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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편수회>역사왜곡,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설치 과정 본문

역사 이야기/잊혀진 역사

<조선사편수회>역사왜곡,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설치 과정

세덕 2016. 10. 21. 09:48

<조선사편수회>역사왜곡,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설치 과정

<조선사편수회>역사왜곡,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설치 과정

주 참고자료:金性玟의 朝鮮史編修會의 組織과 運用, 한국민족운동사연구3, 1989, p121~164 


조선사편수회 설치 목적과 결과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강탈한 뒤 조선통치의 기조는 민족동화정책이었다. 동화정책을 수행하는데 무엇보다 먼저 요구된 것이 조선에 대한 조사연구였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아오야기 고타로靑柳綱太郞와의 대담에서 이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대화혼大和魂과 조선혼朝鮮魂을 혼합하여 우리 일본인이 저들(한국인)에게 대화혼을 심어주지 않은 채로 저들이 우리의 문명적 시설로 인하여 지능을 개발하고 널리 세계의 형세에 접하게 되는 날에 이르러 민족적반항심이 타오르게 된다면 이는 큰일이므로 미리 일본국민의 유의를 요한다. 이것이 대개 조선통치의 최대난관인데 내(데라우치)가 조선인의 철저한 자각을 바라는 동시에 조선연구에 하루도 소홀히 할 수 없음을 믿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눈앞의 정치적 시설 이상으로 다시 영구적 근본적인 사업이 필요하다. 이것이 곧 조선인의 심리연구이며 역사적 연구이다. 저들의 민족정신을 어디까지나 철저히 조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내선동화의 진실한 사업은 아직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중략) 즉 조선인의 민족심리, 정신생활에 걸쳐서 이해하는바가 없으면 헛수고이다. 식민정책의 근본은 반드시 여기에 기초를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나는 세상 사람들이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경시하는 학술적 조사가 절대로 필요하다고 인정하여 조사의 보무步武를 진행시키고 있다.(靑柳南冥, 『總督政治史論』, 1928, p262~267)


조선총독부가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추진한 것이 조선구관제제도조사사업과 사료조사 등이었다. 이 같은 조사연구 활동은 일제의 조선 강점의 정당성과 식민통치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역사 왜곡과 말살로 이어졌다. 이러한 역사 왜곡과 말살 목적으로 구체화한 것이 조선고적조사사업朝鮮古蹟調査事業과 사료史料 편찬이었다. 1916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추진한 조선고적조사사업의 경우, 발굴 대상지를 처음부터 소위 한사군과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지역에 집중함으로써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한국사의 타율성을 강조하여 조선 강점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제이 관官 주도에 의한 사서편찬은 국권강탈 직후부터 계획되었다. 총독부는 1910년 취조국取調局을 설치하고 1911년 이후 취조국을 이은 참사관실參事官室의 주도하에 『반도사』편찬을 추진했으나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다가 1915년 중추원中樞院으로 업무가 이관되면서 본격화 되었다. 1916년 『반도사』편찬 체제를 갖추고 7월에 「조선반도사편찬요지朝鮮半島史編纂要旨」를 발표하였다. 이 요지에서 『반도사』편찬 목적을 “민심훈육民心薰育을 통하여 조선인을 충량忠良한 제국신민帝國臣民으로 만들어 조선인 동화同化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라고 표방하였다. 그 내용도 첫째, 일본인과 조선인이 동족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것. 둘째, 상고시대에서 조선에 이르는 군웅群雄의 흥망기복과 역대의 혁명, 역성易姓에 의하여 민중이 점차 피로해지고 쇠약해져 빈약에 빠지는 실황을 서술해서, 지금에 이르러 성세聖世(일왕)의 혜택에 의해 비로소 인생의 행복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상술 할 것 등을 편찬의 주안점으로 삼았다.


