던 상제님의 어진과 태모님의 진영 앞에 반천무지 사배를 올리니 정말 감격이 샘솟았습니다. 처음으로 다른 분들과 함께 태을주를 읽어보고 태을주 이외의 주문들도 같이 읽어봤습니다. 어느 세월에 이 많은 주문들을 외우나 했는데, 이제는 심고문부터 개벽주까지 줄줄 외우고 있는 제 자신을 보면 많이 발전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교육을 마치고 대전으로 가서 태사부님과 사부님의 말씀을 듣고 정말로 잊을 수 없는 이틀간을 보냈습니다. 국제부 성도님들과 인사도 나눴습니다. 모두들 편안하고 너그러운 인상들이었습니다. 세상에 찌들어 사는 사람들의 인상 같지가 않았습니다.
사이비다 뭐다 해서 가족들이 처음에는 걱정하였지만 올바르게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저를 보고 증산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이 아직은 증산도 신앙을 반대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이해하고 진리를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입도준비를 하였습니다.
백일 정성수행으로 이루어낸 입도
2004년 1월 29일부터 시작된 100일 정성수행은 참으로 쉽지 않았습니다. 좋아하는 술도 끊고 새벽에 일어나서 100배례, 200배례를 하면서 나태해지려는 정신을 잘 가다듬게 해주는 소중한 수행시간이었습니다.
4월말로 생각하고 있던 입도는 아내의 반대와 여러 상황 때문에 5월로 미루어졌습니다. 5월말에 입도를 준비하던 저에게 집사람과 가족의 반대는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가정의 화목을 중요시 하라는 상제님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항상 몸을 낮춰 아내를 예로써 대하고 정성을 들이는데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차례 위기가 닥쳤습니다. 이유없이 증산도가 싫다는 집사람의 마음을 돌리기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의 반대는 저의 설득으로 어쩔 수 없이 저를 인정해주는 상황이 되었지요.
또한 주변에 도장이 없고 성금헌성 및 군령참가 기록도 전무한지라 입도 자체가 불확실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100일 정성수행의 덕인지, 입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엘에이도장에서 입도). 마침내는 가정의 화목과 입도 두 가지 모두 이루게 되었지요.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가족 모두를 상제님의 진리로 이끌라는 조상님들의 분부로 알아듣고 반드시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정의롭고 올바른 진리는?
증산도의 진리는 무극대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정의롭고 올바른 진리입니다. 이런 진리를 과연 일심으로 생활화 할 수 있을까에 대해 입문 후 자문자답을 해왔습니다.
해외에 살면서 입도의 기회가 늦어진 것이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약삭빠르게 기회나 엿보는 믿음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갈구하고 기다려온 그런 참 믿음을 갖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방황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왜 태어났는지 등… 뭔지 모를 허전함에 휩싸여, 인간의 삶이란 결국에는 허무하고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저에게 밝은 눈을 주었고 원시반본하게 해준 증산도의 진리. “삼생의 인연이 있어야 하느니라”고 하셨던 상제님의 말씀처럼 이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증산도의 진리를 만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열심히 신앙해서 하루빨리 가족들과 주변사람들을 널리 건져 후천세계로 다 같이 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일심으로 신앙하겠습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되었던 성구말씀이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에 와닿습니다. 특히 “천리는 때가 있고 인사에는 기회가 있다”는 도훈말씀이 지금 제 가슴속에 떠오릅니다.
'증산도는. > 증산도 입도 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리가 바로 증산도에 있었습니다 (0) | 2013.01.03 |
---|---|
증산도는 세상을 살리려는 道 (0) | 2013.01.02 |
인천공항에서 개벽책을 사서 읽고 (0) | 2012.12.26 |
미국에 사는 시누이가 한국에 와서 전해준 진리 (0) | 2012.12.24 |
고대사로부터 시작된 나의 열망 (0) | 2012.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