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주 천지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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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는./증산도 입도 수기

증산도에는 우리 하느님이 계셔서 좋다

세덕 2013. 1. 9. 14:26

증산도에는 우리 하느님이 계셔서 좋다

강영우(남, 50세)/동해 천곡도장/도기 133년 10월 31일 입문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만 해도 좋은 거야!
 
 “新天地家家長世 日月日月萬事知
  侍天地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이게 무엇이고?”
 “예, 증산도 주문입니다”
 
 지난 2003년 11월 8일, 집안의 결혼식 참석차 서울을 향해 달리고 있는 내 승용차의 스피커에서 사부님의 주문소리가 나오자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아내의 눈이 동시에 동그랗게 떠진다. 그때 뒷좌석에 앉아 계시던 아버지가 나에게 던진 질문이고, 나의 대답이었다. 그래놓고 나는 룸밀러로 모두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다행이다. 아무도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비록 4대째 천주교를 믿어 왔지만 조상들의 기제사(忌祭祀)는 틀림없이 지켜온 집안 아닌가! 그리고 그때마다 아버님이 읍-하여 고하는 ‘유세차…’는 또 얼마나 낭랑한가!
 
 카세트 테이프는 계속 돌고 사부님의 주문소리는 더욱 구성지다.
 
 “天更生 地更生 人更生 更生 更生 更生
 天人天地天天 地人地地地天 人人人地人天…”
 
 다시, 아버님이 어머니보고 말씀하신다.
 “보소! 증산도가 뭔지 알아요?”
 “내가 그걸 우찌 알겠소”
 “증산도는 말이요, 증산 강일순(姜一淳) 선생이 창시한 우리나라의 자생신앙인데 한동안은 신도가 수백만인 적도 있었지”
 “그럼 지금 저 사람이 중이 아니네? 염불하는 사람 말이요”
 “중은 무슨 중. 그냥 증산도 하는 사람이겠지”
 “어머니! 저분은 지금 증산도를 이끌어 나가는 ‘종정’(宗正)이라는 분입니다”
 
 두 분의 대화에 내가 끼어들었다. 다시 아버지의 이야기가 이어졌는데 아버지는, 내가 ‘도장’에 들어오기 전에 알았던 것보다, 증산도에 대하여 훨씬 많은 상식을 가지고 계셨다. 상제님이 탄강하신 곳이 전북 정읍이며, 증산도는 현재 구라파와 미주에서 엄청난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는 내용과, 지금은 일반인들보다는 국내외 식자층들이 증산도에 관심이 더 많다는 것, 전국의 대학교에 증산도 써클(동아리)이 없는 곳이 없다는 등등을 어머니에게 설명해주고 계셨다.
 
 그리곤 하나를 덧붙인다.
 
 “아 참, 증산도 사상과 교리를 이용해서 우매한 백성들 울리고 있는 사이비 종교단체도 있지 않소”
 
 대단하다. 아버지가 저렇게 증산도의 어제와 오늘을 잘 알고 계시다니! 기실, 난 오늘 꽤나 염려를 하고 사부님의 ‘주문’테이프를 틀어드렸는데-. 더욱이 주문을 따라 해보시더니,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만 해도 좋은 거야!” 이러기까지 하신다. 이것도 상제님의 뜻이라면, 감사할 따름이다. 언제 한번 모시고 나와서 ‘도장은 이런 곳입니다’ 해야겠다.
 
 
 아직도 읽어야 할 책이 많다고?
 난 오늘로 입문한 지가 딱 일주일 되었으며, 여기 동해 천곡도장을 찾아온 지는 10여일이 지났다. 이제 2주 후, 이 달 23일에 ‘입도식’을 갖자고 우리 포정님이 말씀하신다. 글쎄? 입도하려면 시험을 봐야 한다는데 통과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래도 지난 10여일 동안은 나름대로 꽤 여러 권의 책을 읽었다.
 
 처음부터 열거하자면, 『만화 한단고기 1, 2, 3』, 태사부님 어록 『새시대 새진리』 두 권, 사부님 어록 『이제는 개벽이다』 세 권, 『이것이 개벽이다(상)』, 『증산도의 진리』, 그리고 『월간개벽』 10, 11월호와 기타 부수적 자료와 리플렛….
 
 이런 책을 읽었는데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다. 하기사 내가 무슨 도통한 사람도 아닌데 책 몇권 읽고 감히 증산도를 안단 말인가!
 