따라서 『반도사』는 한국사의 전개 과정을 한민족의 내재적 발전역량이 아닌 가가 시기마다 외세의 지배 역사를 강조함으로써 한민족 스스로 독립할 능력이 없는 민족인 것처럼 호도하였다. 시대구분에서 제1편은 상고삼한上古三韓으로 설정하여 단군조선을 완전히 삭제하고 이 시기를 원시시대로 구분하고 한국사가 한漢나라의 영토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왜곡하고 있다. 


일제는 3․1독립운동 이후 조선의 민족사학자들에 의한 민족혼을 일깨우고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역사서들로 식민통치가 위협 당하자 이에 대항하여 식민통치를 위한 새롭게 『조선사』 편찬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설치되어 역사왜곡을 위해 박차를 가하였다. 


조선사편찬위원회에서 계획한 『조선사』는 5년간(1921~1926년)에 걸쳐 완성하려 하였으나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를 비롯한 일본사학자들과의 실무 협의과정에서 사업 연한을 10년으로 늘리고 전문사서로서의 성격을 강화하였다. 왜곡사서를 편찬하기 위해 1910년부터 사료 수집을 해왔으나 작업에 진전이 없다가 1915년부터는 관청을 동원하여 강제적이고 약탈에 가까운 사료 수집을 하였다. 이렇게 총독부 주도의 사서편찬 사업에 조선인들은 강한 의심을 품고 있었고, 일제의 『조선사』편찬 의도가 조선인의 역사 관념을 제거하여 영원히 지배하려는 목적임을 간파하였다. 따라서 사료수집에 비협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38년까지 전국을 샅샅이 뒤지며 약탈한 도서만도 4,950종이었다. 


일제의 『조선사』편찬사업에 조선인들이 협조하지 않자 총독부 부속기관으로 존재하던 조선사편찬위원회를 국가적 편수編修사업으로 확대하고 권위를 높여 1925년 6월, 일왕 칙령에 의해 총독직할의 독립관청인 조선사편수회로 개편되었다. 조선사편수회의 설치는 조선인들에게는 재앙이었다. 당시 일제는 단군성지를 파괴하고 남산에 조선신궁을 건설하는 등 한민족의 정신을 말살하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일제가 『조선사』를 편찬한다는 것은 우리의 역사를 그들의 손에 내어줌으로써 조선인에게 “최후의 정신적 파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조선사편수회의 실무책임자들은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으로 이들은 총독부의 한국문화침탈과 민족말살을 위한 각종 조사사업에 참여하여 식민정책을 돕고 식민사학을 뿌리내린 인물들이다.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는 『조선사』편찬 계획을 주도하였으며,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는 『조선사』편찬의 실무책임자였다.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일제의 한국 고대사 왜곡에 이론적으로 가장 기여한 인물로 『조선사』 제1편「신라통일이전新羅統一以前」의 주임이었다. 더욱이 이들이 왜곡한 결과는 교원강습회 등을 통하여 학교교육에 직접 반영되었다.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사』의 공정성을 기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인 학자들을 참여 시켰는데 한학에 능통하고 학식이 뛰어났던 어윤적魚允迪, 최남선崔南善, 이능화李能和, 홍희洪憙 등이었다. 그리고 대학 사학과를 갓 졸업한 신진학자들 중에 이병도李丙燾, 신석호申奭鎬가 있었다. 특히 이병도는 수사관보修史官補로 들어가 이마니시 류가 맡은 우리 상고사인 『조선사』 제1편을 왜곡 말살하는 일을 담당했다. 이병도와 신석호는 일제 식민사학을 가장 충실하게 교육받은 자들로 광복 후에 친일파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인해 대한민국 사학계를 장악, 민족사학자로 행세하며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식민사학을 그대로 이식시켜 놓았다.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는 편년체를 채택하였는데 그 근본 이유는 단군조선을 수록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역사적 사실의 발생연도가 확실해야 하는 편년체를 채택함으로써 단군 건국연대를 후대에 작성된 사설史說로 취급, 조선인의 단군조선 수록 요구를 묵살하고 한국사를 시원이 없는 역사로 만들어 상고사를 말살하려는 의도였다. 


