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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잊혀진 역사

이토 얼굴도 몰랐던 안중근, 어떻게 죽였을까

세덕 2013. 3. 26. 16:44

이토 얼굴도 몰랐던 안중근, 어떻게 죽였을까

 안중근.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의 순국 103주년이 되는 날이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의 목숨을 거두고 붙잡힌 뒤, 5개월 뒤인 1910년 3월 26일 여순(뤼순) 감옥에서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살해(사형집행)당했다.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에서 회고한 바와 같이, 안중근은 1894년에 아버지와 함께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데 가담했다. 안중근 부자가 이끄는 진압군(의용군)이 백범 김구가 이끄는 황해도 동학군과 충돌할 뻔했다는 이야기가 <백범일지>에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응칠(應七)은 안중근이 성인식(관례) 때 받은 이름인 자(字)다. 배와 가슴에 검은 점이 일곱 개 있다고 해서 그런 '자'를 받았다.

반외세·반봉건 항쟁인 동학농민전쟁에 대항했다는 점에서 보면, 안중근은 부정적 평가를 받을 소지가 있다. 하지만 그는 그 후 일제에 대한 투쟁에 나섰고, 하늘 높이 치솟던 일제의 발악에 경종을 울렸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적 인물로서, 동아시아 변방이었던 일본을 세계 정상급으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일본은 그의 주도 하에 오키나와왕국을 강점하고 청일전쟁·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뒤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했다.

특히 1904~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 하에 세계 최강 러시아마저 격파했다. 당시 러시아는 영국과 더불어 세계정치의 양대 산맥이었다. 이 정도면, 일본 근대사에서 이토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뜨리고 일제의 발악에 경종을 울린 인물이 서른한 살 청년 안중근이다. 무명의 조선 청년이 제국주의 일본의 기수에게 일격을 가했으니, 다윗이 골리앗을 무너뜨린 일을 연상케 할 만하다. 한 인간을 평가할 때는 최후의 모습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므로, 안중근은 동학전쟁 당시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한국 근대사의 영웅으로 칭송되기에 충분하다.

"성질이 가볍고 급한 편이므로 이름을 '중근'이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의 목숨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는 강렬한 민족주의 정신 때문이었고, 이차적으로는 의협심과 사격 솜씨 때문이었다. 이런 요인들과 함께, 거사 성공에 크게 기여한 또 다른 요인이 있다. 그것은 그의 급한 성격이었다.

안중근은 <안응칠 역사>에서 "성질이 가볍고 급한 편이므로 이름을 중근이라" 했다고 말했다. 그런 성격을 억누르라는 의미에서, 형제들의 돌림자인 뿌리 근(根)의 앞에 무거울 중(重)을 더했던 것이다. 이 점을 보면, 중근이란 이름은 그의 성격이 어느 정도 형성된 뒤에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토 히로부미.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일본어판

 

안중근의 급한 성미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안응칠 역사>에 따르면, 10대 후반에 노루 사냥을 하다가 총알이 총구멍에 걸린 일이 있었다. 총알이 빠지지 않자, 그는 쇠꼬챙이를 총구멍에 넣고 마구 쑤셔댔다. 그러고는 쾅 소리와 함께 기절했고, 깨어나 보니 쇠꼬챙이와 총알이 오른손을 뚫고 공중으로 날아간 뒤였다.

이 정도로 성격이 급했지만,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때는 이런 성격이 오히려 도움이 됐다. 뒤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이런 성격은 상대방을 확실히 처단하는 데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거사 직전까지도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다. 10월 26일 아침 하얼빈역에 도착한다는 점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진짜 중요한 것은 빠뜨린 상태였다. 이토의 얼굴을 사전에 확인해두지 않은 것이다. 급한 마음에,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하얼빈에 갔던 것이다.

<안응칠 역사>에 따르면, 거사 이틀 전인 10월 24일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모레 아침 여섯 시 쯤이면 아직 날이 밝기 전이니, 이토가 반드시 정거장에 내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 설사 차에서 내려 시찰한다 하여도, 어둠 속이라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분간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내가 이토 히로부미의 모습을 모르는데, 어찌 능히 일을 완수해낼 수가 있을 것이랴.'

이에 따르면,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모르는 상태에서 하얼빈에 갔다. 참고로, 그는 이토가 10월 26일 오전 여섯 시에 도착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토는 실제로는 오전 아홉 시에 도착했다. 도착 시각이 변경된 듯하다. 거사 당일, 안중근도 일곱 시에 역에 도착했다.