 그러나 수일 전 증산도 인터넷 방송으로 중계된 ‘증산도대학교’ 교육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태사부님 도훈과 사부님의 도훈을 새벽까지 경청한 것과 파트별 강의는 매우 유익했다. 또 지난 6일과 7일 수호사님과 포정님이 대전 본부로 교육소집(?) 간 사이 내쳐서, 앞서간 입문자와 입도자를 대상으로 한 VOD강의를 다 끄집어내어 밤새워 본 것도 좋은 기회였음이 틀림이 없다.
 
 하지만 아직도 멀었다. 아직도 더 읽어야 할 책이 내 책상에는 수북히 쌓여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날이 오면』, 『한한한의 비밀과 사명』, 『물은 답을 알고 있다』 등등….
 
 모두 그 골치 아픈(?) 아줌마가 보내준 것이다. 그리고 포정님이 선물해주신 책도 몇권 있다. 어디 그뿐인가! 입도 전에 『도전』도 한번쯤 읽어봐야 하건만, 그 아줌마는 지금도 전화로 닥달이다. 뭐하고 있냐고? 보내준 책을 다 읽어야 또 보내줄 거 아니냐고….
 
 나원참, 내가 이 정도 하는 것도, 학교 다닐 적 말고는 없건만…. 아이구, 그 골치 아픈 아줌마를 만나서 내가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저하고는 밝은 대화만 가능합니다
 그렇다. 그날 우연히 난 그 아줌마를 만난 것이다. 그 골치아픈 아줌마를 말이다. 그 아줌마는 그날 우리의 만남을 상제님의 뜻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날은 추석을 한참 앞둔 어느 날이었다. 난 ‘40+삶의 주막집’이란 인터넷동호인 모임에 가입하고 있는데, 그 모임의 회원들과 안부를 묻거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음 메신저’를 통하여 간간이 하고 있다. ‘유유상종’이라고 그 모임 중에서도 직업이 유사하거나 관심분야가 같아서 대화의 공통분모가 이루어지면 더욱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역사의 그날에는 대화가 가능한 우리 ‘주막’회원이 단 한사람도 없었다. 공교롭게도 회사일마저 급한 것이 없었고…. 무료했다! 메신저는 열었고… 채팅방을 살며시 들여다봤다. 모두 어리고 젊은 아이들뿐이다. 전에도 채팅방을 몇번 들여다보기는 했어도, 낯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해본 적은 없다.
 
 우리의 채팅문화라는 것이 대다수가 단편적 목적을 위한 건전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며, 나의 ‘아이디’를 알고 있는 어느 누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기에 오래 머무를 수 없다. 또 대화할 만한 상대를 만나기도 사실 불가능하고…. 그래서 남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시도해본 적이 없는데, 그날은 그냥 아무라도 좋았다. 어차피 무료한 시간을 죽이는 게 목적이었으니….
 
 그런데 그날 그곳에, 내가 이렇게 코걸린 아줌마가 지키고 있었다. 용기를 내어 난 한 줄의 쪽지를 날려보낸 것이다.
 
 “안녕하세요? 그쪽은 어디시죠?”
 “……”
 아무 대답이 없다. 멋쩍기도 하다.
 “실례했습니다”
 어쩔 수 있겠는가? 그래도 인사는 하고 컴퓨터를 껐다.
 
 그 다음날이었다. 전날 대답이 없던 그분으로부터 답이 와 있었다. 그것도 나와 같이 딱 한 줄이었다.
 “아직도 계신가요? 저하고는 밝은 대화만 가능합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전날은 어느 후배와 상담을 하느라 대꾸를 못한 것이 미안하여 몇 마디 건네어 줄려고 하였더니 내가 나가고 없더라나. 그런데, 나중에라도 응대해 주려고 한 것은 고맙지만 ‘저하고는 밝은 대화만 가능합니다’라는 말이 몹시 자존심을 거슬리게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러면 누구는? 누구는 밝은 대화가 아니고 컴컴한 대화를 하려고 했다는 말인가? 그놈의 나쁜(?) 오기가 발동한 것이다.
 
 나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나 이런 사람이라고…. 나의 주소, 나의 직장, 가족사항, 사무실 전화번호, 집 전화번호, 그뿐인가! 학교, 종교활동과 사회경험 등 다 밝히고는 난 이런 생각과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읽든지 말든지- 내 빨끈한 편지를 본 모양이다. 다음날 또 다시 쪽지가 와 있었다.
 
 “오늘은 볼일이 있어서 대전에 가니 이틀 후에는 꼭 좀 뵙자며….”
 대전 어디를 왜 갔다 왔겠는가?
 
