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주 천지조화

상제님 태모님 성지를 찾아서_김제 조종리 본문

증산도는./증산도가 뭐예요?

상제님 태모님 성지를 찾아서_김제 조종리

세덕 2012. 3. 6. 12:42


 ▲ 조종리 중조마을 태모님께서 도운의 둘째 살림을 여시고 천지공사의 시작을 선포하셨다.
 


 
 순례자일행은 태모님께서 도운(道運)의 둘째 살림을 여신 김제 조종리 일대를 찾았다. 특히 조종리 중조마을은 태모님께서 천지공사의 시작을 선포하신 뜻깊은 성지다. 이번 순례는 창생들을 살리시기 위해 고귀하신 생명과 혼을 모두 불태우신 태모님의 심법세계를 조금이나마 헤아려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태모님께서 기차를 타고 내리신 부용역
 김제시 백구면에 자리하고 있는 호남선 부용역(芙蓉驛). 하루에 두 번씩 상·하행선 무궁화호 열차가 몇 안 되는 승객을 태우고 내리는 아담한 역이다. 역사(驛舍) 앞에는 길 양옆으로 낡고 흐름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그 옛날 조금은 번잡했던 곳으로 짐작이 된다. 그러나 지금은 세월 탓인지 하나 둘 스러져 가는 집들과 함께 그 자취마저 사라져 가고 있다.
 
 이곳 부용역은 태모님께서 무오(戊午, 1918)년 9월 21일 새벽에 대흥리 도장을 떠나 천종서 성도 집으로 가실 때 처음 내리신 곳이다. 그 때 송산리에 사는 천종서 성도가 역에 홀로 계신 태모님을 꿈에서 뵙고 자기 집으로 모시게 되니, 태모님께서는 그곳에서 한달 동안 지내시다가 조종리로 가신다.
 
 태모님께서 조종리에 계시면서 대흥리나 다른 외처에 출행하실 때는 주로 부용역에서 기차를 타고 다니셨다. 조종리에서 10여 리 정도 떨어져 있어 조금은 먼 거리지만 그래도 가장 가까운 역은 이곳뿐이었다. 한번은 태모님께서 정읍 연지평에 사는 사위 박노일(朴魯一) 성도의 집에 다녀오시다가 이곳 어느 식당에서 진지를 드시는데, 그 식당에서 일하는 한 여인이 한 쪽 팔을 쓰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그 여자를 불러 앞에 앉히신 후에 아픈 팔을 어루만지시며 “불쌍하구나, 몸이나 성하여야 먹고살리라.”(道典 11:218:4) 하시며 그 자리에서 팔을 낫게 해 주셨다.
 
 이렇듯 이곳 부용역은 태모님께서 수없이 오가신 발자취가 서려 있는 곳이며, 비록 눈에 보이는 옛 자취는 희미해져 가고 있지만 수십 년 전 이곳에서 병자를 긍휼히 여기시며 베푸신 태모님의 은혜와 사랑은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다.
 
 


 천지공사의 시작을 선포하신 조종리
 김제시 백산면 조종리(祖宗里). 태모님께서 두 번째 천지살림을 여시고 10년 천지공사를 선포하신 매우 뜻깊은 성지다. 태모님께서 이곳으로 오시기 한 달 전, 천종서 성도의 집에 머물러 계실 때 조종리 강씨 신도들이 찾아와 모시기를 간청하자, “다른 것은 없고 다만 성씨(姓氏) 하나 보고 가노라.”(11:46:4) 하시며 이곳으로 오셨다. 조종리 신도들의 신앙심이 돈독해서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닌, 상제님과 동성동본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 오직 상제님만 믿고 오셨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조종(祖宗)이란 두 글자를 보면 태모님께서 이곳으로 오신 또 다른 깊은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역대 왕조의 계보를 뜻하는 조(祖)와 종(宗), 여기에는 후천 오만 년 동안 천륜으로 우주 일가(一家)를 이루는 진리의 큰 뜻이 숨겨져 있다. 태모님께서는 ‘성씨 하나 보고 가노라’ 하셨지만 실제 천지 도수의 섭리를 따라 이곳으로 오신 것이다.
 
 이곳을 조종리라 이름하게 된 것은 진주 강씨들이 세거하면서 이름 없는 야산에 역대 선령의 조산(祖山)을 만들고 ‘조종산’이라 부르면서부터라고 한다(『내고장의 뿌리 김제』). 조종이란 지명의 뜻이 워낙 커서 한때 정부에서는 이 지명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나락 조(粗) 자, 종자 종(種) 자를 써서 조종리(粗種里)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예로부터 이 마을에 가뭄이 없어 이곳 볍씨가 김제뿐 아니라 옥구 등지까지 흘러 들어가 종자로 쓰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종리에는 고려 현종 때 부원수를 지낸 은렬공 강민첨(姜民瞻)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조종리에 강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게 된 시기는 고려 말엽에 강민첨의 12세손 강충언(姜忠彦)이 상조(上祖)마을에 터전을 마련하면서부터인데,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 후손들이 점차 번성하게 되자 원조(元祖, 일명 새터), 중조(中祖), 하조(下祖, 일명 남조), 당산(堂山)마을 등지로 퍼져 살게 된 것이다.
 
 무오년 10월경, 태모님께서 처음 이곳에 오셨을 때 기거하실 곳이 없어 강휘원(姜彙元) 소유의 자그마한 오두막집에서 생활하셨다. 방 한 칸에 부엌 한 칸이 전부인 너무도 초라한 초가집에서 한 달간 지내신다. 그리고 한 달 뒤 성도들의 의연(義捐)으로 도장을 짓기 시작하면서 다시 하조마을 강응칠 성도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시게 된다.
 
