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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잊혀진 역사

<윤봉길의사>아름다운 청년, 윤봉길

세덕 2014. 1. 8. 13:11

<윤봉길의사>아름다운 청년, 윤봉길

 

<윤봉길의사>아름다운 청년, 윤봉길


재작년, 우연히 들른 예산의 윤봉길의사 기념관에서 윤의사의 일생에 관한 여러 기록들과 사진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머리속 윤의사의 모습은 그저'홍구공원에서 장렬히 산화한 애국지사'의 모습이었건만..
윤의사의 생전 기록들을 하나 하나 둘러보며, 많은 생각과 감회에 젖게 되었습니다.
특히,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곤히 잠든 두 아들과 처, 너무도 사랑하는 어머니를 두고 새벽에 떠나는 그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 한켠이 메어졌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로 시작되는 편지..

나라를 위한 죽음의 길, 그 머나먼 여정을 떠나 이역만리 중국 상해에서 고향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한장..
너무나 사랑하고, 너무나 그립고, 너무나 애닯기에.. '어머니'라는 말만 네번이나 쓰며 한참동안 상념에 젖어했을 청년 윤봉길의 모습을 상상하니
저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습니다.

오늘은 가신 님이 그리워, 글을 써봅니다.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理想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 더 한층 강의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 윤봉길 의사 어록 中 -

 

 

 

 

 

 

 

 

 

 

 

중국 상하이 홍구 공원 의거 당일, 김구와 윤봉길은 아침식사를 함께 하였다.
백범일지에는 당시 윤봉길의 모습을 '논밭으로 힘든 일을 하러 가려고, 농부가 자던 입에 일부러 밥을 넣듯이 했다'고 적혀있다.

'윤 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주며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저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시간 밖에는 쓸 데가 없으니까요." 하기에
나도 기념으로 윤 군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윤 군에게 주었습니다.
식장을 향하여 떠나는길에 윤 군은 자동차에 앉아서 그가 가졌던 돈을 꺼내어 내게 줬습니다.
"왜 돈은 좀 가지면 어떻소?" 하고 묻는 말에 윤 군이 "자동차 값 주고도 5, 6원은 남아요" 할 즈음에 자동차가 움직였습니다.

나는 목메인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하였더니
윤 군은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나를 향해 머리를 숙였죠.'

 

 

 

 

 

 

 

 

 

 

 

 

 

"중국의 백만 군대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한국의 한 의사(義士)가 능히 하니 장하다.
오호라 부끄럽구나.
중국인 10억이 못한 일을 한국인 1명이 이루었구나...
백년도 못사는 인생...
죽어서 천년의 이름을 떨치리라." - 장개석 총통 -

 

 

 

 

 

 

그해가 저물어가던 12월 20일,
동아일보는 '윤봉길은 17일 저녁때 대판(大阪·오사카) 위수구금소에서 금택(金澤·가네자와)으로 호송되어 19일 아침 7시 40분에 금택형무서에서 총살로 사형을 집행하다.'고 전했다.
광복 후 윤봉길의 유해는 가네자와 쓰레기소각장에서 발굴돼, 1946년 6월 30일 백범 김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효창공원 묘역에 안장되었다.

 

 

 

 

 

 

강보에 싸인 두 아들 모순과 담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앞에 찾아와 한 잔의 술을 부어 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데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 동포여!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人情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 했습니다.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들 계십시오."

 

 

 

 

 

 

- 윤봉길의 유서 中 '동포에게 보내는 글' -

 

 

 

 

 

윤봉길의사의 의거는 헛되지않아, 5편 322장의 말씀처럼 우리 대한이 독립을 하게 되는 결정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조선의 독립을 최초로 보장한 카이로 회담에서, 각 나라의 독립과 신탁통치를 결정하였던 세 정상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아니 장개석의 마음을 움직인것은 윤봉길의사의 의거가 계기였기 때문입니다.

"중국이 오랫동안 조선의 조공을 받아 왔으니 이 뒤로 25년 만이면 중국으로부터 보은신(報恩神)이 넘어오리라.” [5:322:18]


* "이 뒤로 25년.." - 이 공사를 보신 것이 1908년 10월, 그 해 6월에 태어난 윤봉길은 그로부터 25년후인 25세되던 1932년 홍구 공원에서 의거를 결행하게 된다.
이에 감명받은 장개석은 윤봉길의사에게 '장렬천추'라는 글을 선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군사학교 설립을 도와주게 되고
후에 카이로 회담의 세 정상으로 참여,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는 결정적 공헌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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