 어쨌든 그리하여 이틀 후에 대화가 시작되었다. 이름을 밝히라니 한참을 머뭇거린다. ‘그럼 엉터리라도 이름을 밝혀야 내가 보낸 장문편지에 대한 최소한의 예가 아니겠느냐’고 했더니 그래도 머뭇거린다. 그래서 내가 또 한마디했다. 아니, 자기 이름 석자도 못 밝히는 사람과 무슨 밝은 대화가 가능하겠냐고….
 
 그제서야 그 골치 아픈 아줌마가 ‘이름을 거짓으로야 말할 수 있겠느냐’며 자기 이름은 ‘박성예(朴性詣)’라고 말한다. 사는 곳은 ‘경남 진주’라는 것이며…
 
 그래도 나하고 조금은 대화거리가 있다. 그도 다행이다.
 
 
 내가 바로 진주 姜氏 아닌가!
 난 어려서 진주와 가까운 삼천포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삼천포 분이시고 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에 진주와 사천 등지에서 군 생활을 하셨다. 그리고 내가 바로 진주 姜氏 아닌가! 경남 진주라면 우리 씨족의 유허지도 많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나는 상대를 탐색해야 했다. 난 개신교 신자를 유독 싫어한다. 살다보면 이런 사람도 만나고 저런 사람도 만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가 만나본 개신교 신자들은 어느 단계에 들어서면 대화가 불가능하다. 하여간 난 그네들과 대화의 코드가 맞지 않음을 여러 번 겪었다. 그러니 개신교 신자라면 아예 대화를 거두어들일 생각이었기에-
 
 얼마후면 추석이다! 추석을 ‘화두’로 성묘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말이 통한다. 또 제사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기제사를 3대나 모시고 있다. 장손이기에 할아버지 할머니는 물론이고 연고가 없는 작은아버지 한분까지 나의 몫이다. 제사의 집례는 아직까지 아버님이 하시지만 그 준비는 모두 나와 아내가 하고 있다. 아버님과 어머님이 한 아파트 같은 동 바로 위층에 살고 계시기에, 한 계단만 내려오시면 아들네 집이므로…)
 
 이제는 아줌마가 열변이다. 제사라면 끔찍이도 생각한단다. ‘나물에 비벼 한밤중에 나누어 먹는 그 제사밥 맛은 또 어디에 비길 것이냐’고 하면서…. 거기에 더하여 ‘님께서는 작은아버지 제사까지 모시고 있으니 복 받으실 겁니다’라고도 한다. 제사 이야기도 통한다. 예수쟁이(?)는 아닌 모양이다. 또한 다행이다.
 
 
 증산사상을 아시나요?
 그런데 불교는 아니란다. 천주교도 아니란다. 그런데도 신앙은 가지고 있단다. 나 이런 참! 그럼 대체 뭐야? 조상 기제사는 좋아하고…. 불교, 개신교, 천주교가 아니다? 그렇다! 그럼 틀림없는 대순진리회다! 그렇다면 대순진리회인지를 체크해야 한다! 대순진리회 신도인가를 체크하기 위해서 오히려 내가 ‘증산사상을 아시나요?’ 하고 물었다. 조심스럽게-.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한 질문이다. 증산상제의 진리도 한줄 모르는 것이 감이 증산도 귀신(?)에게 “강증산을 아시나요?” 했으니... 상대 쪽에서 보면 내가 귀신이 된 것이고 의아해 할 수밖에-. 그런데 그 질문에 대한 그녀의 답이 묘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ㅎㅎㅎ’ 다. ‘ㅎㅎㅎ’ 하며 얼마나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인가! ‘너 딱 잘 걸렸어’ 하고 말이다. ㅎㅎㅎ
 
 그렇게 시작된 대화가 틈틈이 이어진 것이다. 나중엔 대순진리회가 아닌 증산도 신앙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고, 나는 그 사람이 화두를 주면 내 상식에 기초하여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굴절된 역사를 어느 정도 아시냐’고 하면 난 알량한 상식으로 또 편지를 했고, ‘종교와 뿌리신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하면 나는 또 한편의 논문(?)을 발송시켰다.
 
 참 웃기는 이야기다. 따지고 보면, 내가 열변을 토할 때마다 그녀는 나에게 흐르는 민족과 조상의 피를 확인하였을 것이며, ‘이 사람은 상제님의 진리를 받아들일 심성이 되어 있는가’를 체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를 체크한 것인가? 누가 이기고 진 것인가?
 