얼굴도 모르고 암살에 나선 안중근, '손님'이 도착하자...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 거사에 나섰지만, 이런 중에도 안중근은 낭만을 잃지 않았다. 이 점은 그가 10월 23일 하얼빈의 여관방에서 시 한 수를 지은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한문으로 된 그의 시를 현대적인 언어로 번역했다.

대장부가 세상에 삶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만들고, 영웅이 때를 만든다.
(중간 생략)
쥐도둑놈 이토여! 어찌 나와 삶을 같이하랴.
이렇게 되리라고 네가 예측이나 했겠느냐!
상황은 이미 확실해졌다.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루자!
만세! 만세여! 대한 독립이로다.
만세 만만세여! 대한 동포로다.

이 시에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상대로 "어찌 나와 삶을 같이하랴. 이렇게 되리라고 네가 예측이나 했겠느냐!"라며 "상황은 이미 확실해졌다"고 호언장담했다. 상대방의 몽타주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넌 확실히 죽었다'라는 시를 쓴 것이다. 그는 이렇게 시 한 수와 권총 한 자루만 확실하게 준비한 상태에서 무작정 하얼빈역에 나갔다. 그는 꽤 낭만적인 사나이였다.

안중근은 10월 26일 아침 7시에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역은 아침부터 러시아 군인들로 북적거렸다. 그는 역전 다방에 들어가서 차를 두어 잔 마시면서 '손님'을 기다렸다.

<안응칠 역사>에 따르면,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열차는 오전 9시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군악대 소리가 울려 퍼지고 기차 안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이 장면을 본 안중근은 찻집을 나와 역 앞으로 전진했다.

기차에서 나온 이토 히로부미 일행과 안중근의 거리가 열 걸음 정도 됐을 때였다. 그때까지도 그는 이토의 얼굴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그는 맨 앞의 사람을 이토로 단정하고 네 발의 총알을 발사했다. 이렇게 많은 총알을 발사한 것은 이토의 모습을 몰랐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해두자는 차원에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맨 앞의 사람에게 네 발을 쏘고 난 뒤, 그는 걱정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의심이 머릿속에서 일어났다. 내가 본시 이토 히로부미의 모습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안응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사람의 뒤쪽을 향해 세 발을 더 발사했다. 자신의 급한 성미 때문에 일을 그르쳤을까봐, 확실히 하고자 세 발을 더 쏜 것이다.

급한 성격 때문에 '결정적 순간'에 침착할 수 있었던 안중근

이렇게 일곱 발이나 발사한 뒤에도 그는 의심이 가라앉지 않았다. 혹시 죄 없는 사람을 죽인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몇 발 더 쏠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헌병들에게 붙잡혔다. 이 상황이 <안응칠 역사>에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또 다시 생각하니, 만약 죄 없는 사람을 잘못 쏘아 다치게 했다면 잘된 일은 아니다, 라며 잠간 주춤하며 생각하는 사이에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혔다.

평소에 그렇게 성급했던 안중근은 이 순간만큼은 고도의 침착성을 유지했다. 그는 네 발을 쏜 뒤에도 잠깐 생각했고, 세 발을 더 쏜 후에도 또 생각했다. 자신의 급한 성격에 대한 염려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는 오히려 침착했던 것이다.

처음 네 발 중에서 세 발은 이토 히로부미에 정확히 명중했다. 누군지 모르고 쐈지만, 그게 이토였던 것이다. 그 네 발 중에서 네 번째는 이토의 뒤에 있던 일본인을 쓰러뜨렸다. 나중에 쏜 세 발 중에서 두 발도 일본인들을 쓰러뜨렸다. 이렇게 해서 이토 외에 일본인 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일곱 번째 총알은 불발이었다. 그래서 실제 발사된 총알은 여섯 발이었다.

만약 안중근이 평소 치밀하고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면, 처음부터 이런 위험한 일에 나서지 않았을 수도 있다. 또 그런 성격이었다면, 결정적 순간에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여러 발의 총알을 더 발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세 발이나 맞고 확실하게 쓰러진 것은 안중근의 성격 때문이었다. 성급한 성미 때문에 혹시라도 실수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결정적인 순간에 안중근을 신중하게 만들었고, 이것이 그의 의거를 성공으로 이끈 요인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