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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학을 바로 세운 미수 허목

세덕 2013. 5. 22. 13:19

민족사학을 바로 세운 미수 허목

민족사학을 바로 세운 미수 허목


 글·정형석(서울 강남도장)
 
 허미수는 누구인가?
상제님께서는 천지공사를 보시면서 천하의 지령지기(至靈之氣)를 타고난 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공사에 쓰셨습니다. 그 중에 궁금증을 유발하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미수야, 우암을 잡아오너라.”는 말씀의 주인공인 미수 허목(許穆)입니다. 상제님께서는 그 많은 조선시대의 유학자들 중에 왜 하필이면 허목의 기운을 천지공사에 쓰셨을까요?
 
우리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에 대한 대립각으로 허미수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상제님께서 허미수를 천지공사에 쓰신 깊은 이유가 담겨져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허미수의 진면목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호는 미수(眉?), 이름은 목(1595∼1682: 선조 28년∼숙종 8년). 그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학자이자 남인(南人)의 영수로 서인(西人)이던 우암 송시열과 벌어진 예론(禮論) 관련 논쟁으로 유명합니다.
 
학(學)·문(文)·서(書)의 3고(三古)라 불렸으며, 특히 전서(篆書)는 동방 제1로 칭해집니다. 56세인 1650년(효종 1년)에 처음으로 관직에 올랐으며, 1660년 효종의 상에 인조의 계비(繼妃)인 조대비의 복제(服制)로 일어난 제1차 예송(禮訟)에서 송우암의 기년설(朞年說;1년설)에 반대하여 3년 상을 주장하다 서인의 반격으로 삼척부사로 좌천됩니다.
 
1674년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에 다시 조대비의 복제가 문제되자 서인의 대공설(大功說;9개월)에 반대하여 기년설을 주장한 제2차 예송에서 승리하여 대사헌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이조참판, 우의정을 지냈고, 송우암 처벌에 강경론을 내세워, 온건론을 편 같은 남인인 허적(許積)과 반목하여 청남(淸南)의 영수가 됩니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煥局)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삭탈관직을 당하고 고향에서 은거하게 됩니다. 저서로는 『동사(東事)』, 『미수기언(眉?記言)』, 글씨로는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가 있고 그림으로 <묵죽도(墨竹圖)> 등이 전합니다.
 
 
집안의 화를 예지했던 허미수
흔히 허미수를 유학자로만 알고있는데 한편으로 그는 도력이 높은 이인(異人)으로도 전해집니다.
허적1) 의 탄생과 관련하여 허미수의 선견지명을 보여주는 한 일화가 전해집니다.
1)허목과 허적은 같은 양천 허씨로 12촌지간이다.
 
허미수는 한집안 사람인 허적의 아버지와 한때 절에서 함께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절에서는 매월 보름이면 스님이 한 명씩 없어졌습니다. 허적의 아버지가 살펴보니 이무기가 나타나 스님을 잡아먹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안 허적의 아버지가 이무기를 칼로 죽이자 이무기의 기운인 파란 줄기가 그의 집으로 뻗치고 들어갔습니다. 허미수는 그것이 상서롭지 못한 조짐이라고 판단하여 그 집에서 아들을 낳는 족족 없애도록 충고했습니다.
 
허적의 아버지는 그의 충고를 따라 두 아이를 없앴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태어난 아이가 ‘허적’이었는데, 허미수는 그 아이가 허씨 가문의 멸족을 초래할 것으로 예견하고 죽이려 했으나 허적의 아버지는 더는 죽일 수 없노라며 아이를 살려두었습니다. 그러나 허미수는 그 아이로 인한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미리 알고 친척간에 파적(破籍)하였다고 합니다. 허적은 아주 뛰어난 신동이었으나 훗날 결국 역적이 되어 허씨 가문에 화를 입히게 됩니다.
 
 
허적은 허미수와 함께 후에 남인을 영도하여 서인인 송우암을 공격하였는데, 허미수는 강경한 입장을 띤 데 반해 허적은 온건한 입장을 견지하여 둘의 사이가 벌어집니다.
 
허적과 갈등을 겪은 허미수는 1678년(숙종 4년)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어 당시 우의정이던 허적과 그의 아들 허견(許堅)의 실정과 죄상을 논핵하다 왕의 노여움을 삽니다. 이를 계기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허미수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이를 볼 때, 허적에 대한 설화는 이무기를 죽이고 나서 그 척(隻)으로 허씨 집안에 화가 미칠 것을 예측한 허미수의 선견지명을 잘 보여줍니다.
 