 진리가 이긴 것이고, 상제님이 이긴 것이다! 그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고는 얼마 후에 책이 몇권 택배로 왔다. 읽어보라는 정중한 편지까지 넣어서-. 또 간간이 보내주는 이메일 편지가 정성스럽고, ‘책은 어느 정도 읽어보셨냐’며 조심스럽게 묻는 안부가 고마운데 항우장사인들 어디 견디겠는가?
 


 
 도장에서 시작된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그때부터 내가 그녀에게 붙여 준 별호가 ‘골치 아픈 아줌마’다. 하여간 난 그 골치 아픈 아줌마로 하여금 진주까지 호출을 당했고 난생처음 도장(진주상대)으로 끌려갔으며 이상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모셔진 신단 앞에 아무 것도 모른 채 엎드리게 되었으며 요상한(?) 주문을 중얼거리는 광경도 목격했다. 그렇게 나는 상제님과 태모님을 뵈었다. 또한 그곳에서 ‘태을주’를 만난 것이다.
 
 그날이 도기道紀 133년 10월 19일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된 날이다.
 
 나에게 진리를 전해준 그 골치 아픈 아줌마 박성예님께 지금은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또한, 그날 바쁜 일과를 다 제쳐두고 시간을 내어 증산도의 기본교리를 설명해 주시느라 여러 시간을 찻집에서 애써주신 강호철 수호사님께도 고마움을 전한다. 모두가 고운 마음이었기에 그 아름다운 추억은 내 가슴에 영원할 것이다.
 
 또한 나의 ‘입문치성’ 때에 그 먼길을 마다 않고 여기 강원도 ‘동해 천곡도장’까지 비행기로 날아와 주신 골치 아픈 아줌마의 정성에 무어라 표현할 말이 없다. 이만 중략하기로 하고-
 
 
 성경이 주는 큰 메시지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난 4대째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작은아버지 한분이 신부님이시기도 하다. 그 작은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천주교 수도원에서 생활을 한 까닭으로 할아버지부터 모두가 천주교에 입교를 했고 지금도 온 집안이 천주교 신자이다. 그러니 나 또한 어려서 ‘유아영세’를 받았다.
 
 청년시절에는 천주교신자로서 봉사한 사회참여 경험도 조금은 있다. 그러나 만약에 내가 성년이 되어 스스로 종교를 선택했다면 기독교(천주교 포함)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개신교는 더 더욱 아니다. 따지고 보면 지금 판을 치고 있는 불교, 천주교, 개신교가 전부 다 수입신앙이 아닌가? 정서적으로 나에겐 맞지 않았다. 성경의 배경이 남의 땅이며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전부다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 까닭에 내가 스스로 신앙을 택하였다면 적어도 단군사상을 받드는 ‘대종교’이거나 아니면 ‘천도교’였을 것이며, 그도 저도 아니면 불교였을 것이다. 대종교나 천도교는 우리 것이라는 것이 그 이유이고, 불교는 우리 역사와 함께 오래 동안 숨쉬어온 것이기에-. 증산도에 대해서는 조그마한 지식도 없었던 관계로 생각해볼 기회조차 없었으며….
 
 ‘그럼 넌 어찌하여 천주교에 그토록 열심히 다녔느냐’ 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난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크게 보아왔다. 어찌되었던 서로 돕고 사랑하며 살자고 하지 않는가!
 
 또한 우리가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에 천주교가 우리 사회에 기여한 바가 큼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지금도 천주교가 우리 사회에 끼치고 있는 영향과 사회참여는 그 어느 집단에 비교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태사부님과 사부님의 어록을 보라! 마더 테레사의 이야기가 간간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멀리 갈 것도 없다. 지학순 주교님 같은 분은 이 땅의 민주화와 의식계몽운동에 앞장서며 ‘옥고’도 마다하지 않았던 분이다. 난 그런 천주교의 실천적 행동과 용기에 자긍심을 가지고 동참해 온 것이다. 다만, 그것이 우리의 민족종교였다면 더 없이 좋았으련만…. 아쉬움이 남는다.
 
 
 치즈를 무엇으로 만드는지 아니?
 그럼 간장 고추장 된장은 무엇으로 만들지?
 이제는 증산도가 해야 한다. 바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다. ‘후천선경세계’는 우리가 건설해야 하는 우리의 몫 아닌가! 상제님의 진리와 태사부님, 사부님의 도훈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것은 너희들의 몫이라고. 태사부님과 사부님의 어록을 읽었다. 그리고 느꼈다. 
 
