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주 천지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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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한 망국 예감
불길한 망국 예감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오늘날 한국의 상황은 구한말 망국 때와 정확히 일치한다.” 필자가 『인민의 탄생』(2011) 후속작인 『시민의 탄생』을 출간하면서 가진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과장이 아니다. 오히려 덧붙이고 싶다. ‘그때보다 더 열악하다’고. 한국을 두고 벌어지는 극동정세가 그렇고, 그와는 아랑곳없이 터지는 내부 분열이 그렇다. 누군가는 항변할 것이다. 그래도 백 년 동안 힘을 길렀는데 오늘의 한국은 구한말 조선이 아니라고.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4강은 한국이 커진 것보다 더 커졌고, 북한 변수가 돌출한 이 시대 역학구도에서 한국의 입지는 한없이 쭈그러졌다고. 내부 분열? 당시에는 분열상이 조정에 한정되었지만 지금은 시민사회 전반을 갈라놓고 있다고 말이다.
그래도 믿기지 않는다면 중국·일본이 겹겹이 쳐놓은 방공식별구역으로 바짝 좁혀진 바다와 거기에 갇힌 한국을 보라, 4강 역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방공식별구역 경쟁은 용암처럼 꿈틀대는 극동정세에 잠재된 하나의 상징적 사건일 뿐이다. 한국은 두 개의 분절선이 엇갈리는 위치에 몰려 있다. 한·중과 일본을 가르는 ‘역사대치선’, 한·미·일과 중국·북한을 가르는 ‘군사대치선’이 한국의 지정학적 주소를 모순적으로 만들었다. 정세 변화에 따라 눈치를 살펴야 할 판이다. 일본의 우경화는 모순의 딜레마를 증폭한다. 아베 정권은 역사대치선의 중추신경인 영토분쟁을 일으키고 곧장 미국 뒤에 숨었는데, 한국은 중국과 위로주를 나누다가 얼떨결에 군사대치선으로 복귀해야 할 형편이다. 제주도 남쪽 상공에 신예전투기들이 난무해도 한국은 구경할 뿐 뾰족한 방법이 없다. 구중궁궐에 갇혀 ‘정의의 대국’이 오기를 고대했던 고종(高宗)과, 틈새전략도 구사하지 못하는 오늘날 한국이 무엇이 다른가. ‘난폭한 북한’이 불거지고 여기에 영토분쟁이 겹치면 한국의 운명은 강대국 역학에 좌우된다.
구한말이나 지금이나 한국은 4강 역학에서 종속변수다. 두 개의 대치선에 끼어 쩔쩔매는 판에 내부 분열은 고종 때보다 더 심하다. 일 년간 정치권은 집요한 싸움밖에 한 일이 없고, 분쟁에 시달리던 시민사회는 끝내 쪼개졌다. 종교계 일부가 듣기에도 거북한 대통령 하야 선언을 하고 나설 정도니 부지불식간 정권의 거버넌스는 금이 갔다. 회복해도 영(令)이 설지 의문이다. 국민의 건강한 판단력도 마비상태다. 명박산성보다 더 견고한 ‘요새정치’ 앞에서 지쳤고, 야당과 비난세력의 ‘돌격정치’에도 넌더리가 났다. 대통령 하야 요구가 정말 민주적인지, 120만 개 부정 댓글에 더해 뭐를 더 폭로할지 모를 판국에 법률 판단에 맡기자는 ‘회피정치’가 과연 민주적 리더십인지 헷갈린다. 정치권 분열, 약한 국력, 쪼개진 사회, 비전의 소멸, 그리고 열강의 충돌, 이것의 결말은 민족의 파멸이었다. 110년 전 대한제국을 멸망에 이르게 한 파국드라마, 그 악몽은 오늘날 한국과 정확히 닮은꼴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의 초라한 자화상을 냉철히 인정하자. 정치·경제적으로 한국을 이만큼 키운 20세기 패러다임은 끝났음을, 우리는 막힌 골목에 와 있음을 말이다. 산업화 세력이 그토록 자랑하는 성장엔진은 구닥다리가 됐고, 민주화 첨병이던 재야세력은 기득권집단이, 강성노조는 이익집단이 됐다. ‘사람투자’에 치중한 성장패턴의 유효성은 오래 전 끝났음에도 보수와 진보 모두 새로운 모델 만들기를 저버렸다. ‘사람투자’에서 ‘사회투자’로 전환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팽개쳤다. 연대와 신뢰를 창출하는 사회로의 전환이 사회투자의 요체이거늘, 원자화된 개인주의와 무한 경쟁으로 치닫는 현실을 부추기고 방치했다. 양극화와 격차사회의 행진을 막지 못했으며, 사회조직은 승자독식을 허용했다. 미래가 막막한데 시민윤리와 공동체정신? 글쎄, 분쟁이 만연된 한국 사회에서 누가, 어떤 평범한 시민이 어렵고 못사는 사람들을 걱정할까? 진영논리로 쪼개진 이기적 시민들의 어설픈 국가 운명을 극동의 강국들이 자국 이익에 맞춰 이리저리 재단하는 중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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