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주 천지조화
저우언라이가 털어놓은 진실 본문
《중국의 ‘동북공정’에 참여한 중국 역사학자들은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설정하려 할 뿐만 아니라 고조선과 발해도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설정하려 하고 있다. 역사 진실과는 전적으로 배치되는 황당한 역사왜곡이다. 마침 고(故)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가 이런 유의 역사왜곡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 자료가 있다. 1963년 6월 28일 북한 과학원 대표단이 그를 방문하자 저우 총리는 한중 관계를 세 시기로 구분하면서 ‘두 민족의 역사적 관계’ 시기 중국 문헌 기록은 대국(大國) 쇼비니즘에 빠져 객관성이 결여된 불공정한 기록이 많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역사 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 역사학자나 많은 사람이 대국주의, 대국 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 원인이다. 그리하여 많은 문제가 불공정하게 쓰여졌다. 먼저 양국 민족의 발전에 대한 과거 중국의 일부 학자의 관점은 그다지 정확한 것이 아니었고 실제에 부합하지 않았다.” 동북공정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한민족(韓民族)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단군조선이 아니라 주(周)나라가 책봉했다고 주장하는 소위 ‘기자조선(箕子朝鮮)’이라고 보면서 고조선을 상·주시대의 변두리 정권이라고 입을 모아 주장한다.》
저우 총리는 고조선을 기자조선이라고 보고 조선민족을 기자의 후손이라고 보는 일부 봉건적 중국 학자들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했다. “중국 역사학자들은 반드시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여러분의 머리 위에 조선족은 ‘기자지후(箕子之後·기자의 후손)’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 평양에서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역사왜곡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단 말인가.”
○“수·당의 고구려 공격은 침략전쟁”
동북공정의 역사학자들은 고구려가 조선민족의 고대국가가 아니라 한(漢)족에서 기원한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므로 예컨대 수·당의 고구려 공격도 대외침략 전쟁이 아니라 지방정권을 중국 중앙에 통일시키려는 국내 통일전쟁이라며 심지어 이를 지방정권에 가한 형(刑)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저우 총리는 독립국가 고구려의 강성함과 수·당의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침략전쟁’임을 인정했으며 고구려의 명장이 당나라 침략군을 무찔렀음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진·한 이후 중국이 빈번하게 랴오허(遼河) 강 유역을 정벌했는데 이것은 전쟁이 실패하자 그냥 돌아왔을 뿐이지 분명한 침략이다.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으나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때 여러분 나라(고구려)의 훌륭한 장군(양만춘)이 우리(당나라) 침략군을 무찔렀다.”
동북공정의 중국 역사학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수·당이 고구려를 공격한 이유는 수·당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돌궐도 신복(臣服)했고 서방의 고창(高昌)까지도 신복했는데 오직 고구려만이 신복하지 않고 돌궐과 밀통하므로 그대로 두면 이미 신복한 돌궐, 말갈, 거란, 토욕혼(티베트) 등도 동요할 것이므로 할 수 없이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는 두 가지 점이 특히 주목된다. 하나는 고구려가 수·당의 지방정권이기는커녕 도리어 수·당에 신복하지 않고 대항하므로 수·당이 무력전쟁으로 정복하여 굴복시킬 수밖에 없는 독립국가였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고구려가 당을 침략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중심의 국제질서 편성을 위해 고구려를 신복시키기 위해서 수·당이 고구려를 공격한 것이 명백한 ‘침략전쟁’이라는 사실이다. 저우 총리의 해석이 역사적 진실과 부합한 것이다.
○“발해는 조선민족의 지파였다”
연해주, 베트남 등과 함께 한국을 되찾아야 할 고토(古土)로 표시한 1950년대 중국 교과서 지도. 사진 출처 ‘대쥬신을 찾아서’(해냄) |
저우 총리는 발해에 대해서도 “징보(鏡泊) 호 부근은 발해의 유적이 남아 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라며 “발해는 조선민족의 한 지파였다”고 밝혔다.
중국 측 자료인 ‘구당서’ 발해말갈전에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라는 설명과 ‘신당서’ 발해전에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 고구려에 부속한 것으로서 성은 대(大)씨다(渤海本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라는 기록의 선택의 문제가 논쟁의 핵심이다.
한국 측은 ‘구당서’를 중시하여 대조영을 고려의 별종(지파)이라고 해석했다. 반면에 동북공정 논자들은 ‘신당서’를 중시하여 대조영을 속말말갈인이라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당시의 기록이 중요한데 다행히 신라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에 ‘발해의 원류는 고구려 말기 멸망 때 본래 (고구려의) 우취부락에서 나온 것이다(渤海之源流也 句麗末滅之時 本爲우贅部落)’라고 발해와 대조영이 고구려 우취부에서 기원한 것임을 명백히 밝혀 놓았으니 대조영은 고구려 계보인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성 무단(牧丹) 강 상류의 호수인 징보 호 부근에서 발굴된 발해국 유물이 고구려 계보라는 점에서 발해는 조선족의 지파라고 판단한 저우 총리의 견해가 진실과 합치하는 것이다.
○“만주는 오랫동안 조선족의 활동 무대였다”
중국 동북공정 논자들은 만주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임에 기초하여 거슬러 올라가서 만주를 중국의 전통 강역이라고 주장한다. 또 이 중국 전통 강역에서 형성돼 활동한 민족과 국가는 모두 중국의 지방정권이고 통일적 다민족국가인 중국의 변경 소수민족이라고 강변한다. 이것은 현재 영토가 과거 역사 및 민족에 의해 결정된다는 참으로 어이없는 소아병(小兒病)적 사고다.
저우 총리에 의하면 동북지방(만주)은 중국의 전통 강역이 아니었다. 그것은 주로 조선민족과 만주족의 강역이었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기로 한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 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 왔다. 랴오허, 쑹화(松花) 강 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이것은 랴오허 강과 쑹화 강 유역, 투먼(圖們) 강 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 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 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 있다.”
저우 총리는 동북(만주)이 중국에 속하게 된 것은 만주족이 (최후로 청나라) 조선민족을 압록강 두만강 동쪽(한반도)으로 밀어낸 후에 만주족이 중국의 일부가 된 이후(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부터라고 보았다. 그 이전에는 만주는 조선민족의 거주 강역과 활동 무대였다. 그의 설명을 길게 인용한다.
“만주족 통치자는 당신들(조선민족)을 계속 동쪽으로 밀어냈고 결국 압록강 두만강 동쪽까지 밀리게 됐다. 만주족은 중국에 공헌한 바가 있는데 바로 중국 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 만주족 이전, 원나라 역시 매우 크게 확장했지만 곧바로 사라졌기 때문에 논외로 치자. 한(漢)족이 통치한 시기에는 국토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조선민족)의 땅을 밀어붙여 작게 만들고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사과해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두만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 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
중국의 이러한 대국 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朝貢)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 교류를 할 때도 그들은 알현(謁見)하러 왔다고 했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臣服)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들의 붓 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
중국 동북공정 역사학자들은 중국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헌신한 저우 총리의 가르침을 따라 배워서 깊이 반성하고 황당무계한 동북공정의 역사왜곡을 즉각 폐기 시정해야 할 것이다.
(저우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는 현재 판매되는 ‘주은래 선집’에는 빠져 있고 이경일 편저 ‘다시 보는 저우언라이(2004년)에 수록돼 있다.)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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