1938년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사』37권을 편찬하였는데 편찬 의도가 식민사학의 기본 자료로 삼고 한민족의 상고사를 부정하여 뿌리 없는 역사로 왜곡함으로써 한민족사에 심각한 해독을 끼쳤다. 


조선사편수회 설치과정

연도

기관

목적

사업 내용

1906.2

통감부를 설치,

조선구관제제도사업朝鮮舊慣制度調査事業 시작

식민 지배를 위한 준비 작업.

식민지용 立法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주로 민사民事상사商事의 관습慣習조사에 치중.

1910.9.30

취조국取調局 설치

식민 통치에 필요한 조선의 경제 수탈과 민족동화정책의 입안, 집행

 

朝鮮民事令(1912)을 기안, 王朝實錄을 비롯한 각종 도서의 정리와 譯文大典會通, 朝鮮語辭典, 朝鮮圖書解題의 편찬 사업 진행.

1911년 이후 역사 왜곡을 위한 사료 수집하고 반도사半島史편찬 추진했으나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함.

1912.4

취조국 업무, 참사관실參事官室로 이관, 1915년 폐지

취조국 업무 계승

전국의 금석문을 수집, 朝鮮金石總覽편찬, 도서 및 읍지의 수집, 活字版本을 정리. 취조국 이래의 민사民事상사商事의 관습慣習조사도 계속함.

1915.5

참사관실參事官室 업무, 중추원中樞院으로 이관

조선인의 일본 동화同化와 식민사서 보급.

민심훈육民心薰育을 통하여 조선인을 忠良帝國臣民으로 만들어 朝鮮人同化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朝鮮半島史編成要旨及順序)

1915년 박은식의 韓國痛史와 같은 항일 민족사서들로 식민통치에 위협을 느끼고 이에 대항하는 식민사서의 편찬 필요성이 절실해 짐에 따라, 7<朝鮮半島史編纂要旨>를 발표하고 반도사半島史편찬 작업 시작(사료수집 착수).

1916

 

조선고적조사사업朝鮮古蹟調査事業 5개년 계획으로 추진

日鮮同祖論과 한국사의 타율성을 조작

발굴대상 지역을 처음부터 이른바 한사군과 임나일본부가 위치했다는 지역에 집중적으로 설정

1918

중추원 내에 편찬과編纂課설치

한국사의 주체적 성격을 부정하고 외세에 의해 지배받은 역사를 서술하기 위함

사료수집 결과 채택된 자료는 한국측 기록 164, 중국측 기록 560, 일본측 기록 100, 기타 서양측 기록 60.

반도사에 단군의 건국 관계기사가 수록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에 산재하는 단군관게 사료를 압수하기 위한 조치로 단군관계 기록을 사료수집 대상으로 설정.

1924년까지 1(上古三韓), 2(三國), 3(통일 후의 신라), 5(조선)은 초고를 완성, 4(고려), 6(朝鮮最近史)은 담당자의 사망, 전직 등으로 지연되던 중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 설치로 계획이 중지됨.

1922

총독부 산하에 조선사편찬위원회朝鮮史編纂委員會 설치

조선인의 한국역사의 독립된 학교교육 요구를 희석시키고 사서의 편찬 과정에서 식민통치에 이용할 수 있는 식민사학적 요소를 뽑아 학교교육에 반영하려는 의도와 조선사편찬을 통하여 역사연구의 대상을 한정하고 사료를 규제하여 식민사학으로 유도. 단군을 민족 구심점으로 삼으려는 민족사학자들의 고대사 연구를 학술이라는 이름으로 말살하여 식민통치를 강화하기 위함.

31독립운동 이후 독립운동 양상이 다양해지고 교육열이 급격히 고조, 조선인 본위의 교육과 한국사에 대한 독립교과 요구와 왜곡된 한국사 시정 요구 등에 대한 무마책으로 조선사편찬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설치.