 
‘장차 앞으로 큰 해일이 오면 그때는 이곳을 떠나라’
그런데 허미수의 예지능력은 강원도 삼척시에 있는 영험한 <척주동해비>를 통해서 최근에 더욱 부각되고 있습니다.
 
당시 삼척은 폭풍과 해일 피해가 잦아서 고기잡이배가 다 부서졌을 뿐만 아니라, 파도 때문에 바닷가에 나가지 못하여 어민들이 굶어죽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였습니다. 해일이 몰려올 때는 오십천(五十川)을 거슬러 올라 바닷가로부터 30리 가량 떨어진 거리에 있는 동헌마루까지 바닷물이 밀려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에 허미수가 돌에다가 직접 글씨를 써서 바닷가에 비석을 세우자 신기하게도 그 이튿날부터 물이 평소의 3분의1밖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 다음날에는 비석이 묻힌 주춧돌까지만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바닷물의 침수피해를 입었던 곳까지도 백성들이 논밭을 만들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허미수가 삼척을 떠난 뒤 반대파인 노론계의 인물이 신임부사로 왔는데, 그는 그 비석의 내력을 듣고 허무맹랑하다고 여겨 비석을 깨뜨려 버립니다. 그러자 다시 풍랑과 해일이 몰려왔고, 당황한 신임부사는 다시 비석을 세우려 했는데 허미수는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또 하나의 비석을 만들어 두어서 그 비석이 오늘날까지 유명한 ‘삼척 동해비’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허미수가 이 비석에 새긴 문장을 일컬어 ‘동해송(東海頌: 동해바다를 예찬한 글)’이라고도 하는데, 육경(六經)에 뿌리를 둔 것으로 도가(道家)적이며 주술적인 비유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편 허미수는 이 비석을 세우면서 ‘지금 같은 작은 해일은 내 비로 막을 수 있지만 장차 앞으로 큰 해일이 오면 내 비석으로도 막을 수 없으니 그 때는 이곳을 떠나라’고 경고하면서 ‘앞으로 불(火)로 난리가 난 후에 물(水)로 큰 난리가 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5년 전인 2000년 4월부터 강원도 고성, 강릉, 삼척 등 영동지방에 해마다 대형산불이 일어나고 있으며, 최근에는 동남아시아에서 일어났던 초대형 쓰나미가 동해안에서도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지축이 서는 후천개벽이 일어나면 일본열도는 초대형 지진으로 태평양으로 대부분 가라앉게 되고 그 여파로 대형 쓰나미가 우리나라 동해안으로 몰려올 것은 자명합니다.
 


 

▲ 척주동해비. 허미수가 삼척부사 재임시절 동해의 해일로 인한 바닷가 마을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1661년에 높이 170㎝, 너비 76㎝의 검은색 오석(烏石)으로 만들어 삼척 정라진(汀羅津) 앞 만리도(萬里島)에 세웠던 것인데, 그 후 비가 파손되어 현재의 정라동 육향산(六香山)에 다시 세워졌다.
 
 
허미수는 이미 그러한 일을 예견하면서 비석을 세웠던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유학자이자, 전국의 명산대천을 돌아다니며 도가의 인물들과도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기인으로서 그의 풍모를 보여줍니다.
 
『도전』에서도 상제님께서 공사 중에 허미수가 강선루를 하루만에 지었음을 슬쩍 비쳐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루는 말씀하시기를
 “새 세상이 오면 서울이 바뀌게 되느니라.
 큰 서울이 작은 서울이 되고, 작은 서울이 큰 서울이 되리니 서울은 서운해지느니라.
 허미수는 하루만에 강선루를 지었다 하나 나는 하루만에 36만 간 옥경대를 짓느니라. 금강산 구룡폭포의 금이 서해바다에 와
 묻혔나니 장차 36만 간 옥경대의 상량이 되리라.” 하시니라.
(道典 5:136)

 
 
민족사학을 바로 세우고자 했던 허미수
무엇보다 『도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상제님께서 송우암과 함께 허미수를 천지공사에 쓰시는 내용입니다.
 
