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주 천지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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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잊혀진 역사

독립의사 안중근(安重根)

세덕 2012. 6. 13. 14:42

 

 

독립의사 안중근(安重根)

이웅제웅(以雄制雄)이라고 할까요?
한 시대의 두 영웅이 각 나라의 운명을 안고 한 기차역에서 맞닥뜨렸습니다. 세발의 총성!
결국 한 명은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했고, 또 한 명은 군인들에게 붙잡혀 감옥에서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두 영웅의 죽음은 한 시대를 마감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세상으로의 도약을 준비케 하였습니다. 바로 안중근과 이등박문의 이야기입니다.

일본에서 촉망받는 시대의 풍운아였던 이등박문이 독립운동 집안에서 태어난 안중근에 의해서 일생의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총탄으로 죽인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등박문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안중근의 탄생배경과 함께 안중근의 생애를 통하여 그것을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안중근(安重根1879년~1910년)은 누구인가?
14110_p76_01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교육가, 사상가, 독립운동가, 대한의군 참모중장이자 특파독립대장입니다. 어려서 안응칠(安應七)이라는 아명으로 불렸습니다. 본관은 순흥, 고려조 명현 안향의 26대손입니다.

구한말에는 학교 설립과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하였습니다. 한때 채표회사(彩票會社, 오늘날의 복권사업과 유사)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불리는 제2차 한일협약(대한제국을 사실상 일본 제국의 속국으로 만든 계기가 됨)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한 그는 1909년 10월 26일에 청나라 길림성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하였습니다.

문무를 겸비한 안중근
안중근이 태어나던 1879년은 조선에 망국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어가던 무렵이었습니다.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성균진사(조선시대에, 과거의 예비 시험인 소과(小科)의 복시에 합격한 사람에게 준 칭호)를 지낸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백천조 사이에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안중근은 순흥 안씨 참판공파로서, 원래 경상북도 순흥(본관은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다가 황해도 해주로 이주하였습니다. 해주에서 12~13대를 거치는 동안 처음에는 향리(지방행정 실무를 담당하던 계층)로, 나중엔 무과에 진출한 양반으로 살았습니다. 안중근 가문은 5대조~조부까지 무과 급제자만 7명이 나올 정도의 명문가(名門家)였습니다. 백범 김구와 안태훈이 서로 인연이 있었던 때를 기록해둔 『백범일지』의 한 페이지를 보면, 부친 안태훈은 눈빛이 사람을 찌를 듯하고 빛나서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이 넘쳤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또 안태훈은 품성이 소탈하여 아랫사람이나 백성들에게 친절하여 상류층이나 하류층 모두 그에게 호감을 가졌습니다. 그를 대하는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경외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안중근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슴과 배에 걸쳐 검은 점이 7개 박혀 있어 북두칠성에 응한 것이라 하여 아명을 응칠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후일 망명 후 구국활동 때 이 이름으로 행세하였습니다. 안중근은 나이 6살 때에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으로 이사해 천봉산 밑 청계동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일찍부터 글을 배워 사서삼경과 동국통감을 통달하였습니다.

하지만 안중근은 글공부보다는 사냥, 말타기, 무예 익히는 일을 즐겨하고 소질 또한 뛰어나 무인(武人) 기질이 강했습니다. 안중근이 하얼빈 의거 이후의 재판과정에서 자신을 항변할 때 늘 “나는 대한군인 중장의 신분으로 이등박문을 쏘았으니, 날 적장의 신분으로 대해 달라” 고 말한 것으로 볼 때 안중근은 군인으로서의 자긍심 또한 이런 무인 기질에 높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처럼 타고난 무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옥중(獄中)에서 그가 지었던『동양평화론』을 보면, 국제정세와 미래상에 관해 해박한 역사적 식견을 가졌으며 또한 인류애를 품은 성인(聖人) 같은 인품마저 엿보입니다. 또 그가 지은 ‘애국적 한시(漢詩)’에는 뛰어난 선비의 기풍 또한 보입니다. 그는 당대에 보기 드문 문무(文武), 성웅(聖雄)의 덕성을 함께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백범과 만나 독립운동사의 정맥을 개척하다
14110_p76_02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동학군이 황해도 지역까지 밀려오자, 수난 당하던 개화파와 가까웠던 그의 집안은 피난 차 해주에서 청계동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황해도 지역에서 동학군이 패하여 도망하고 있을 때, 쫓기는 신세로 있던 김구와 안중근 가문이 처음 만나 인연을 맺게 됩니다. 김구와 안중근, 두 집안의 만남은 이후 대한 독립운동사의 큰 맥을 이루게 됩니다. 김구의 인물됨을 알아본 안태훈은 인근에 집 한 채를 사서 김구를 청계동에 살 수 있도록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1894년 당시 김구는 19세, 안중근은 16세였습니다. 몇 개월 후, 김구는 다른 곳으로 살 집을 마련하면서 청계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후 ‘하얼빈 의거’가 터지자, 김구는 안중근과의 친분으로 일본경찰에 잡혀 감옥에 구속되었다가 한 달 만에 풀려나왔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후 김구에게는 안중근 의거가 독립운동의 의리를 상징하는 그 자체로 각인됩니다.