 개벽! 개벽은 어차피 되어야 한다. 우리 스스로 개벽의 시대를 열어 세상을 한판 뒤집어야 한다. 지축의 정립? 그 지축이 저절로 바로 서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지구를 밀어서라도 바로 세울 각오로 미쳐야 한다. 아니다, 미쳐서도 안 된다. **야 한다, 우리 모두가 **야 한다. 죽을 각오가 되어있을 때 살 수 있을 것이기에 말이다.
 
 어쩌면 ‘병겁’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도의’(道義)는 간 곳이 없고 한탕주의와 쾌락만이 난무하는 세상이 되어 있지 않은가! 지금 온 나라가 썩었고 그 구린내는 세상을 진동시키고 있다. 어찌 상제님께서 지켜보고만 계시겠는가? 우리는 ‘배달’의 자손이고 말 그대로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곤륜산으로부터 시작되어 열매맺은 ‘지구의 혈’이 우리나라다’-이런 심오한 이야기가 아니라도 좋다. 이 지구상에서 순수한 자기네 말과 글을 가진 민족이 몇이나 되는가! 또 문화는? 우리의 금수강산은 어떠하며, 이렇게 사계절이 분명한 나라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 더 한심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자라는 아이들에게 한번 물어 보라! ‘너 치즈를 무엇으로 만드니?’ 하면 대답 못하는 아이가 없다. 물론 쏘시지나 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된장 간장 고추장을 무엇으로 만드니?’ 하면 자신있게 답하는 아이가 별로 없다. 중·고등학생도 마찬가지다. 많은 청소년들이 국내외 유명 연예인의 족보를 좍 꿰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신체사이즈 그 사람의 기호식품까지도 다 외우고 있다. 그러나 정작 자기네 족보는 4대조까지 아는 사람도 극히 드물다. 대학생 역시 마찬가지다. 쿤타킨테가 알렉스 헤일리의 9대조인 줄은 알면서도 자기부모의 이름을 한문으로 쓰지 못하는 학생이 대다수이다.
 
 이런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는 ‘야훼’니 ‘여호와’니 이런 말들은 당연한 것이고 ‘상제’나 ‘치성’, ‘수행’ 이런 말은 먼 나라의 것이거나 미신좇는 무리들이 쓰는 말들로 치부되고 말았다. 또 어느덧 제례문화 자체가 그렇게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웃어야 할 일인지 울어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남의 것이 더 커 보이고 내 것은 무조건 작아 보이는 사대주의를 타파하는 것도 틀림없는 ‘개벽’이다. 그러한 신 사대주의는 사회 기득권층일수록 더하다.
 
 
 제가 왜 햄 안 먹는지 아세요?
 우리 집에서 있었던 이야기 하나를 여기에 소개한다.
 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던 작은아버지 한분이 또 계셨다. 그분은 미국의 모 대학강단에서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그 작은아버지는 한국에 나오면 언제나 그랬다. “한국의 차들은 너무 작아, 집들은 다 콧구멍만 하고...” 난 그때마다 매우 속이 상했지만 어떻게 할 것인가? 집안 어른인 것을-.
 
 그 작은아버지가 어느 날 한국을 다니러 다시 나왔고, 우리 집엘 들렀다. 어머니는 그날 막내시동생이 왔다고 생선을 맛나게 굽고 반찬을 만들어 그윽한 아침상을 손수 마련했다. 그 아침상에는 갓 나온 햇김도 올라와 있었다. 아침을 먹고 계시던 작은아버지가 한 말씀하신다.
 “형수! 김이 참 맛있네요”
 그때 내가 무심코 물었다.
 “작은아버지! 미국사람들은 김을 안 먹나요?”
 정말로 생각없이 던진 질문이다. 미국사람들이 무슨 김을 먹겠는가? 음식문화가 우리와는 현저히 다른데….
 작은아버지의 대답이 나왔다.
 “응? 미국사람들은 이런 거 안 먹어도 먹을 것이 많잖아!”
 나 이런참, 그럼 우리는 지금 먹을 것이 없어서 이 김을 먹고 있다는 말인가! 비위가 틀리기 시작했다.
 “작은아버지, 제가 왜 쏘세지 안 먹는지 아세요?”
 “……”
 “쏘세지 그런 거 안 먹어도 여기는 먹을 것이 많거든요”
 “ ????? ”
 “작은아버지, 제가 왜 햄 안 먹는지 아세요?”
 “……”
 “작은아버지, 제가 왜 버터 안 먹는지 아세요?”
 “……”
 “여기는 요 그런 거 ……”
 아버지가 보다 못하겠는지 말린다.
 “어허, 그만 되었다”
 하여간 그렇다. 전부다 혼(魂)을 놓고 있는 것이다.
 