죽은 아들을 살려주십사하고 간청하는 한 여인의 절박한 호소를 딱하게 여기시어 아이를 살려주시는 상제님. 그런데 그 공사과정에서 상제님께서는 느닷없이 “미수야, 우암을 잡아오너라.” 하고 허미수 신명에게 명을 내리십니다. 상제님께서 왜 하필이면 허미수를 시켜서 우암 송시열을 잡아오라 명하셨을까요?
 
구릿골에서 술장사하는 김사명의 아들 성옥이 어느 날 급증에 걸려서 나흘만에 죽거늘 한나절이 넘도록 살리려고 백방으로 주선하여도 회생할 여망이 없는지라. (중략)
상제님께서 차마 보지 못하시고 죽은 아이를 무릎 위에 눕혀 배를 만져 내리시며 허공을 향하여 큰 소리로 “미수야, 우암을 잡아오너라.”하고 외치신 뒤에 모과를 씹어 그 즙과 함께 침을 흘려서 죽은 아이의 입에 넣으시니 아이가 문득 항문으로 추깃물을 쏟거늘, 상제님께서 “나가서 회초리 하나 끊어 오라.”하시어 회초리로 아이의 종아리를 탁탁 때리시매 죽었던 아이가 크게 소리를 지르며 홀연히 살아나더라.
(道典 4:124)

 
 
물론 김사명의 아들의 급증과 비슷한 병을 앓았던 송우암에게 독약을 줘서 낫게 했던 허미수. 그의 기운을 붙여서 죽은 아이를 살리신 상제님의 그 뜻을 우리가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런데 뭔가 더 깊은 뜻이 있지 않을까요?
 
여기서 허미수의 역사의식을 알면 그 공사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허미수가 살아가던 17세기의 조선후기는 임진왜란의 후유증으로 백성들이 권력을 잡은 유학자들에 대한 정치적 신뢰가 떨어지던 시대였습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서인들을 중심으로 한 주류 유학자들은 망한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의식으로 뭉친 중화주의 이념을 조선사회에 철저하게 강요하기 시작합니다.
 
유교 근본주의적인 사림들에 의해 주자성리학적 정통론에 입각한 역사서가 강요되었으며, 성리학의 토착화 과정에서 조선에 중국문화를 전한 기자를 성현으로 높여 추앙했고, 기자를 기자조선·삼한·삼국·신라·고려로 이어지는 정통론의 입장에서 그 중심에 놓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소수의 신흥 비주류 지식인들은 주체적인 한민족의 민족주의 역사관의 창립을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민족주의 의식이 있는 비주류 유학자들은 단군조선을 역사적으로 부각시켜 단군조선·삼한·삼국·신라·고려·조선으로 한민족의 정통이 이어짐을 명확히 합니다. 그들은 단군을 요순(堯舜)에 대치시켜 단군조선의 계보를 정립함으로써 단군조선을 요순시대와 함께 존재했던 이상사회로 높이고 조선문화의 기원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주장합니다.
 
주로 남인과 북인계열의 학자들이 그러한 주장을 했는데, 허미수 역시 1670년대에 『동사(東事)』2) 라는 역사서를 써서 단군조선에 대한 그의 주장을 펼칩니다. 허미수는 그가 당시 정권의 주요 실세였던 남인의 영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비주자학적 입장에서 우리민족을 중국과 구별하면서 단군을 민족의 수장으로 내세우는 ‘자주적 단군문화 정통론’을 추구하였습니다.
2)동사는 단군세가 (부여열전, 숙신씨열전, 기자열전, 위만세가, 사군이부, 삼한열전), 신라세가 (가락열전, 대가야열전), 고구려세가, 백제세가 (예맥열전, 말갈열전, 모라열전), 흑치열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가 서술한 『동사』는 기존의 중화사대주의적인 사서들과는 상당히 다른 세 가지의 서술형태를 보여줍니다.
 
첫째, 한국사의 첫머리로 단군세가(檀君世家)를 내세워 단군조선이 우리역사의 기원임을 분명히 하고 조선을 중국과는 다른 또 하나의 독립된 천하질서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즉 한민족문화의 **을 신시(神市)까지 소급시키면서 신시와 단군의 시대는 중국의 제곡, 당우시대와 자웅을 겨뤘다고 주장하면서 환인-신시-단군으로 이어지는 상고사 계통을 확립합니다.
 
