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주 천지조화
광개토 대왕릉비는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말해 준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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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 대왕릉비는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말해 준다
광개토 대왕릉비는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말해 준다.
첫 번째로, 광개토 대왕릉비는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이 시조의 17대손이라 하고, “삼국사기”는 13대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 제왕들 가운데 일부 왕들이 빠져 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고구려의 실질적인 시조가 해모수라고 하는데, 실제로 해모수와 광개토 대왕의 세대 내력을 조사하면 그 진실이 명쾌히 밝혀진다. 주몽왕으로부터 광개토 대왕까지는 13대 차가 나지만, 해모수로부터는 17대 차가 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광개토 대왕릉비가 “환단고기”의 내용을 제1차로 증명한다.
두 번째로, 백제가 고구려의 종속국으로 시작되었다는 내용에서 광개토 대왕릉비와 “환단고기”가 서로 일치한다. 능비에는 백제와 신라가 본래 고구려의 종속국이었음을 말해 주는데, 일부에서는 이 내용이 과장 내지 허구적인 기록이라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환단고기”는 실제로 고구려 주몽왕의 왕후인 소서노가 두 아들과 함께 고구려를 떠나 대방(중국 허베이 성 톈진) 지역에 이르러 왕국을 세우고 주몽왕에게 귀복하니 주몽왕이 소서노에게 ‘어라하’라는 왕호를 하사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소서노의 왕국이 고구려의 제후국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어라하 칭호는 후에 온조가 세운 백제로 전승되었다. 백제가 제후의 칭호인 어라하를 그대로 사용하였다는 사실은 백제 역시 고구려의 종속국으로 시작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여기서 광개토 대왕릉비가 “환단고기”의 내용을 제2차로 증명한다.
마지막으로, 능비 영락 6(396)년 조의 내용이 “환단고기”의 내용과 일치한다. 능비의 영락 6년 조에는 “백잔(백제)과 신라는 본시 우리나라(고구려)에 속해 있던 신민이었다. 왜가 신묘(391)년에 우리나라로 쳐들어오므로 광개토 대왕이 바다를 건너 이를 깨뜨렸는데, 백잔과 왜가 신라를 침구하여 신민으로 삼으려 하니 영락 6년 병신에 우리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왜와 백잔을 토벌하여 고모야라(웅진), 미추홀(인천) 등 50여 성을 빼앗았다.”라고 기록하는데, “환단고기”에도 마찬가지로 “광개토경호태황(광개토 대왕)이 한번은 바다를 건너 이르는 곳마다 왜인을 깨뜨렸는데, 이때 왜인은 백제를 돕고 있었다. 앞서 백제가 왜와 은밀히 내통하여 왜로 하여금 신라의 국경을 연달아 침범하게 하므로 우리 황제가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웅진, 임천, 우술산 등을 빼앗았다.”라고 기록한다. 백제와 왜가 결탁하여 신라를 침범하였다는 내용도 같고, 대왕이 수군을 이끌고 백제와 왜를 동시에 정벌하였다는 내용도 같으며, 웅진 등을 빼앗았다는 내용도 일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환단고기”의 위 내용은 396년에 있었던 정벌 사건을 가리킨 것이며, 동시에 왜가 임나일본부를 두어 백제와 신라를 식민지로 삼았다는 일본의 주장이 허구라는 사실까지 입증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 광개토 대왕릉비가 “환단고기”의 내용을 제3차로 증명한다. 결론적으로 두 사료는 상호 보완적 관계에 있으며, “환단고기”가 진서임이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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