 또 얼마 전의 일이다. 어느 조촐한 모임에 초대되어 갔었는데 그 사람들 중에는 목사가 한분 있었다. 무슨 이야기 끝에 단군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고 그 목사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세상에 말입니다, 어떻게 곰이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아니, 마늘을 먹고 굴속에서 사람이 되었다? 참 엉터리도 그런 엉터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상식으로 생각해도 웃기는 이야기 아닙니까?”
 
 내가 한참을 참고 있는데도 그 목사님의 이야기는 물을 만난 듯 그치질 않는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이보시오 목사님, 제가 더 웃기는 이야기 하나 해 드릴까요? 하나님이 흙으로 본인의 형상을 빚어 후- 하고 입김을 불어넣었더니 사람이 되었다? 그 다음 그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서 또 후- 하고 불었다? 이게 정말 웃기는 이야기 아니요? 차라리 곰 이야기가 더 과학적이고 상식적이지 않습니까?”
 
 이렇다! 그럼에도 우리는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있다! 어찌 되었던 민족종교가 융성해야 한다. 그래야 민족의 혼이 살아 숨쉬고 힘이 결집된다. 그것이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고 정통성을 확보하는 길이기도 하다.
 
 저 일본을 보라! 어디 수입 외제 종교가 힘을 쓰는가? 본받아야 한다!
 
 
 증산도는 무엇이고 개벽은 무엇인가?
 하물며, 우리 증산도의 진리는 세계를 건지고자 하는 ‘대도’(大道)의 길이며 세계를 지배하고도 남을 통큰 포부가 담겨 있는 것 아닌가!
 
 증산도는 무엇인가? 사실 지극히 간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주일년으로 요약되는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고, 만유가 ‘원시반본’(原始返本)하는 절대불멸의 진리에 순응하여 후천 선경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인존제일주의’의 진리가 바로 증산 상제님께서 펼치신 증산도인 것이다. 원시반본하는 우주변화의 자연섭리는 상제님이 만든 것도 아니며, 태사부님 사부님이 지어낸 것도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원칙을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본래 음양오행의 이치가 있고, 그 이치에 따라 상제님이 오시고, 또 상제님께서 태사부님과 사부님께 특별한 임무를 부여하셨다는 걸 알면 증산도를 알게 된다.
 
 부여된 특별한 임무는 무엇인가? 그것은 ‘선천 오만년’을 마감하고 지구촌 사람들을 후천 선경세계로 인도하는 과정의 하나인 ‘개벽’을 진두 지휘하는 것이다.
 
 개벽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천갱생’(天更生), ‘지갱생’(地更生), ‘인갱생’(人更生) 하는 것이다. 하늘도 변하고 땅도 변하고 사람도 변화시켜 새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후천의 유토피아 지상선경으로 가고자 하는데 변하지 않고 갈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 개벽은 상제님이 어느 날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뜨리는 것도 아닐 것이며, 태사부님 사부님이 손에 쥐어 주시는 것도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개벽은 우리가 만들고 우리가 집행하여 우리가 세상을 건지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도 살리고, 인간도 살리고, 문화도 살리고, 역사도 살리고, 도의도 살리는 것이다.
 
 개벽은 종말이 아니다. 뭇 신흥종교가 혹세무민하는 ‘종말론’은 더욱 아니다. 개벽은 또 다른 시작이며 새 문명의 출발이다. 상제님께서 그렇게 개벽되도록 ‘천지공사’를 보신 것이다. 개벽은 우리의 손으로 우리가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그렇게 짜 두셨고, 지금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그 선봉에 태사부님 사부님이 서 계시고, 두 분은 이미 진리의 안목으로 개벽의 ‘작전계획’을 수립해 두고 계시지 않은가! 우리는 그 대오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며, 나 역시 그 대열에 동참하고자 이렇게 늦게나마 달려왔다.
 


 
 나는 왜 이 대열에 동참하려 하는가?
 나는 보았다. 난법이 난무하는 이 세상을 상제님의 진리로 교화하고, 상생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해 부단히 외길을 걸으며 고뇌해온 한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본 것이다. 그분의 진솔하고 청렴하고 자애로운 모습을 보았다. 그분의 신념과 철학은 수많은 핵으로 분열되어 인류역사에 영원할 것이 분명하다. 난 그분의 모습을 본 것이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존경하는 태사부님 아니신가!
 
