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주 천지조화
<역사왜곡>한민족 고대사 왜곡의 실상-역사왜곡 본문
<역사왜곡>한민족 고대사 왜곡의 실상-역사왜곡
<역사왜곡>한민족 고대사 왜곡의 실상-역사왜곡
한민족은 환국-배달-조선의 삼성조시대가 지난 후 열국시대 이래 중국 한족(漢族)과 일본에 의한 상고(上古) 역사의 왜곡으로 민족사의 뿌리가 단절되어 그 상처가 심히 깊더니(道典 1:1:7)
『증산도 도전』은 우리 민족의 뿌리역사의 왜곡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우리 민족을 흔히 배달민족이라 하고, 반만년 역사를 자랑한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10월 3일이 개천절이라는 것은 알아도, 국조 단군에 대해서는 막연히 `단군신화`로만 인식하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금도 서점에 가보면, `단군신화` 운운하는 책들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민족의 역사를 왜곡한 세가지 해독
불과 수년 전 전국의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단군상 훼손사건은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을 보여주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10여 년 전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단군신화를 「근거있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32%(1992년 10월6일자 세계일보)였는데, 그렇다면 지금은 과연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뿌리를 알지 못하고 역사의식을 잃어버리면 그 나라의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 10월 3일 개천절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있으면서도 국조 단군의 역사성을 확신하지 못하는 나라,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이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초대 문교부장관을 지낸 안호상(安浩相) 박사는 10여 년 전에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지식인들이 중독(중국의 해독)과 왜독(일본의 해독)과 양독(서양의 해독) 등 3독에 빠져 있으며, 이 3독을 치유하려면 특히 식민사관에 물든 역사학자들이 반성하고, 민족주체성에 입각해 바른 역사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동 신문기사)
민족사학자들은 이 삼독의 피해에 대해 대동소이하게 얘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소위 중독과 왜독과 양독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우리 민족 역사의 뿌리를 잃어버리게 한 그 사례를 찾아본다.
중독-사대주의 역사관
서기 650년부터 신라는 당나라 고종의 연호를 빌어다 썼다. 통일신라 때에도 당나라의 연호를 썼음은 물론이다. 그후 고려시대는 송나라의 연호를, 조선시대에 와서는 명나라, 청나라의 연호를 가져다 쓰는 것이 국시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다보니 역사를 쓰는 학자들이 아(我)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중국의 입장에서 역사를 썼다. 중국을 대중화로 삼고 우리나라를 스스로 소중화로 비하시켜 보는 것이 바로 사대주의 역사관이다.
이런 측면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랜 역사서로서 삼국시대의 정사를 기록한 「삼국사기」(1145년)가 역대 최고의 사대주의 사서로 꼽힌다.
고려 중기때 사람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데 앞장섰으며 그후 삼국사기를 쓰게 되는데, 고구려가 수나라와 전쟁을 한 부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아(我)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토지(帝將討之)라”
고구려가 교만하고 오만하고 불손하여, 임금께서 장차 토벌하려고 했다. 이 부분은 누가 보아도 중국에 편중된 역사 서술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쓰면서, 우리가 교만하고 오만해서 중국의 임금이 치려고 했다… 는 식으로 쓸 수가 있을까. 지금 읽어보면 참으로 황당한 내용인 것이다.
또 하나 예를 들면, 신라 650년 진덕여왕 4년에 당나라 고종의 ‘영휘’라는 연호를 처음 쓴 부분에 대해서도 주석을 달기를,
“옛날에 법흥왕이 연호를 스스로 썼는데, 아, 편방의 소국으로서 왜 연호를 쓰나? 당 태종이 꾸지람을 했는데도 연호를 고치지 않다가, 650년에 고종의 연호를 갖다 쓰니, 허물을 능히 잘 고쳤다고 할 수 있도다” 이런 식이다. 이것이 국보로 보존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의 역사서에 나오는 구절들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사정이 이러하니 중국의 입장에서 쓰여진 사대주의 책이라고 비판받아도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삼국사기에 보면 “진덕왕 3년(649년) 정월에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을 쓰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부터 모든 관직이나 명칭에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모든 복장제도를 중국같이 바꿔 버렸다.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때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한국인의 가치관과 뿌리가 송두리째 뽑히고, 오직 중국에서 뿌리와 사상을 찾으려는 정신의 식민지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고려 후기 때 편찬된 일연의 『삼국유사』(1281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고조선조에는 「고기(古記)」를 인용한 구절에 ‘석유환국’(昔有桓國: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의 환국에 대해 주를 달면서 환국과 불교의 환인이 글자가 비슷해 보이므로 ‘위제석야(謂帝釋也)라’ 하여 환인천제의 환국을 국가가 아닌 불교의 수호신 제석천 (帝釋天, 釋帝桓因陀羅)으로 바꿔놓았다. 다시 말해서 고려의 강산을 불국토로 만들려고 「고기(古記)」 원문에 없는 말을 제멋대로 갖다붙인 것이다.