편찬위원회에서는 10개년 예정으로 조선사편찬에 착수, 1923년 지방 관청을 동원하여 강제적 또는 약탈적으로 사료수집.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조선사편찬사업은 중추원의 반도사편찬계획과 병행하여 진행되었으나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조선사편수회로 개편됨에 맞추어 1924년 말 조선사편찬사업으로 통일.

 

1925.6

총독 직할의 독립관청으로 朝鮮史編修委員會 설치

일제의 조선 침략과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한국 민족사를 타율적이고 정체된 사대주의적인 역사로 규정,

일본의 위대한 면목과 사명을 드러내어 한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왜곡말살하여 영구적인 식민 지배를 목적으로 함

편수회를 초선총독 직속기관으로 하고 그 직원 중 고문, 위원, 간사 등을 일본내각에서 임명, 외형상 직제의 격을 높이고 실무자를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관변 식민학자들로 구성.

1938년까지 수집된 자료는 도서 4,950, 사진 4,510, 文卷畵像扁額 453점에 달했으며, 16년 동안 총 975,534원의 예산을 투입. 1932~19387년간 조선사35권을 편년체로 간행.

조선사를 편년체로 간행한 근본이유는 단군조선의 말살에 있음.

시대를 구분함에 있어 시점을 신라통일이전으로 설정하고 단군관계 기사를 고의로 누락시켜 고대사를 말살하려함. 또한 조선후기를 갑오개혁까지 설정하여 한국의 근대화가 일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의식을 심어주고 한국침략 과정을 숨기려함.

19458·15 광복으로 해산.

1938

조선사37권 간행

 

총목록 1, 총색인 1, 본문 3524111



직제 및 직원 명단

이하 직책별 직원 정보는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를 기반으로 하여 작성되었다. 성명 옆의 날짜는 재임기간.


조선사편찬위원회 (1922~1925)


위원장

위원장직은 정무총감이 겸임하였다.

아리요시 주이치有吉忠一 1922년 6월 15일 ~ 1924년 7월 4일 

시모오카 주지下岡忠治 1924년 7월 4일 ~ 1925년 6월 8일 


고문

이완용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박영효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권중현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위원

長野幹 1922년 12월 28일 ~ 1924년 12월 1일 

小田幹治郎 1922년 12월 28일 ~ 1923년 3월 29일 

劉猛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李能和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魚允迪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鄭萬朝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今西龍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稻葉岩吉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松井等 1922년 12월 28일 ~ 1923년 8월 16일 

栢原昌三 1922년 12월 28일 ~ 1923년 8월 16일 

李秉韶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尹寗求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玄采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2월 3일 

洪憙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李商永 1922년 12월 28일 ~ 1923년 3월 25일 

深川伝次郎 1923년 4월 18일 ~ 1924년 6월 8일 

大塚常三郎 1924년 12월 12일 ~ 1925년 6월 8일 

李軫鎬 1924년 12월 12일 ~ 1925년 6월 8일 

山崎眞雄 1924년 12월 12일 ~ 1925년 6월 8일 


간사

稻葉岩吉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金東準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서기

金子正潔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葛城末治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金容迪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촉탁

稻葉岩吉 1922년 12월 1일 ~ 1925년 6월 6일 

松井等 1922년 12월 1일 ~ 1923년 7월 31일 

洪憙 1922년 12월 31일 ~ 1923년 8월 16일 

栢原昌三 1922년 12월 10일 ~ 1925년 6월 6일 

李能和 1923년 12월 31일 ~ 1925년 6월 6일 

高橋琢二 1924년 6월 30일 ~ 1925년 6월 6일 

瀨野馬熊 1924년 11월 30일 ~ 1925년 6월 6일 

黑板勝美 1924년 11월 30일 ~ 1925년 6월 6일 





조선사편수회 (1925~1945)


회장

회장직은 정무총감이 겸임하였다.

