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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선생 1921년 발행 월간지 '천고' 제3호 전모 확인

세덕 2013. 9. 17. 12:07

신채호 선생 1921년 발행 월간지 '천고' 제3호 전모 확인

신채호 선생 1921년 발행 월간지 '천고' 제3호 전모 확인

 



신채호 선생 1921년 발행 월간지 '천고' 제3호 전모 확인

단재 신채호 선생 며느리 이덕남 여사


자부 이덕남여사 베이징에서 발굴..연합뉴스에 최초 공개

당시 국내외 독립운동상황ㆍ일본군만행 등 생생하게 기록

전문가 "단재사학 이해ㆍ독립운동사 연구에 활력소 기대"

(서울=연합뉴스) 이돈관 편집위원 =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 언론인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단재 신채호 선생이 1921년 1월부터 중국 베이징에서 발행한 순한문 월간 잡지 '천고(天鼓)' 제1권 제3호의 전문이 최근 유족들에 의해 발굴됐다.

천고 제1호와 제2호의 전문은 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가 이미 수년 전에 입수해 국내 학계 등에 공개한 바 있으나 제3호의 전문을 확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단재사학의 이해는 물론 독립운동사 연구에도 활력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1992년의 한ㆍ중 수교 훨씬 전부터 중국에서 신채호 선생과 관련이 있는 자료를 수집하고 그의 발자취를 추적해온 자부 이덕남 여사(64)는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 있는 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연합뉴스에 천고 제3호 전문을 공개했다.

제1호, 제2호와 마찬가지로 베이징대학도서관에 유일본으로 소장돼 있는 제3호의 전문은 복사본이 아니라 워드 프로세서 문서로 재작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 자료를 검토한 고려대 한국사학과 최광식 교수는 원본과 일치한다는 소견을 밝혔다.

최 교수는 1999년 베이징대학에 초빙교수로 가 있을 당시 이 대학 도서관에서 제1-3호의 표지, 목차 및 '고고편(考古篇)' 본문 등을 복사한 후 그 자료를 토대로 '천고 고고편에 보이는 신채호의 고대사 인식'이라는 논문으로 발표한 바 있다.

모두 60쪽으로 된 천고 제3호에는 진왕(辰王)과 소도(蘇塗)에 대해 논한 고고편,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를 소개한 '임진왜란인물지일(壬辰倭亂人物之一)' 등 역사 및 독립운동 관련 문장과 세계 소식 등 14편이 실려 있다.

최 교수와 기념사업회 신홍식 사무총장은 이들 문장 가운데 '제3회 3.1절을 동포에게 널리 고함(第三回三一節普告同胞)' '독립운동중의 일대쾌보(獨立運動中一大快報)' '고고편' 등 3편의 문장을 신채호 선생이 쓴 것으로 보고 있다.

신채호 선생은 '동이(東夷)'의 夷를 파자해 만든 것으로 추측되는 '大弓'의 이름으로 쓴 '제3회 3.1절…'에서 1919년 3월1일의 독립선언은 한민족을 크게 일깨우기 시작한, 5천년 이래 가장 큰 사건이고, 따라서 3.1절도 5천년 이래 최대의 기념일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독립운동중…'에서는, 진생(震生)이라는 필명으로, 신일본주의(新日本主義)를 표방한 친일단체 '국민협회'를 조직해 도쿄에서 참정권 청원운동을 전개하던 민원식을 재일 독립운동가 양근환(당시 28세)이 1921년 2월16일 도쿄에서 처단한 소식을 비교적 상세하게 전했다.

필명을 신지(神志)라고 한 고고편을 통해서는 진왕을 소왕(小王)들이 세운 삼한 70여국의 종주(宗主)인 대왕(大王)으로 보았고, 소도는 신의 칭호로서 신단을 의미하며, 3신5제(三神五帝)와 3경5부(三京五府) 등 고대의 모든 제도가 모두 소도에서 비롯하고 모든 풍속 역시 소도에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천고 3호는 앞서 언급한 문장 외에 서울을 비롯한 국내와 중국 각 지역의 제3회 3.1절 기념 현황(各地第三回三一節紀念), 독립선언 지도자들의 옥중 근황(獨立運動首領之近況), 1921년 2월 이후의 독립운동 진행상황(二月以後獨立運動之進行) 등을 실었다.

청산리전투 직후인 1920년 10월 말부터 이듬해 4월까지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간도학살사건(간도참변)의 옌볜(延邊) 허룽(和龍)현 거류동포 피해 일람표(和龍縣居留同胞被禍一覽表), 봉오동전투(1920년 6월)에서 패한 일본군이 중국 마적을 사주해 일으킨 훈춘(渾春)사건(1920년 10월초) 이후의 현지 소식(渾春事件之彙報) 등도 전했다.

이들 문장에 따르면, 1921년 제3회 3.1절을 맞아 서울에서는 시민들이 북악산 위에 태극기를 높이 달고 만세를 부르며 경축의 뜻을 표시했으며, 이를 전후해 서울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된 사람의 수는 3천여 명에 달했다.