또 환웅천황이 내려오신 태백산(지금의 백두산)을 지금의 묘향산이라 하였고, 단군왕검의 도읍지 아사달을 지금의 평양이라고 하는 등, 배달국과 고조선의 광활한 영역을 반도 안으로 축소해버렸다는 점에서 민족사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당하고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는 「위서」와 「고기」(단군고기)에 나와 있는 기록들을 인용하여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또 고조선의 건국시기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최초의 역사책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던 고려시대 때 이러했다면, 유교를 국교로 삼았던 조선시대 때는 더 말할 나위도 없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서거정의 『동국통감』도 단군조선을 정통으로 다루지 못했으며,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는 우리나라 역사를 ‘기자’로부터 시작하게 된다. 당시에는 유림들에게 사문난적으로 몰릴 것이 두려워 감히 드러내놓고 주체적인 역사를 논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왜독-식민주의 역사관
일제 식민주의자에 의한 역사왜곡을 왜독이라고 한다. 토인비는 “어떤 민족을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그 나라의 역사를 말살하는 것이 식민주의자들의 철학이다”라고 했다. 일제는 36년 동안의 식민통치 시절 우리나라 역사를 철저히 파괴했다.
-민족사서 20만권 강탈
1910년 조선총독부 산하에 취조국을 두고서 모든 서적을 일제히 수색했으며, 다음해 1911년말까지 1년 남짓동안 무려 20만권의 서적을 강탈해갔다. 그러니 한민족의 역사책 같은 것이 최우선적으로 압수되었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조선총독부 관보에 의하면, “51종 20만권 정도를 가져갔다”고 얘기하고 있다. 사료수집가 이상시 씨는, 한민족의 혼을 말살하기 위해 단군관련 기록을 중점적으로 약탈해 갔다는 사실을 신문지상에 발표하여 일제의 무도함을 다시 한번 세상에 드러낸 바 있었다(1985년 10월 4일자 조선일보).
-조선총독부의 교육시책 : 조상을 멸시하게 하라
1919년 3.1 독립운동 이후 제2대 조선총독으로 사이토(齊藤實)가 와서 문화정치를 표방한다. 이때 발표한 ‘교육시책’에서 사이토는 이렇게 발표했다.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등을 들춰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아버지와 조상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跡)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일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이 내용을 잘 읽어보면, 새삼 우리 한국인들의 사고 속에 우리 나라와 민족에 대한 허무의식이나 부정적인 생각을 불러일으키도록 교묘하게 술책을 꾸민 것이 바로 일제 때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지금도 일반인들의 의식 깊은 곳에는 “조선은 안돼…” “맨날 싸움박질만 하고…” “조선인은 맞아야 돼”라는 식의 깊은 허무의식이 있음을 발견할 때가 있지 않은가.
-역사의 조작 및 날조의 산실 : 조선사편수회
이러한 근본정신 속에서 일제는 1922년 12월 ‘조선사편찬위원회’(약칭 조선사편수회)를 만들고 1938년까지 35권에 달하는 『조선사』를 편찬했다. 그러나 조선사 편찬의 진짜 목적은 조선사의 뿌리를 없애는 데에 있었다. 일본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유구한 조선의 고대사를 통째로 말살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들에 의해 좌지우지된 조선의 역사는 처음에는 상고,삼한시대부터 다룰 듯 거론하다가, 차츰 연대가 낮춰지고 다시 삼국 이전이 됐다가 결국은 통일신라 이전부터 다루는 것으로 결정되기에 이른다.