下岡忠治 1925년 6월 6일 ~ 1925년 11월 22일 

湯淺倉平 1925년 12월 3일 ~ 1927년 12월 23일 

池上四郎 1927년 12월 23일 ~ 1929년 4월 4일 

兒玉秀雄 1929년 6월 22일 ~ 1931년 6월 19일 

今井田淸德 1931년 6월 19일 ~ 1936년 8월 5일 

大野綠一郎 1936년 8월 5일 ~ 

고문

李完用 1925년 7월 20일 ~ 1926년 2월 12일 

權重顯 1925년 7월 20일 ~ 1934년 3월 19일 

朴泳孝 1925년 7월 20일 ~ 1939년  

內藤虎次郎 1925년 9월 22일 ~ 1934년 6월 26일 

服部宇之吉 1925년 9월 22일 ~  

黑板勝美 1925년 9월 22일 ~ 

山田三良 1933년 9월 8일 ~ 1936년 1월 16일 

李允用 1934년 4월 17일 ~ 

速水滉 1936년 3월 7일 ~


위원

이쿠타 세이자부로 1925년 7월 20일 ~ 1929년 11월 8일 

시노다 지사쿠 1925년 7월 20일 ~  

이진호 1925년 7월 20일 ~ 1929년 1월 19일 

오다 쇼고 1925년 7월 20일 ~  

유맹 1925년 7월 20일 ~ 1930년 3월 21일 

어윤적 1925년 7월 20일 ~ 1935년 3월 7일 

이마니시 류 1925년 7월 20일 ~ 1932년 5월 20일 

야마자키 마사오 1925년 7월 20일 ~ 1928년 3월 30일 

이능화 1925년 7월 20일 ~  

이병소 1925년 7월 20일 ~  

윤영구 1925년 7월 20일 ~  

고타케 마사요시 1928년 5월 22일 ~ 1929년 10월 28일 

최남선 1928년 12월 20일 ~  

이마무라 다케시 1929년 12월 4일 ~ 1931년 7월 22일 

다케베 긴이치 1929년 12월 5일 ~ 1931년 7월 1일 

하리마 겐시로 1930년 1월 18일 ~ 1932년 2월 12일 

하야시 한조 1930년 7월 15일 ~ 1937년 10월 30일 

우시지마 쇼조 1931년 11월 7일 ~ 1936년 5월 21일 

하야시 시게키 1931년 11월 7일 ~ 1933년 8월 4일 

오타니 쇼신 1931년 11월 7일 ~  

마쓰모토 이오리 1932년 3월 4일 ~ 1934년 11월 5일 

후지타 료사쿠 1933년 4월 13일 ~  

와타나베 도요히코 1933년 9월 8일 ~ 1936년 5월 21일 

오타케 주로 1936년 6월 3일 ~  

도미나가 후미카즈 1936년 6월 3일 ~ 1937년 7월 3일 

나가타 나오마사 1937년 11월 9일 ~  


간사

야마자키 마사오 1925년 7월 20일 ~ 1928년 3월 31일 

김동준 1925년 7월 21일 ~ 1925년 9월 10일 

이나바 이와키치 1925년 7월 21일 ~ 1937년 6월 26일 

정교원 1925년 9월 18일 ~ 1928년 3월 30일 

다카타케 사토미 1928년 5월 22일 ~ 1929년 10월 28일 

이동진 1928년 5월 22일 ~ 1928년 7월 27일 

손영목 1928년 12월 4일 ~ 1929년 10월 28일 

엄창섭 1929년 12월 3일 ~ 1934년 12월 12일 

하리마 겐시로 1929년 12월 12일 ~ 1932년 2월 12일 

마쓰모토 이오리 1932년 2월 16일 ~ 1934년 11월 5일 

가미다키 모토이 1933년 12월 8일 ~ 1936년 6월 3일 

김대우 1934년 2월 15일 ~ 1936년 5월 28일 

노세타니 간료 1934년 12월 12일 ~  

신구 하지메 1936년 6월 30일 ~ 1937년 7월 3일 

김병욱 1936년 7월 17일 ~  


수사관

稻葉岩吉 1925年6月25日 1937年6月26日 

藤田亮策 1925年6月25日 1926年6月23日 

洪憙 1925年6月25日 1935年1月7日 