 태모님께서 이곳에 오신 직후, 차경석 성도 교단의 제주 신도 문인택(文仁宅)이 성금을 모아 목포항으로 들어오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독립자금이라는 누명을 쓰고 방주를 비롯한 18명이 검거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 때 대흥리 교단에서 그 책임을 태모님께 떠넘겨버리자 태모님께서 정읍경찰서에서 하루를 유하시고 목포경찰서에서 37일 동안 옥고를 치르시게 된다.
 
 당시 일본 경찰이 태모님을 체포하려고 조종리에 왔을 때 강응칠 성도가 피하시기를 청했다. 그러나 태모님께서는 “이번에 내가 순하게 받아야 뒷일이 없을지니 피하는 것이 불가하니라.”(11:49:7) 하시며 성도들의 목숨을 구해 주시기 위해 어머니로서 모진 고통을 친히 대속하신다.
 
 이듬해에 태모님의 은혜로 구속되었던 성도들 모두 불기소로 풀려나게 되는데, 태모님께서 받으신 그 모진 고통은 어떠하셨겠는가? 당신님 혼자 겪으신 일이고 누구에게도 말씀해 주신 일이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당시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은 세상이 다 아는 바 태모님께서 받으신 그 형독은 매우 자심하였으리라. 출옥하신 뒤 수 년 동안 농사나 지으시면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태모님께서 자주 인마를 타고 도신 당산나무
 조종리 서편에 위치한 당산마을. 이곳에는 수령 300년이 넘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지금도 자태를 뽐내고 서 있다. 남쪽에는 암나무, 북쪽에는 수나무로 불리는 두 나무가 음양 짝이 되어 마치 후천 정역(正易)의 모습을 상징하듯 곤남건북(坤南乾北)으로 자리하고 있다.
 
 나뭇가지는 신비스럽게도 암수 모두 각각 5개씩 정음정양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지금은 암나무의 한 가지가 세월의 무게를 못 이겨 떨어져 나갔지만 태모님께서 공사 보실 당시에는 분명 다섯 개였다.
 
 태모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자주 이곳에 오셔서 인마(人馬)를 타신 후 강강술래 하듯 이 나무들 주위를 도시고, 또 외처에 출행하셨다가 돌아오실 때 항상 이 나무들을 한 바퀴 돌아서 도장으로 들어가셨다고 한다. 그것은 이 나무들이 지니고 있는 진리적인 속성과 깊은 연관성이 있으리라.
 
 
 태모님께서 머무시며 공사보신 도장
 태모님께서 11년 동안 머무시며 천지공사를 집행하신 중조마을 도장. 여섯 칸 겹집 전퇴의 초가집으로 당시에는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매우 큰 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0여 년 전 도장 건물은 다 헐리고 지금은 그 자리에 화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태모님께서는 병인(丙寅, 1926)년 3월, 이곳에서 10년 천지공사의 시작을 선포하시고 많은 공사를 보셨다. 천지대업을 마무리지을 인사 대권자를 내시는 칠성용정 공사와 남조선 배 공사, 전 세계 인류를 살리시기 위해 조직적인 포교의 기틀을 짜신 육임 구호대 도체 조직 공사 등 중요한 공사를 많이 보셨다.
 
 바쁘신 중에도 자식을 못 낳는 사람이 찾아오면 그들에게 자손줄을 내려 주시고, 병자나 가난한 사람들이 찾아오면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삶의 길을 열어 주셨다. 또 하루는 “세상 사람이 죄 없는 자가 없어 모두 제 죄에 제가 죽게 되었으니 내가 이제 천하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건지리라.”(11:83:2) 하시며 창생들의 죄업을 벗겨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혼절까지 하시면서 그들의 죄업을 대속하기도 하셨다.
 
 만고풍상을 다 받으신 태모님. 서슬이 시퍼런 일제의 압박과 신도들의 배신 등 갖은 고초를 겪으시다 한번은 너무도 힘겨우신 그 심정을 상제님께 눈물로 하소연하기도 하셨다. 그러나 대개벽기에 처한 억조창생을 살려내시기 위한 어머니 하느님의 희생과 대속의 길은 결코 멈춤이 없으셨다. 당신님의 노고는 다 잊으신 채 오직 창생들을 살리시기 위해 고귀하신 생명과 혼을 모두 다 불태우셨다.
 
 도장 마당에 서서 그 옛날 태모님께서 자주 바라보셨을 조종산 아래 원조마을을 건너다 보았다. 병인년 사월 초파일 전야에 청수를 뿜어 피우신 그 안개의 잔영일까? 엷게 낀 안개 속으로 원조마을이 시야에 들어왔다.
 
 태모님께서 도장에 계실 때 새벽마다 청수를 올리시고 창생의 구원과 행복을 비시며 읽으셨던 주문 소리가 건너편 원조마을까지 들렸다고 하는데, 어디 원조마을까지만이랴. 분명 창생들의 영혼 속 깊이 사무쳐 새 생명의 율려가 되었으리라.
 
 태모님께서 이곳에 계실 때 항상 방문을 열어 놓으신 채 긴 담뱃대를 드리우고 담배를 피우셨다고 한다. 지금도 천지를 향해 분향(焚香)하시던 태모님의 그때 그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며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흔적조차 없는 성지에 대한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사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찾아가는 성지에서 과거의 자취를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다.
 
 우리가 성지를 찾아 순례하는 진정한 의미는, 역사적인 천지공사 현장에 서서 상제님과 태모님의 심정과 숨결을 느껴보고,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시기 위해 생명을 다 바치신 당신님들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생명을 살리는 참 일꾼의 길을 보다 더 새롭게 가기 위함이다. _ 장원연/증산도 본부


ⓒ 월간개벽 2007.0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