일제는 이 조선사 편찬을 위해서 당시 돈으로 쌀 10만 가마니 이상을 썼다고 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조선의 역사를 조작, 개작하였는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운, 우리 민족 우리 조상의 역사는 일제에 의해 왜곡되고 조작되었다. 해방 이전의 역사가 완전 날조된 것이라니 정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 예로 2003년 8월 7일자로 발간된 「주간조선」에는 ‘구한말 지도’라는 게 실렸다. 1999년 6월 26일 국정홍보처가 영국과 공동으로 벌인 조사 결과 조선의 영역이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만주와 사할린 일대까지 그려진 지도가 대량 발견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기사에 의하면,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로마 교황청 등지에서도 조선의 영역이 만주와 흑룡강성 일대를 포함한 지역으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일제가 1909(순종3)년 9월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으면서, 만주 철도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 일대를 만주국 영토로 넘겨주었다는 것이다.
-이마니시 류가 환국(桓國)을 환인(桓因)으로 왜곡하다
일제의 뜻대로 한국 고대사를 주물렀던 주모자였던 당시 교토대 강사 이마니시 류(今西龍:
후일 경성제대 교수)는 이병도 등과 더불어 신라부터 고려 때까지의 조선사를 뜻대로 왜곡한 장본인이다.
‘조선사편수회 회의록’을 통해, 일본인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가 ‘삼국유사’의 단군고기 중에 ‘昔有桓國’(석유환국)이라고 되어 있던 것을 ‘昔有桓因’(석유환인)이라고 고친 사실이 드러났다.
이마니시 류가 소장하고 있던 1512년의 삼국유사 정덕본에는, 일연이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옛날에 환국이 있었다. 그 나라에 높은 서자 벼슬을 하는 환웅이 있었고 마지막 환웅대에 단군이 나타나 조선을 세웠다’라고 되어 있었다(현재 일본 천리대 소재, 국내에서는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그러나 이마니시 류는 변조된 내용을 경도제대 (경성제대를 뜻함) 영인본이라고 하여 발표한다. 그리하여 현재 전해지는 ‘삼국유사’의 판본에는 환국(桓L)이 환인(桓因)으로 변조되었고, 환인-환웅-단군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뿌리 역사를 송두리째 뽑아버렸던 것이다.
이는 원래의 환국시대가 사실적이고 역사적인 것임에 반해, ‘桓因’이나 ‘帝釋’으로 바뀐 것은 불교적이고 신화적인 요소가 가미된 것이며, 시대적으로도 맞지 않은 명백한 조작이다. 지금으로부터 4336년 전에 세워진 단군의 고조선이 3000년 전의 불교의 부처보다 역사적으로 훨씬 이전의 사실이라는 점, 환국은 불교가 생기기도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점 등이 맞지 않다.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회개
그리고 이병도는 이마니시 류의 수서관보가 되어 ‘조선사 편찬’이라는 거대한 역사왜곡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서울대 역사학과 교수, 문교부 장관까지 지냈다. 그는 『조선사』 편집에 참여하여 일제의 식민사관 수립 사업에 직접 기여하였고, 일제가 유포시킨 식민사관을 해방 후까지 이어주는 중대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 한국사학계에는 직접간접으로 이병도의 제자 아닌 사람이 드물다.
일본은 한국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 역사는 주체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주변국에 의해서만 유지되어 왔다는 요지의 이른바 반도사관론을 대량 유포시켰으며, 우리 역사 사료들을 전부 빼앗아가고 불태우고서는 증거가 있어야만 인정한다는 식의 소위 실증주의 역사방법론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1920년대 ‘조선사편수회’의 학풍을 이어받은 이병도는 나중에 고대사 연구에 “일본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바 적지 않았다”고 스스로 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병도는 죽기 직전, 단군은 신화가 아니라 우리의 국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반성문을 발표한다. 그간 최태영 박사, 송지영 KBS 이사장, 국문학자 이희승 박사 등의 설득으로 과거 자신의 역사관을 크게 수정하여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심정으로 조선일보 1986년 10월 9일자에 논설을 게재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이를 바라보던 제자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어떤 이는 ‘노망 드셨네’ 하며 비웃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때 그와 더불어 『한국상고사입문』(1989년)을 발간했던 상고사연구가 최태영 박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한국땅에서 단군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실증사학을 내세워 단군을 가상인물로 보기 시작한 것은 이승만 정권 때부터이지요.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이지만 이병도 박사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박사는 말년에 건강이 나빴는데, 어느 날 병실에 찾아갔더니 죽기 전에 옳은 소리를 하겠다며 단군을 실존인물로 인정했어요. 그 사실을 후학들이 모르고 이박사의 기존학설에만 매달려 온 것입니다.
