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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을주 천지조화

<선각대사비의 증언 궁예는 폭군인가?> 본문

역사 이야기/잊혀진 역사

<선각대사비의 증언 궁예는 폭군인가?>

세덕 2013. 5. 27. 17:44

 

선각대사비의 증언 궁예는 폭군인가?

선각대사비의 증언 궁예는 폭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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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각대사비의 증언 궁예는 폭군인가?>

무위사 선각대사비문의 재해석으로 새롭게 밝혀진 궁예와 왕건의 비밀. 한반도 중원을 장악하고도 역사 속에서 철저히 무시당한 비운의 제왕, 궁예. 그는 왜 포악무도하게 그려질 수밖에 없었는가? 베일 속에 가려진 ‘미치광이 폭군’ 궁예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친다.

<두 얼굴의 궁예, 그는 과연 폭군이었을까?>
궁예는 신비로운 인물이다. 기록은 얼마 없고, 그마저도 부정적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역사 속 궁예는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미치광이 폭군’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최근 궁예에 대한 기존의 학설을 뒤집는 단서가 발견됐다. 전라남도 강진 무위사에 세워진 선각대사비에는 베일에 싸인 궁예의 행적이 담겨 있다.
왕건의 지시로 선각대사 형미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비문엔 <삼국사기>, <고려사>로만 전해졌던 후삼국 통일과 고려 건국의 비화가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왕을 지칭하는 표현이 나오는데 금상(今上)과 대왕(大王)이다. 금상은 현재의 왕인 왕건을 가리키는 것. 논란이 되고 있는 표현은 대왕(大王)이다. 그간 일반적으로 대왕을 왕건으로 해석해왔다. 그런데 최근 목포대 최연식 교수가 이 해석을 뒤집었다. 대왕이 궁예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비문에 따르면 대왕이 912년 나주를 공격했다고 한다. 비문의 또 다른 표현, 나주귀명(羅州歸命)도 이 해석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로써 왕건이 고려를 창건하는데 초석이 된 ‘912년 나주공략’은 궁예의 지휘 아래 이뤄졌음이 새롭게 밝혀졌다.

<912년 나주 경략(經略)은 궁예가 주도했다.>
나주경략은 후삼국 통일의 핵심이다. 왕건은 912년 나주를 점령하고, 이 성과를 기반으로 승승장구한다. 그리고 마침내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다. 나주 정벌은 곧 왕건의 정치, 군사적 역량을 의미한다. 그러나 선각대사비는 궁예가 직접 나주 경략을 지휘했다고 입증한다. 후삼국 통일의 주역이 바뀌는 셈이다.
당시 이미 한반도 중원을 차지하던 궁예가 나주까지 손에 쥐면서 삼한의 절반을 장악하는 대업을 이룬 것이다.

<궁예는 왜 미륵신앙과 관심법에 빠져들었나?>
궁예는 말년으로 갈수록 미륵신앙에 심취한다. 스스로 미륵불을 자처하며 관심법을 이용해 공포 정치를 실시한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부인과 두 아들을 살해하는 비극을 저지른다.

“의심이 많아지고, 화를 급하게 내어 모든 관료, 장수, 아전들과 아래로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 없이 죽음을 당하는 경우가 매우 자주 있었다”
                        -『삼국사기』중에서

그러나 선각대사비의 새로운 해석에 따르면, 당시 선종의 고승 선각대사 형미는 궁예의 최측근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당나라에서 10년 간 유학하고 돌아온 선각대사를 눈여겨보고 그를 철원으로 초빙한다. 궁예가 후삼국시대 큰 사상적 영향을 미친 선종불교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 또한 이번에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왕건에 의해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것을 우려해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지만 이 과정에서 신하와 백성은 그에게 등을 돌린다.

<‘담대한 정복 군주’, 궁예의 재발견!>
궁예의 최후는 비참했다. 왕건에게 내몰리고, 믿었던 부하들의 모반으로 끝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보리이삭을 훔쳐먹다 부양백성에게 살해되다”
                          -『고려사』중에서

<삼국사기>와 <고려사>는 왕건에 초점을 맞춘 역사서다. 때문에 궁예가 한반도의 중원을 차지하고, 서남해 지역을 장악한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궁예가 적어도 선각대사비에 따르면 고려 초까지는 ‘대왕’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다. 목포대 최연식 교수는 궁예의 업적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를 대왕으로 존칭했다고 해석한다.
<역사스페셜>은 이번 선각대사비문의 재해석을 통해, ‘폭군’이 아닌 ‘정복 군주’ 궁예를 재조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