 또 한 분을 보았다. 그분의 해맑은 미소를 본 것이다. 그 미소는 지극히 인간적이다 못해 천진난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꾸밈이 없었다. 또한, 오랫동안 준비해 온 대업을 목전에 두고 서성이는 절박함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당신을 따르는 일꾼들의 등을 가만히 두드려 채근하시는 안타까움도 그분에게는 있었다.
 
 그뿐인가? 유일무이한 불멸의 진리, 증산의 ‘도’로써 세계를 새롭게 하려는 큰뜻도 나는 보았다. 그래서 난 이 대열에 동참하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 부단히 자기도야를 하며 ‘성경신’을 다하여 현장에서 봉사하는 그분의 일꾼들을 내가 본 것이다. 새 시대 개척의 피곤함 속에서도 언제나 밝은 모습을 잃지 않는 저 일선의 성직자들을 내가 본 것이다. 그들의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들은 어째서 저 힘든 개벽의 시대를 개척해 가면서도 저렇게 즐거울 수 있는 것인가? 나는 그들의 모습에서도 ‘지도자’의 철학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몸에 더없이 좋은 약도 독이 될 수 있다. 상제님의 진리가 아무리 좋으면 뭐할 것인가? 누가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그 지도자의 철학이 어떤 것인지에 따라 인류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할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보라! 지금도 상제님의 저 좋은 진리를 ‘혹세무민’하는 데에 악용하는 무리가 있지 않은가! 내가 본 증산도 성직자들은 그 지도자의 철학을 안고 닮아서 일체 되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상제님 사업에 생을 담보하고도 저렇게 밝을 수 있는 것이다!
 
 
 혼을 남에게 다 갖다 바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람들
 수일 전의 일이다. 사부님 도훈을 도장에서 VOD로 경청할 수 있었다. 그때 사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밖에 나가면 말이야 증산도를 마치 사이비 신흥종교 하나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나는 그 말씀에 울분이 치솟았다, 울분이 말이다. 정말 딱한 일이 아닌가! 혼을 남에게 다 갖다 바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니….

 사이비란 무엇인가? 비슷하기는 한데, 잘못된 것이라는 말 아닌가.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유교, 불교, 기독교(천주교)는 참된 신앙이고 그 나머지 것들은 다 사이비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있다. 그 중에 우리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고쳐 말하면 남의 것은 다 좋은 것이고 우리 것은 다 사이비라는 말이 된다.
 
 상제님 진리는 ‘무위이화’로 운행하는 자연섭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 우리 조상의 혼이 녹아 있는 인류구원의 심오한 ‘천리’이다. ‘의’義를 구하기 위해 이 밤도 잠 못 이루는 지도자의 고뇌로 커나가는 이곳을 사이비라니…. 어불성설이다.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다. 누가 사이비인가? 종말론을 내세워 가산을 다 정리케 하고 지금 당장 하늘로 올라가자는 무리가 있다! 또 부모조상님 기일에 물 한 그릇도 대접 못하는 한심한 무리들이 난무하고 있다!
 
 기성 종교는 지나치게 ‘기복화’ 되어가고 있다. 대학 입시철만 되면, 족보에도 없는 ‘합격기원제’가 연례행사처럼 열리고 있다. 그들이야말로 세속화 되어가고 있음에도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작금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수년 전의 일이다. 강릉에서의 ‘단오제’는 이제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우리 민족 고유의 행사로 크게 자리잡았다. 그 행사에 강릉시장이 ‘헌관’으로 마땅히 나온다. 그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도, 어느 종교집단이 주축이 된 항의방문단이 강릉시장을 찾아간 것이다. ‘우리도 지방세를 내고 있다. 시장은 왜 우상에게 절을 하러 나가는가?’ 이것이 항의방문한 이유이다.
 
 충남 천안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원래 천안이 생길 때에 하늘에서 오룡이 내려와 놀다가 갔다는 설화가 있었단다. 이에 천안시에서는 천안의 기상을 상징하는 오룡의 조형물을 세우기로 입안하고 예산을 배정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모 종교단체에서 반대운동이 벌어졌다. ‘우리가 낸 세금인 ‘시비’(市費)로 우상의 조형물을 세울 수 없다’고 말이다. 결국은 그 조형물이 세워지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삼척에는 시내 한가운데에 나지막한 ‘봉황산’이 자리하고 있다. 정상에는 시민체육공원이 설치되어 있어 소풍 휴게소로도 그저 그만이다. 그 봉황산 진입로 양쪽에 오래 전부터 장승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어느 날에 보니 장승이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밑둥이 톱질되어 넘어졌고, 자세히 보니 그 톱질한 면이 비에 젖어 검게 썩어 있었다.
 