그리고 한민족이면 누구나 어린아이 때부터 배웠던 ‘동몽선습’이나 ‘세종실록’ 등 각 고전에도 단군기록이 나옵니다. 수백년전 기록을 어떻게 믿겠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역사기록이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판소리할 때도 그 긴 내용을 한자도 바꾸지 않고 노래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역사기록은 더욱 정확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서울대법대 초대학장을 역임한 상고사연구가 최태영 박사, 2000년 1월3일자 문화일보 특별대담)
양독-실증주의 역사관
양독은 서양에서 들어온 실증주의 역사학의 해독을 말한다. 이는 “주관적인 판단 없이 역사적 사실을 원래 있는 그대로 기술해야 한다”는 역사학자 랑케(Leopold von Ranke)의 관점을 밑바탕으로 한 것인데, 이 계열의 역사학자들은, 오직 유적과 유물에 의해 실증된 역사적 사실만을 인정하는 반면, 문헌을 연구하는 사학은 비판한다. 그래서 대표적인 고대사 자료인 『환단고기』 등의 서적을 사료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 눈으로 보아야만 믿는다는 식의 고증이 중요하다면서, 왜 그들은 중국과 러시아 땅에 묻혀 있는 고조선의 유적과 유물들은 확인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
해방 후 국사학계는 1930∼40년대 초기의 학풍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더욱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이 납북되었고 그나마 남아 있던 다양한 국사연구 학풍이 실증주의 학풍으로 단일화되면서 실증주의 사학자들이 우리 나라 국사학계의 핵심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주류에 역사학자 이병도의 영향력이 자리잡고 있었음은 부정할 여지가 없다. 그는 역사학계의 대부로서 해방 후 1955∼1982년까지 ‘국사편찬위워회’ 위원으로 재직하였다. 그러니 일제시대의 식민주의 역사관이 국사책에 반영되었음은 재론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우리 역사가 왜 왜곡되었는가? 왜적이 침범해서 역사책을 불태우고, 내란이 일어나서 우리 역사책을 불태워서 왜곡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나라의 역사가들에 의해서 왜곡되었다”고 하였다.
앞서 소개했던 안호상 박사는, 고대 역사서들이 입증하고 있던 사실을 후대에서 중국과 일본의 사가들이 이 사실을 왜곡 변조했으며, 식민사관에 물든 우리의 역사학자들이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여기에 기초해 국정교과서들이 집필되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지적했었다(1999년 3월 1일자 세계일보).
역사가 단지 흘러가버렸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잊혀지고 마는 것일까?
우리의 민족혼 속에는 서양식의 근대적인 과학주의 역사관만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깊은 잠재적 사상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유적과 유물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의식 무의식 속에 살아숨쉬는 민족혼이야말로 역사의 실체를 찾아가는 단초가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족문화의 정신사 속에는 상제문화와 제사문화, 그리고 풍류신도가 면면히 전승되어 오고 있다. 잃어버린 고대사의 복원을 통해서만 이러한 민족문화의 정수를 되살려 낼 수 있다.
매년 설, 추석만 되면 수천만 명이 모든 일을 제쳐놓고 오직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고향을 찾아나선다. 이는 뿌리를 찾아가는 원시반본 문화의 표상이다. 또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 경기 당시 한반도를 붉게 수놓은 인간꽃, 태극 물결을 보라. 이것은 풍류신도의 저력이 아닌가. 이제 한민족이 상제문화를 복원하여, 세계일가문명을 주도할 영광의 그날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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