안중근 의사가 말한 이토 히로부미의 죄
1.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14.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천황 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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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죄목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죄를 심판한 안중근 의사의 사건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넓은 중국 대륙의 어느 누구도 못한 일을, 아니 그 누구도 꿈도 꾸지 못한 일을 작은 나라 한반도의 한 청년이 해낸 것입니다.

맺는 말
이상과 같이 안중근의 전 생애는 오직 조국을 생각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일본의 한국침략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위 국 헌 신 爲 國 獻 身
군 인 본 분 軍 人 本 分


14110_p76_04이등박문을 하얼빈에서 총으로 쏠 때 안중근은 자신의 신분은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군인’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이등박문을 죽인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 안중근의사의 일관된 생각이었습니다. 감옥에서도 의연한 모습으로 간수들의 존경심을 이끌어낸 안중근. 그 모습 속에서 목숨바쳐 지켜내고자 했던 민족의 정신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직 우리는 일본의 도발에 맞서고 있습니다. 독도와 정신대 문제 등 남북 분단의 아픈 역사보다 더한, 나라를 빼앗겼던 지난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한점 흔들림 없이 역사관을 바로 세우고, 나라와 민족의 근본 뿌리를 바로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안중근의사에게서 독도를 지키는 우리의 자세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일본인들의 도발에 즉흥적인 흥분으로 대처하기 보다는 의연한 모습으로 역사적인 당위성과 명분을 찾아내야 하겠습니다. 그것의 선행 작업은 무엇보다도 한민족의 진실한 역사를 찾는 데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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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大韓帝國)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2일까지 한반도(韓半島)를 비롯, 제주도 및 울릉도 등 한반도 인근의 섬과 해역을 통치하였던 제국입니다. 대한제국의 공식적인 약칭은 대한(大韓), 한국(韓國)입니다. 때때로 대한민국과 구별하기 위해 구한국(舊韓國)이라는 표현을 쓰거나 1910년 일제강점기 이전이라고 하여 구한말(舊韓末)이라고도 합니다.
일본,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청나라, 벨기에, 덴마크 등과 수교를 맺고 있었으나, 을사조약 이후 외교권의 박탈로 모든 나라와의 수교가 단절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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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약력
▶1879년 9월2일 순흥 안씨 가문에서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황해도 해주부에서 태어남. 이름을 중근(重根), 어릴 적에는 응칠(應七)이라 함.
▶1884년(6세) 조부, 부친을 따라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
▶1894년(16세) 부친을 도와 동학을 빙자한 폭도들을 진압. 김아려 규수와 결혼(후에 2남 1녀를 둠). 동학 혁명이 일어난 이 해에 백범 김구와 안중근 가문이 첫 만남의 인연을 가짐.
▶1897년 1월(19세) 천주교에 입교(入敎)하여 전도하러 다님.
▶1905년 12월(27세) 일본 제국의 불법적 조선침략을 세계 각국에 호소하는 운동을 함. 그해 부친 별세.
▶1906년 3월(28세) 진남포로 이사한 후, 집안의 재산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나라를 구할 영재를 양성.
▶1907년 8월(29세) 정부 군대의 해산을 보고, 망명길에 올라 북간도(두만강과 마주한 간도지방의 동부)를 다니던 중 블라디보스톡(러시아 남동부 동해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에 도착.
▶1908년 7월(30세) 연추 지방에서 이범윤 등과 의병군 양성. 의병군 참모중장으로 국내에 진입작전 감행.
▶1909년 3월(31세) 연추 하리에서 11명의 동지*와 손가락을 잘라 피로 맹세를 함. 이 피로 대한독립 네 글자를 쓰고, 조국과 민족을 구할 것을 하늘, 땅에 맹세.
▶1909년 10월26일 하얼빈 역에서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총살로 응징함으로써 세계 인사들로부터 ‘대한국의 혼이 살아 있다’는 찬사를 받음.
▶1910년 2월14일(32세) 여순(뤼쑨) 법정에서 6회 공판 끝에 사형 언도.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안의사에 대한 사형 집행. “나는 동양평화를 위하여 한 일이니 내가 죽은 뒤에라도 한일 양국은 동양평화를 위하여 서로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는 간곡한 말을 남기고 천주님께 기도 드린 후, 10시15분에 순국. 향년 32세.

* 안중근 의사와 혈맹을 맺은 동지 11인
금기룡(당시 나이 30세) 강기순(당시 나이 40세)
정원주(당시 나이 30세) 박봉석(당시 나이 32세)
유치홍(당시 나이 40세) 조순응(당시 나이 25세)
황길병(당시 나이 25세) 백남규(당시 나이 27세)
금백춘(당시 나이 25세) 금천화(당시 나이 26세)
강계찬(당시 나이 27세)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
일본의 정치가(1841~1909). 막부 정권 타도에 앞장섰습니다. 일본제국의 1대 내각 총리대신과 추밀원 의장을 지냈습니다. 주한 특파 대사로서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으며, 1905년에 초대 조선통감으로서 우리나라 국권 강탈을 준비하던 중, 1909년에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되었습니다. 사후 일본 천황으로부터 충정군(忠貞君)에 추봉되었고, 대한제국 순종은 그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