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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택사형>3번의 실각과 복권…장성택 영욕의 40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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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택사형>3번의 실각과 복권…장성택 영욕의 40년

세덕 2013. 12. 13. 16:35

<장성택사형>3번의 실각과 복권…장성택 영욕의 40년
<장성택사형>3번의 실각과 복권…장성택 영욕의 40년

北정권 2인자서 `국가전복음모죄` 처형까지 

 

 

 장성택 전 노동당 행정부장은 40여 년 동안 실각과 복권을 거듭하는 파란만장한 정치인생을 보냈다. 장성택은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모스크바에 유학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아오다 1972년 김일성 주석의 딸인 김경희와의 결혼으로 단번에 권력 핵심부에 진입했다. 김일성이 교제에 반대하며 장성택을 원산농과대학으로 쫓아내는 등 결혼에 이르기까지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고 한다.

장성택은 결혼 후 출세가도를 달리다 1978년 첫 번째 위기를 맞게 된다. 동평양의 외교부 초대소에서 측근들을 모아놓고 연회를 벌이다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정돼 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눈 밖에 나면서 장성택은 강선제철소 작업반장으로 좌천돼 2년간 사상교육을 받았다. 당시 장성택을 구해준 것은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의 어머니인 성혜림이었다.

복귀한 장성택은 82년 조선로동당 청소년사업부 부부장을 시작으로 당직을 잇달아 맡으면서 승승장구한다. 94년 김 주석의 사망 당시에는 국가장의위원을 맡았고 김정일 체제에서 핵심 실세로 부상했다. 김정일 후계경쟁이 본격화하면서 장성택은 다시 시련을 겪는다. 2002년 국가예산 횡령혐의로 김경희와 강원도로 유배됐고 다시 업무에 복귀했지만 2004년에는 `권력욕에 의한 분파 행위`라는 죄명으로 실각하고 측근들도 숙청됐다. 김정은의 생모인 고영희가 김정남과 가까웠던 장성택, 김경희 부부를 견제해 벌어진 `내부 암투설`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와신상담하던 장성택은 고영희 사망 후인 2006년 재기에 성공한다. 2007년 당 중앙위원회 행정부장으로 임명됐고 2008년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에는 김정일의 절대적 신뢰 속에 김정은의 후계과정을 총괄하는 후견인 역할을 맡았다. 2010년에는 김정일이 위원장을 맡고 있던 국방위원회의 부위원장에 임명되면서 명실상부한 정권의 2인자로 떠올랐다.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당시 김정일의 운구차를 호위한 8명 중 1명으로 장성택은 김정은의 바로 뒤에서 운구차를 호위했다.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리영호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이 실각하자 장성택이 군부와의 파워게임에서 승리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그 후 김정은이 사실상 장성택, 김경희의 섭정을 받고 있는 것 아니냐고 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김정일 사망으로 실권을 장악한 지 채 2년이 되지 않은 지난 8일 조카인 김정은의 손에 의해 체포됐고 불과 4일 만에 처형되면서 영욕의 정치인생을 마감했다.

[장영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