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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주자(朱子)가 되기를 꿈꾼, 우암 송시열 본문

역사 이야기/잊혀진 역사

조선의 주자(朱子)가 되기를 꿈꾼, 우암 송시열

세덕 2013. 6. 13. 12:19

조선의 주자(朱子)가 되기를 꿈꾼, 우암 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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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전후한 조선사회는 국가적인 위기상황을 타개하고 조선 백성에게 새 희망을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 새로운 대안이 절실히 필요한 때였다. 그러했기에 성리학 이념을 정치로 이화시키고자 뭉친 붕당들간의 격돌과 대립이 불가피했으며,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의견 개진과 첨예한 논쟁이 있었던 시기였다.

173송시열, 전환시대의 중심 인물
그 당시 전환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단연 우암 송시열을 꼽을 수 있다. 그는 100년 이상 지속된 긴 대립의 양상 속에서 가장 오랜 정치 생명을 유지했으며 학문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우암 송시열은 이 예학을 실제 정치 현실에 적용시킨 인물로 사후(死後)에 그는 유가의 성인에게 붙이는 자(子)가 붙여져 송자(宋子)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조선 문명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그는 당쟁을 조장한 인물로 회자되고 있으며, 그를 이야기할 때 ‘소인배에게 보내는 공허한 찬사’라고 까지 표현될 정도로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린다.

송시열은 1635년에 봉림대군(뒤에 효종)의 스승인 사부(師傅)관직으로 출발하여 이율곡의 계열인 서인의 영수로서 한평생 그의 이념을 실천하고 반대파들로부터 사상을 지키는 완고한 인생을 살다갔다. 그는 주자(朱子)를 신앙으로 삼을 정도로 ‘주자제일주의자’였다. 송시열이 항상 주자를 입버릇처럼 되내이자, 효종이 “경은 말마다 옳은 이가 주자이며, 일마다 옳은 이가 주자이십니다”라고 답변할 정도였다고 한다. 송시열은 주자의 남송시대가 자신의 시대와 유사하다고 믿었으며, 명나라를 문명의 종주국으로 높이면서 청나라를 치기 위한 북벌론을 효종과 도모한 것으로 유명하다.

송시열과 허미수의 예송(禮訟) 논쟁
송시열에 관한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은 예송(禮訟)논쟁이라 불리우는 궁중의례에 관한 문제였다.

둘째 아들로 태어난 왕(효종)을 서자로 보느냐, 아니면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특별히 장자로 대우하느냐의 선택을 두고(그에 따라 상복을 입는 기간이 다르다) 남인과 서인은 첨예하게 대립하였는데, 효종이 세상을 떴을 때 벌어졌던 1차예송 때(서기 1659년) 송시열이 제시한 서자론을 반박한 인물이 바로 남인의 영수인 허미수(許眉受)이다. 1차 예송 논쟁 후, 15년 뒤에 효종의 비(인선왕후)의 국상(國喪)을 치룰 때에야 비로소 이 논쟁이 매듭이 지어지게 된다.

허미수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학자이자 남인(南人)의 영수로 송시열과 벌인 예론(禮論) 논쟁의 또다른 주인공이다.

175


허미수가 살아가던 17세기의 조선후기는 임진왜란의 후유증으로 백성들의 유학자들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던 시대였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서인들을 중심으로 한 주류 유학자들은 망한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의식으로 뭉친 중화주의 이념을 조선사회에 철저하게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바로 송시열이었다.

그 일환으로 주자성리학적 정통론에 입각한 역사서가 강요되었으며, 성리학의 토착화 과정에서 조선에 중국문화를 전한 기자를 성현으로 높여 추앙했고, 기자를 기자조선·삼한·삼국·신라·고려로 이어지는 정통론의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소수의 신흥 비주류 지식인들은 주체적인 한민족의 민족주의 역사관의 창립을 고민하기 시작하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허미수이다. 허미수를 비롯한 민족주의 유학자들은 단군조선을 역사적으로 부각시켜 단군조선·삼한·삼국·신라·고려·조선으로 한민족의 정통이 이어짐을 명확히 하였다. 그들은 단군을 요순(堯舜)에 대치시켜 단군조선의 계보를 정립함으로써 단군조선을 요순시대와 함께 존재했던 이상사회로 높이고 조선문화의 기원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허미수 역시 1670년대에 『동사(東事)』라는 역사서를 써서 단군조선에 대한 그의 주장을 펼치는데, 당시 정권의 주요 실세였던 남인의 영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비주자학적 입장에서 우리민족을 중국과 구별하며 단군을 민족의 수장으로 내세우는 ‘자주적 단군문화 정통론’을 추구하였다.

허미수와 송시열은 당시 통상적인 정치적 라이벌이었지만 한편으로 두 사람의 대결은 올바른 한민족 역사의 원시반본을 추구하는 정신과 중국 중심의 존화사대주의 정신간의 대결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허미수의 역사관
허미수가 쓴 『동사(東事)』는 기존의 중화사대주의적인 사서들과는 상당히 다른 역사인식을 보여준다.

 

첫째, 한국사의 첫머리로 단군세가(檀君世家)를 내세워 단군조선이 우리역사의 기원임을 분명히 하고 조선을 중국과는 다른 또 하나의 독립된 천하질서로 상정하고 있다. 

 

둘째, 그는 숙신, 예맥, 말갈 등 백두산 북쪽의 족속과 부여, 고구려, 백제 등을 모두 함께 단군의 후손으로 인정하여 후에 20세기 초의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에 영향을 준다. 

 

셋째, 그는 당시 유가들이 신화적인 요소를 황당하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배척한 것과는 달리 단군의 신이성(神異性)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단군의 순방한 정치가 1천 년간 지속되었다면서 이상정치의 연원을 요순이 아닌 단군 통치시대에서 찾고자 하였다.

 

이러한 허미수의 역사관은 훗날 민족주의 역사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허미수의 영향을 받은 홍대용 이후 북학사상가들은 ‘조선=중화’라는 역사인식을 부정하는 ‘역외 춘추론(域外春秋論)’을 표방하고 ‘조선=동이’라는 역사인식을 확립해 간다. 이러한 인식은 다시 근대 민족주의 학자들인 신채호, 정인보 등의 역사인식에 영향을 주게 되고 오늘날 현대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관의 시금석이 되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유교사대주의에 매몰되었고, 일연의 『삼국유사』는 불교주의에 빠졌지만, 허미수의 『동사』는 도가적인 입장에서 우리 역사 고유의 정통성을 복구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