중국의 베이징, 톈진(天津), 한커우(漢口)의 동포는 물론 일본 도쿄의 히비야(日比谷)공원 광장에서도 유학 중이던 한국 학생들이 3.1절을 맞아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이에 폭력으로 대응한 일본경찰에 여학생 8명을 포함해 모두 76명이 체포됐다.

당시, 일제 법정에서 판결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독립선언 지도자 48명은 아침 7시에 일어나 저녁 7시에 취침할 때까지 하루 8시간씩 힘든 노역을 하면서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한 방에서 3명이 담요 한 장으로 추위를 견디는 등 목불인견의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 며느리 이덕남 여사


오세창ㆍ권동진ㆍ최남선ㆍ최린ㆍ박희도 등은 모처럼 가족들과의 통신을 허가받아, 부모와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며, 자신을 대신해서 가족을 잘 돌봐주도록 부탁하는 내용 등을 담은, 짤막한 편지를 모친이나 부인, 형제 등에게 보내기도 했다.

천고 제3호는 양근화의 민원식 암살, 북군서(北軍署) 사령관 김좌진 휘하 결사대 등 각지의 독립군 활동과 함께 경남 밀양의 일본경찰서를 폭격한 최수봉 의사에 대한 부산지방법의 공판 개시, 광한단(光韓團) 단원 전용수 등 독립운동가들의 순국 사실 등도 전했다.

그 중에는 북군서 총재 서일과 사령관 김좌진, 북로독군부(北路督軍府) 수령 최명록, 의용단 사령관 홍범도, 서군서(西軍署) 사령관 이청천, 흥업단(興業團) 부단장 김혁 등 여러 단체 수장들이 조만간 그 부하들을 이끌고 '대한총합부(大韓總合部)'를 조직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포함돼 있다.

허룽 현에서 일본 군경의 총격이나 방화로 인한 사망자 등 98명, 중상자 13명, 기타 가옥 소실자 등의 이름과 피해 내용, 중국 주재 미국공사가 중국의 간도 순열사(巡閱使) 장쭤린(張作霖)에게 비밀서한을 보내 일본군의 잔인한 행동을 비난하고 간도의 조선인을 보호해 주도록 요청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덕남 여사는 "신채호 선생이 천고를 7호까지 발간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마지막 호인 제7호도 중국의 모처에 소장돼 있다는 사실이 확인돼 그 전문을 확보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으나 아직은 사정이 여의치 않은 상태"라고 말했다.

한편 기념사업회 측은 신채호 선생이 1910년 4월19일자 대한매일신보 제3면에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던 자신의 초가 6칸짜리 가옥 소유문서의 분실을 알리는 광고를 낸 사실이 최근 확인돼 조만간 종로구청에 현재 지번과 사실관계를 파악해 주도록 요청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분실광고는 "본인의 소유인 초가 6칸의 문권(文券)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분실하였기에 광고하오니 누구든지 이를 습득하더라도 쓸모가 없으니 휴지로 처리하기 바람. 경북서(京北署) 삼청동 2통4호. 신채호 백."이라고 돼 있다.

◇ 단재 신채호 = 1880년 충남 대덕훈 산내면(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해 평생을 독립운동, 고대사 연구, 언론인으로서 민족의식 앙양에 바치다 1936년 2월21일 중국 뤼순(旅順)감옥에서 옥사했다.

'경술국치'(1910년)를 당해 일제의 '신민'이 되기를 거부하고 중국 칭다오(靑島)를 거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길에 올랐고, 그 이후 서거할 때까지 중국에서 신문발행, 의열단 활동 지원 등 독립운동과 한국 상고사 연구 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4년 만주지역과 백두산을 직접 답사하고 중국에 산재해 있는 역사자료를 섭렵해 이루어낸 그의 선구자적이고 실증적인 고대사 연구가 없었더라면 우리 민족사는 지금보다 훨씬 허전했으리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1915년께부터 베이징에 체류하면서 '조선상고사'와 소설 '꿈하늘'을 집필했고, 1921년 '하늘북'이라는 뜻의 가진 순한문 월간잡지 '천고'를 창간해 주간으로 활동했다. 제7호까지 발간된 이 잡지는 중국인들 독자들까지를 염두에 두고 독립에 관한 논설과 독립운동 소식을 주로 전했다.

의열단의 행동강령인 '조선혁명선언'(1922년)과 무장 독립운동단체인 '다물단'의 선언문(1924년)을 기초했고, 이후 '무정부동방연맹'과 '신간회'에서 활동하다 1930년 무정부동방연맹의 국제위폐사건에 연루돼 체포됐다.

중국 다롄(大連)법정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감옥에서 복역중 순국해 유골로 충남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향으로 귀환했으나, 일제에서 해방된 지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부가 그를 무국적자로 방치해두고 있어 유족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자부인 이덕남 여사는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이미 서거한 분이라는 이유로 신채호 선생 같은 독립운동가의 국적을 회복시켜 주지 않는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분개하고, "아버님과 후손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죽을 때까지 국적회복을 위해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여사는 또 "용산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해 가면, 그곳에 백범기념관에 버금가는 단재기념관을 만들어 올바른 민족사 정립을 위한 교육의 장이 되도록 했으면 좋겠다"면서 "아버님이 언론인이기도 했던 만큼 아버님의 이름을 딴 언론 관련 재단을 만드는 것도 꿈으로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