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주 천지조화

규원사화를 쓴 북애노인의 피맺힌 절규 본문

역사 이야기/잊혀진 역사

규원사화를 쓴 북애노인의 피맺힌 절규

세덕 2013. 6. 25. 12:52

규원사화를 쓴 북애노인의 피맺힌 절규
규원사화를 쓴 북애노인의 피맺힌 절규



(국립중앙도서관 보관 진본규원사화 영인본)

 


한국의 상고사(上古史) 및 만설(漫說)을 적은 역사책. 1675년(숙종 2) 북애노인(北崖老人)이 지은 책으로, 서문·조판기(肇判紀)·태시기(太始紀)·단군기(檀君紀)·만설(漫說)로 나누어져 있다. <규원>은 저자가 부아악(負兒岳, 북한산) 기슭에 있던 자신의 서재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조판기>와 <태시기>는 일대주신(一大主神) 환인(桓因)이 천지를 열어 창조하고, 환웅천왕(桓雄天王) 신시씨(神市氏)가 태백산에 내려와 선정을 베푸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으며, <단군기>에는 환검(桓儉)으로부터 고열가(古列加)까지 47대 왕명과 재위기간 및 각 당대의 치적이 쓰여 있다. <만설>에서는 이 책을 제작할 당시 조선이 만주를 잃고 약소국으로 전락한 것을 탄식하면서,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3가지 조건으로 지리(地利)·인화(人和)·보성(保性)을 내세웠다. 이 요소들은 각각 잃어버린 만주땅을 되찾고, 당쟁을 버리고 단결하며, 고유문화를 지킴과 동시에 남의 것도 취할 것은 취하자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사화제작에 참고로 한 책은 《진역유기(震域遺記)》로, 고려 말 과거에 낙방 후 술사(述史)에 뜻을 둔 청평(淸平) 이명(李茗)이 지은 사서인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이 책은 고려 초 발해유민이 쓴 《조대기(朝代記)》를 토대로 하였으며, 고사에 있어 《삼국유사(三國遺事)》보다 훨씬 진취적으로 기술되어 있다고 한다. 《규원사화》는 결국 단군시대로부터 내려오는 민족고유신앙인 신교(神敎)의 입장에서 쓰여진 종교적 사화로, 상고사의 사료(史料)로서보다는 한국문화의 저변을 이루어온 민족적 역사인식의 일면을 보여 준다는 점에 그 가치를 지니고 있다. 1책 70장.

 

(규원사화를 쓴 북애선생의 피맺힌 절규)


330년전 규원사화를 쓰신 북애선생께서

그 때 당시 우리 조선의 백성들이
우리 역사와 민족의 정기를 모르고
중국의 논리에 빠져 있는 것을 통탄하고 있는데,

이는
3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참다운 우리의 역사와 민족의 정기를 모르고
미망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이 많음을 한스럽게 생각합니다.

다음은
규원사화 태시기에 나오는 것으로서
북애선생이 세상의 무지함을 한탄하여 쓰신 것입니다.

余嗤之可惜, 近世學者, 拘於漢籍, 溺於儒術,
惛惛然以外夷自甘, 動稱華夷之說.

내가 남몰래 냉소하면서도 애석해 하는 것은,
근세의 학자들이 한나라의 서적에 얽매여 유교의 술수에 빠지고 흐리멍텅해져
'바깥 오랑캐(外夷)'라는 말을 스스로 달갑게 받아들여서

걸핏하면
'화이(華夷)'의 논리를 입에 올리는 일이다.

余於盛筵, 賓朋齊會, 皆雄談峻論之輩, 余因醉揚臂而呼曰:
"君等皆云華夷, 焉知我非華而中原之爲夷耶!
且夷者, 從大從弓, 東人之稱, 太古我朝鮮, 以武强鳴於世,
故中原之士, 聞風懼之, 夷豈是戎狄之賤名耶!

내가 어느 성대한 잔치 자리에서 손님이며 벗들과 함께 모였는데,
모두 뛰어난 말솜씨로 그럴싸한 말들을 하는 무리들이기에
내가 취기를 빌어 팔뚝을 걷어올리고 탄식하며 이르기를,

"그대들이 모두 '화이(華夷)'를 말하는데,
우리가 어찌 중화가 아닐 것이며
중원이 도리어 오랑캐가 됨을 그대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또한 '이(夷)'라 함은 '크다'는 것과 '활'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하여
동방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서,

오랜 옛적

우리 조선이 무예가 강성하여 세상에 이름을 드날린 때문에
중원의 선비들이 그 풍문을 듣고 두려워하여 그렇게 이름한 것인데,

이(夷)가 어찌 융(戎)이나 적(狄)과 같은 천한 이름이겠는가?

國自上古, 人皆强勇質直, 雅好禮讓, 中土有'東方君子之國'之稱焉,
我國豈本戎狄之類哉! 鴨水以外, 縱橫萬里之地, 是乃我往聖先民,
艱苦經營之地也, 豈本是漢家物耶! 孔子之世,
周室旣衰, 外族交侵, 厲王敗死於犬戎, 其他北狄 荊蠻 山戎無終之屬, 侵偪不已,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사람들이 모두 굳세고 날래며 품성 또한 강직하고 올바르기에
평소에도 예의와 양보를 좋아하여 중원에는 '동방 군자의 나라'라는 말이 있게 되었는데,

우리나라가 어찌 그 근본이 융·적 등의 무리와 같다는 말인가?  

압록강 바깥 사방 1만 리의 땅은
예전에 우리의 성인과 앞선 백성들이 어려움으로 일구어 온 땅인데,
어찌 본시 한나라 놈들의 물건이겠는가?

공자의 시대에 주(周) 왕실이 이미 쇠퇴하여 바깥 민족들이 번갈아 침범하니
여왕이 견융(犬戎)에게 패하여 죽게 되었고,
그 밖에 북융(北戎)이며 형만(荊蠻)과 산융(山戎) 등
끊임없는 무리들이 침략하여 핍박하길 마지않았었다.

我族亦以是時, 威振中土. 故孔子, 慨王政之不敷,
恨列國之交侵, 有志而作《春秋》, 尊華攘夷之說, 於是乎始立.
若使孔子, 生於我邦, 則寧不指中土而謂戎狄之地乎!"

우리민족 또한 이때에 위엄을 중원에 떨쳤었다.
때문에 공자가 왕의 다스림이 널리 미치지 못함을 개탄하고
여러 나라가 번갈아 침범함을 한탄하며 뜻이 있어서《춘추》를 지었기에,
중화를 받들고 오랑캐를 내친다는 말이 이때 비로소 쓰여지게 되었다.

만약 공자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오히려 중토를 가리켜 오랑캐의 땅이라고 어찌 말하지 않았겠는가" 하니,

滿座冷笑或驚怪, 不小縱有然之者, 竟不快應,
余蹴床而起, 人皆謂淸狂殊甚, 可歎.

모든 사람들이 비웃기도 하고 혹은 놀랍게 생각하기도 하였으며
적지 않게는 사뭇 수긍하는 자도 있었으나,

결국에는 모두 쾌히 응하지 않기에 내가 상을 박차고 일어나니,
사람들이 모두 광기가 매우 심하다고 말하였다.

통탄할 노릇이다.


이제 조만간 우리 역사의 실체가 드러나서
찬란했던 우리 선조의 광영을 돠찾는 날이 분명히 올 것입니다.

그 것을 준비하고 이루어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