 그걸 보면 하루아침에 넘어뜨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누군가가 사람이 보지 않는 틈을 타 시나브로 과업(?)을 수행한 것이 분명하다.
 
 누구의 짓이겠는가? 그들은 우리의 문화와 ‘미풍양속’마저 이렇게 거부하며, 더하여 훼손도 마다 않는다. 용감(?)하다! 누구를 탓할 것인가? 모두가 내 탓이요, 우리 모두의 탓이다!
 
 비단 종교뿐만 아니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종교 다 그렇다. 사회 전반이 다 그런 것이다. 이것이 ‘배은망덕’이며 ‘환부역조’가 아닌가! 그래서 필연적으로 개벽이 오는 것이며 우리가 개벽의 시대를 기필코 열어 가는 것이다. 다가오는 개벽의 시대에 나는 어떻게 동참할 것인가!
 
 
 동방에서 새로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 증산도
 우리 증산도는 인류구원의 원대한 포부와 영원불멸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 기성 종교가 남쪽에서 서쪽으로 떨어지는 오후 무렵의 태양이라면, 증산도는 동방에서 새로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이다.
 
 차라리 이렇게도 생각해 본다. 기성 종교에 비해, 우리 증산도의 교세가 아직도 미미하기에 내가 발붙일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아직도 ‘일만이천’의 여백이 남아있기에 얼마나 다행한 것이냐고 말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내가 새 역사의 주역이 되는 것이다. 감사하자!
 
 나는 이제 갓 일어선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신앙의 체험을 말하기에는 수행의 기간이 너무도 미약하다. 그러나 증산도는 ‘우리 하느님’이 계셔서 좋다. 자연섭리에 순응하는 신앙이어서 좋다. 환부역조가 아니어서 더욱 좋다. 자아를 발견하고 자기도야를 실현하는 장場이어서 좋다. 공명정대한 지도자의 가르침이 있어서 좋다. 일꾼들의 ‘군림’이 없어서, 그 고마움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함께 하는 성도들이 ‘본심’이어서 좋다.
 
 
 도장에서의 첫출발은 이미 선경세계
 개벽이 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도장에서의 어우러짐이 바로 상생의 시간이다. 그러니 ‘도문’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이미 선경세계에 와 있는 것 아닌가 말이다!
 
 모사재천(謀事在天) 성사재인(成事在人)이라고 하셨다. 또 천지무일월공각(天地無日月空殼)이요 일월무지인허영(日月無知人虛影)이니라 하셨다. 상제님의 말씀대로 상제님께서 ‘모사’하신 것을 우리의 태사부님과 사부님께서 ‘성사’시키기 위해 이땅에 오셨고, 이 두분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다.
 
 배은망덕만사신(背恩忘德萬死身)이라고 했다. 일심(一心)으로 성경신(誠敬信) 하는 것이다. 상제님과 ‘일심’하는 것이며 태사부님의 가르침에 ‘성경신’하고, 사부님의 뜻에 ‘일심’하면서 또 우리도장 포정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부터 감이수통(感而遂通)한 다음 우리 ‘동해 천곡도장’에 자그마한 기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한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事之當旺은 在於天地요 必不在於人이라
 然이나 無人이면 無天地故로
 天地生人하여 用人하나니
 以人生으로 不參於天地用人之時면
 何可曰人生乎아
 
 일이 흥왕하게 됨은 천지에 달려 있는 것이요
 반드시 사람에게 달린 것은 아니니라.
 그러나 사람이 없으면
 천지도 또한 없는 것과 같으므로
 천지가 사람을 낳아 사람을 쓰나니
 사람으로 태어나 천지에서 사람을 쓰는
 이 때에 참예하지 못하면
 어찌 그것을 인생이라 할 수 있겠느냐!
 (道典 8:100:2)
 
 라고 하셨다.
 
 참, 오늘 아침엔 아버지께 ‘주문’책자를 확대 복사해 드리기로 했다. 이제 바쁘다. 이번 주 토요일에는 입도 준비교육이 있다. 그리고 다음주 23일에는 ‘입도식’이 있다. 시험에 낙방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입도식 전에 『도전』도 정성껏 읽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