둘째, 그는 숙신, 예맥, 말갈 등 백두산 북쪽의 족속과 부여, 고구려, 백제 등을 모두 함께 단군의 후손으로 인정하여 후에 20세기 초의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에 영향을 줍니다. 이같이 부여계 국가들을 단군의 후예로 보는 시각은 고려말 이승휴의 『제왕운기』와 조선 세조 때 권람의 『응제시주』에만 보이던 것인데, 허미수가 이를 다시 받아들임으로써 조선조 사서류에서 단군**의 역사인식을 낳은 선구적인 작업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셋째, 그는 당시 유가들이 신화적인 요소를 황당하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배척한 것과는 달리 단군의 신이성(神異性)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단군의 순방한 정치가 1천 년간 지속되었다면서 이상정치의 연원을 요순이 아닌 단군 통치시대에서 찾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인식을 보여주는 허미수의 『동사』는 후에 민족주의 학자들의 역사관의 틀을 잡아주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숙종 말년에 소론 학자 노촌 임상덕(1683∼1719)은 1710년대에 『동사회강(東史會綱)』을 써서 고대 한민족의 강역(江域)과 단군에 대한 사실을 고증하였고, 성호 이익(1681∼1763)은 ‘삼한정통론’을 지지하면서 정통의 시작을 단군으로부터 삼았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제자인 순암 안정복(1712∼1791)에게 전수되어 기자 이전에 단군시대부터 이미 원형의 유교문명이 시작된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허미수의 영향을 받은 담헌 홍대용(1731∼1783) 이후 북학사상가들은 ‘조선=중화’라는 역사인식을 부정하는 ‘역외춘추론(域外春秋論)’을 표방하고 ‘조선=동이’라는 역사인식을 확립해갑니다. 이에 따라 화이론적인 정통론에 입각한 역사인식은 부정되고 오히려 그동안 정통에서 제외되어 연구되지 않았던 발해왕조가 북학사상가들의 연구대상이 되면서 옥유당 한치윤(1765∼1814)의 『해동역사(海東歷史)』에서는 우리나라 왕조 중의 하나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인식은 다시 근대 민족주의 학자들인 신채호, 정인보 등의 역사인식에 영향을 주게 되고 오늘날 현대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관의 시금석이 됩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유교사대주의에 매몰되었고, 일연의 『삼국유사』는 불교주의에 빠졌지만 허미수의 『동사』는 도가적인 입장에서 우리 역사 고유의 정통성을 복구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 허미수 묘역 경기도 연천군 소재
 
 
 상제상제님께서 허미수를 부르신 이유
다시 상제님의 공사정신으로 돌아와서 허미수와 송우암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송우암은 상제님께서도 인정하실 정도로 지령지기(至靈之氣)를 타고난 기운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대적인 중화사대의자였습니다. 그는 말년에 중국인처럼 옷을 입고 중국식으로 살아가는 등 원시반본 정신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런 업보로 송우암의 자손들은 대대로 자손줄이 끊어져서 양자를 들인다고 합니다.3)
3)송우암은 자신의 둘째 형님으로부터 대를 이을 양자를 들인 이후로 송우암의 집안은 직계자손의 줄이 끊어져서 7명(8대~13대)을 내리 양자로 들인다.
 
상제님께서는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역사적 인물들의 기운을 천지공사에 쓰셨습니다. 허미수는 비록 겉으로는 유학자였지만 한민족으로서의 자아정체성을 찾으려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허미수와 송우암은 당시 통상적인 정치적 라이벌이었지만 한편으로 두 사람의 대결은 올바른 한민족 역사의 원시반본을 추구하는 정신과 중국 중심의 존화사대주의 정신간의 대결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상제님께서 허미수를 시켜서 송우암을 잡아오라하심은 왜곡된 역사정신에 의해 타락한 조선민족을 허미수의 기운으로 올바른 원시반본의 역사정신으로 회복하게 하려는 상제님의 깊은 뜻이 숨어있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참고문헌>
 조용헌 ‘척주동해비’ 조선일보 2005년 1월 5일
 한영우 『조선후기사학사연구』 일지사 1989
 허 목 『眉?記言』
 허 목 『東事』
 양천 허씨(陽川許氏) 족보
 은진 송씨(恩津宋氏族譜) 족보
 인터넷 야후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