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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연 대감과 홰나무 이야기 본문

수행과 명상/영혼의 세계

하연 대감과 홰나무 이야기

세덕 2012. 2. 29. 12:17

하연 대감과 홰나무 이야기


사람이 죽으면 그 생명력이 곧바로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매미가 허물 벗듯이 육신의 옷을 벗어버린 혼(魂)은 천상에 올라가 신(神)이 됩니다. 그리고 후손들로부터 제사를 받으며 늘 자손들을 보살펴 주신답니다. 4대(대략 120년)가 지나면 각기 닦은 바에 따라서 영(靈)이 되거나 선(仙)이 된답니다. 그리고 무덤에 안장된 넋은 땅으로 돌아가 4대가 지나면 귀(鬼)가 되구요.
이번에는 조상신이 후손들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 있는 일화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아래에 소개하는 하연 대감 이야기는, 조상신은 사후 오랜 세월이 흐른 뒤라도 사라지지 않고 후손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후손이 생명의 끈을 이어주는 지상에 살아 있는, 조상 자신의 숨구멍이기 때문이죠. 이렇게 볼 때 조상의 묘 또한 소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조상신은 영이 밝고 믿을 만한 후손에게는 현몽을 해주기도 하고, 반면에 영명하지 못한 후손이라면 제3자에게 현신하여 일러주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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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河演) 정승이 있었다. 단종 1년에 별세하였는데, 그의 묘는 지금 경기도 시흥 소래산 아래에 있다. 일찍이 그는 자기의 묏자리를 미리 잡아놓고, 그 주위에 홰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었다.
그후 하연 대감이 돌아간 지 오랜 세월이 흘러 산소 주변에는 그가 심은 홰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숲을 이루었다. 이 숲을 보는 사람마다 탐을 내게 되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그의 후손들이 홰나무를 팔아 없애기 시작했다.
이 무렵 인천관아에서는 이상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었다. 부사(府使)로 내려오는 사람은 도임(到任)하는 그 날로 원인도 모르게 횡사하는 것이었다. 벌써 여러 번이나 같은 일이 되풀이되자 조정에서는 괴이하게 여겨 힘세고 담력이 있는 사람을 가려서 부사로 내려 보내게 되었다.
새로 부임한 부사는 임지에 도착하자마자 곧 육방관속(六房官屬)을 모두 불러서 명령을 내렸다.

“내가 밤을 새워 볼 터이니, 동헌(東軒) 곳곳에 불을 훤하게 밝혀 놓도록 하라!”
어느 덧 한밤중이 되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높은 사람이 행차할 때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재상(宰相)의 조복(朝服)을 입은 사람이 부사 앞에 홀연히 나타났다.
부사는 뜻하지 않은 일에 순간 놀랐으나 이내 정신을 가다듬었다. 얼른 뜰로 내려가서 그 재상을 맞으면서 동헌 위로 오르도록 안내한 다음 허리를 굽혔다.
“신임 부사 문안드리옵니다.”
“고맙소. 나는 예전에 벼슬을 했던 하연이라고 하오. 내게 한 가지 소원이 있어서 이곳에 부임한 부사들을 찾아왔었는데, 올 때마다 모두가 놀라서 죽고 말았소. 이제 그대에게 내 원을 말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기쁘오.”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힘 자라는 데까지 거행하겠사옵니다.”
“소래산에 있는 내 무덤 주위에는 내가 살았을 때 심어놓은 홰나무가 많이 있어서 나는 가끔 밤에 그곳에서 놀았네. 그런데 못난 후손들이 그 홰나무를 팔아버려서 조만간 다 베어지게 되었소. 그러니 부사가 그 나무들을 베지 못하도록 하여 주게.”
“명심해서 이르겠습니다.”
부사는 명성이 자자했던 하연 대감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그 이튿날 직접 후손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홰나무를 베지 말도록 하고 벤 자리에도 더 심도록 단단히 일렀다. 후손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크게 뉘우치고 묘 주변을 복원하기로 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하연 대감의 혼이 때때로 나타나 그 부사와 놀다 가곤 하였다.
이런 일이 자주 있게 되니 부사도 점차 귀찮아졌고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하연 대감은 고명한 재상이었기에 상대하기도 부담스러울 뿐만 아니라, 귀신과 자주 접촉하는 것은 언젠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래서 어느 날 하연 대감이 찾아왔을 때 부사는 여쭤보았다.
“이 세상에서 죽은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물건이 있습니까?”
“귀신이나 영혼은 복숭아를 싫어해서 복숭아나무 근처에는 가지를 않는다네.”
“예, 잘 알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난 부사는 어느 날, 하연 대감이 다시 찾아왔을 때 복숭아를 깎아서 내놓았다. 그러자 묵묵히 앉아 있던 하연 대감이 부사에게 말하였다.
“내가 온 것을 싫어하는 모양이로군. 나는 그대가 사람이 큰 인물인줄 알고 정이 들어 자주 와서 세상 경륜을 함께 나누었는데, 오는 것을 싫어하니 다시는 안 오겠네.”
그 후부터 하연 대감의 혼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