中村榮孝 1928年12月27日 1937年6月26日 

末松保和 1935年4月13日 1935年6月8日 

葛城末治 1936年8月22日 1937年3月31日 

申奭鎬 1938年9月22日 


수사관보

高橋琢二 1925年6月6日 1933年6月30日 

葛城末治 1925年8月8日 1936年8月22日 

李丙燾 1925年8月8日 1927年5月30日 

鶴見立吉 1925年8月18日 1928年4月14日 

潮田富貴藏 1927年5月31日 1927年8月24日 

末松保和 1928年3月21日 1935年4月13日 

申奭鎬 1930年5月2日 1937年9月22日 

萩原秀雄 1933年6月31日 1936年3月6日 

田川孝三 1935年4月12日  

李鐘明 1936年3月12日 1937年5月10日 


서기

玄陽燮 1925年6月6日 1934年8月28日 

金子正潔 1925年8月18日 1928年3月18日 

金容迪 1925年8月18日 1930年12月23日 

小野徳三 1925年9月28日 1929年4月5日 

葛城末治 1929年2月17日 1936年8月22日 

可知清次郎 1933年7月14日  

前田耕造 1935年4月12日 


촉탁위원

이나바 이와키치 1925년 6월 6일 ~ 1925년 6월 25일 

사사카와 다네오 1925년 6월 6일 ~ 1925년 8월 31일 

홍희 1925년 6월 6일 ~ 1925년 6월 25일 

세노 바유 1925년 6월 6일 ~ 1935년 5월 20일 

이와타니 다케이치 1925년 7월 25일 ~ 1928년 6월 6일 

가와구치 우키쓰 1925년 7월 25일 ~ 1931년 12월 17일 

시부에 게이조 1925년 11월 4일 ~ 1934년 4월 16일 

나카무라 에이코 1926년 5월 31일 ~ 1927년 12월 31일 

이마니시 류 1926년 9월 28일 ~ 1932년 5월 20일 

박용구 1926년 12월 31일 ~ 1932년 1월 23일 

스에마쓰 야스카즈 1927년 5월 13일 ~ 1928년 3월 21일 

이병도 1927년 5월 31일 ~  

육종윤 1927년 6월 10일 ~ 1927년 7월 20일 

권중익 1927년 7월 31일 ~ 1927년 12월 16일 

김태두 1927년 10월 20일 ~ 1928년 12월 20일 

조중관 1928년 3월 31일 ~ 1932년 1월 23일 

최남선 1928년 10월 8일 ~ 1936년 6월 25일 

신석호 1929년 4월 27일 ~ 1930년 5월 2일 

하기와라 히데오 1929년 6월 17일 ~ 1933년 6월 31일 

구찬서 1929년 6월 20일 ~ 1936년 4월 23일 

조한직 1929년 12월 31일 ~ 1938년 3월 15일 

윤용균 1930년 4월 15일 ~ 1931년 9월 14일 

이마무라 다케시 1930년 7월 21일 ~ 2931년 12월 21일 

소노다 요지로 1931년 9월 30일 ~  

마에다 고조 1932년 12월 31일 ~ 1935년 4월 12일 

다보하시 기요시 1933년 3월 15일 ~  

다가와 고조 1933년 3월 31일 ~ 1935년 4월 12일 

스도 요시유키 1933년 9월 15일 ~ 1936년 10월 24일 

마루가메 긴사쿠 1933년 9월 15일 ~  

구로다 쇼조 1934년 4월 30일 ~  

이시하라 도시오 1934년 4월 30일 ~ 1937년 3월 15일 

마쓰오카 이와오 1934년 6월 18일 ~ 1936년 11월 29일 

스에마쓰 야스카즈 1935년 6월 18일 ~  

다나카 한지로 1936년 6월 30일 ~ 1937년 3월 15일 

후지이 세이치 1936년 6월 30일 ~ 1937년 3월 15일 

이나바 이와키치 1937년 6월 26일 ~  


나카무라 에이코 1937년 6월 26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