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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공사 중일전쟁>2변 총각판 중일전쟁- 2차세계대전(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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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공사 중일전쟁>2변 총각판 중일전쟁- 2차세계대전(하)

세덕 2014. 1. 28. 13:11

<천지공사 중일전쟁>2변 총각판 중일전쟁- 2차세계대전(하)

<천지공사 중일전쟁>2변 총각판 중일전쟁-2차세계대전(하)


 제2차 세계대전 공사


그 신명[관운장]이 지금 이 지방에 있지 않고 서양에 가서 큰 난리를 일으키고 있나니 치성은 헛된 일이니라. (道典 5:299:1∼3)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지개벽시대에 어찌 전쟁이 없으리요.… 뒷날 대전쟁이 일어나면 각기 재주를 자랑하여 재주가 일등되는 나라가 상등국이 되어 전쟁은 장차 끝을 막으리라.”하시니라.(道典 5:144:3, 12)


상제님은 러일전쟁의 애기씨름에서 일본을 도와 러시아를 물리치신다. 이것은 동양에 온 서양의 제국주의 세력을 걷어 내기 위한 첫 번째 조처였다. 상제님은 2단계로 조선의 보호신명들을 서양으로 보내어 서양에서 큰 난리(전쟁)를 일으키게 하셨다. 그 결과 일어난 것이 제1차 세계대전이다.

제국주의 세력확장에 혈안이 되어있던 서양의 여러 열강들은 본거지인 유럽에서 전쟁이 발생하자 더 이상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지 못하고 긴급히 자국으로 눈을 돌린다. 이후 상제님은 동양의 약소 국가들을 서양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한번의 세계 대전쟁을 준비하고 계셨다.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당시의 세계상황을 문화사적으로 간략히 알아본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원인은 1930년대에 유럽을 휩쓴 대공황의 영향을 들 수 있다. 각국의 정부들은 실업과 경기침체에 직면하여 자국의 국내시장을 보호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즉 자국은 물론 자국의 영향권에 놓여있는 지역을 묶어 고율의 관세로 경제블록을 형성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인류에게 불행을 안겨줄 수 있는 불씨를 안고 있었다. 즉 전세계적 차원의 경제적 민족주의의 격화는 국제적 긴장을 야기하는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긴장과 대결은 필연적으로 여러 나라에서 사회적 불만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사회적 위기의 증폭 속에서 파시즘, 나찌즘, 군국주의라고 하는 극단적인 전체주의, 민족주의 등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긴장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었던 나라가 일본이었다. 일본은 주력상품인 생사와 면제품 의류의 수출이 감소함에 따라 석탄, 철, 기타 광물 같은 필수 수입품의 대금을 지불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인 부담 속에서 자신들의 권력과 침략열을 채우기 위해 군국주의자들이 일으킨 전쟁이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이었던 것이다.


일본의 만주점령과 중국본토에 대한 침략은 중일전쟁을 통해 더욱 가속화되었고, 이러한 전쟁의 과정에서 일본 또한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일본은 비록 정규전에서 중국의 주요도시, 철도를 장악할 수는 있었지만, 내륙 깊숙히 중경에 수도를 옮기고 항전하는 중국군과 맞서 승리를 쟁취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중국 홍군(紅軍)의 조직적인 게릴라전, 그리고 광활한 중국대륙을 전선으로 하여 중국 민중과 싸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일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져들었고, 이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 일본으로서는 더욱 많은 물자와 자원을 필요로 했다.


이러한 때에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을 딛고 일어선 독일에 의해 새로운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고 이어 폴란드 회랑지대를 노리고 있었다. 폴란드의 주권을 옹호하겠다고 주장했던 영국, 프랑스의 선언을 히틀러가 무시했던 것이다. 1939년 9월 1일 새벽, 독일군은 드디어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기계화부대와 공군력을 바탕으로 100만 명의 독일군은 물밀 듯이 폴란드를 침공했고, 전쟁은 개전 3주만에 독일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독일의 폴란드 점령은 영국, 프랑스를 자극하였다. 그들은 독일의 팽창이 결국은 자신들의 식민지 및 기득권을 탈취하기 위한 행위라 받아들였다. 독일의 팽창은 필연적으로 자신들과의 전쟁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동양을 다 집어삼킨 일본의 세력권


내가 이제 일본에게 잠시 천하통일의 기운과 일월대명(日月大明)의 기운을 붙여 주어 천하의 역사(役事)를 시키려 하노라. (道典 5:122:5)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은 아시아를 서양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가는 곳마다 연전연승하였다. 이 전쟁의 과정에서 일본군은 유럽제국주의 세력에 반대하는 많은 지지자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소·일 중립조약(1941년 4월) 체결 후 일본은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이 사라지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하고, 곧이어 미얀마와 남태평양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미국의 태평양함대에 큰 피해를 입힌 일본군은 영국이 유럽에서 독일과의 전쟁에 진력하는 틈을 이용하여 계속되는 전승을 올릴 수 있었다. 또한 1942년 봄까지 일본은 미국의 전초기지인 괌, 웨이크와 필리핀을 정복하고, 말레이시아·버마·네델란드령 인도네시아를 차지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자신들의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대일본제국을 향한 야망을 실현하는 듯이 보였다.

상제님께서는 지기(地氣)가 강렬하여 침략열이 강한 일본을 내세워서 서양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동양을 구원하려 하셨다. 사실 상제님께서 일본을 내세운 것은 서양제국주의 세력을 동양에서 몰아내어 구원해 주고자 어쩔 수 없이 취했던 긴급한 조치였던 것이다.

즉 일본을 일꾼으로 내세운 것은 필요악으로 그들의 기운을 끌어다 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제님은 누구보다도 일본민족의 악독함을 잘 알고 있었다. 즉 그들이 저지른 각종 만행을 본다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 잔악함


내가 이제 일본에게 잠시 천하통일의 기운과 일월대명(日月大明)의 기운을 붙여 주어 천하의 역사(役事)를 시키려 하노라.

그러나 그들에게 한 가지 못 줄 것이 있으니 곧 ‘어질 인(仁)’자라.
만일 어질 인자까지 붙여주면 천하는 다 저희들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道典 5:122:6∼7)


상제님은 일본에게 천하통일지기와 일월대명지기를 붙여주어 천지의 일꾼으로 내세우셨지만 그들에게 어질 인자는 붙여주지 않으셨다. 그것은 일본 민족이 가진 본질적인 민족성 때문이었다. 상제님은 일본의 민족성을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일본은 너무 강렬한 지기(地氣)가 모여 있으므로 그 민족성이 사납고 탐욕이 많으며 침략열이 강하여 … (道典 5:316:5)

이제 이러한 일본이 동양을 침략하면서 저질렀던 만행과 잔인함을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첫째>는 1923년 9월 1일, 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關東) 지방의 지진발생시 그들이 보인 광적인 집단 살인극을 들 수 있다. ‘관동 대지진’으로 불리우는 금세기 최대의 이 지진은 일본 사회를 순식간에 공포의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수백 만의 이재민들이 집을 잃고 밖으로 나앉게 되었고,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당시 일본정부는 국내의 혼란한 질서를 수습하고 싶었다. 마침내 그들은 한국인들에게 모든 잘못을 전가시키기로 결정한다. 일본 군부와 경찰은 한국인이 지진상황을 이용, 폭동을 일으키려 계획한다든가, 혹은 우물에 독약을 넣어 일본인을 몰살시키려 한다는 등의 각종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 생활고의 가중에 신음하던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증오하였다.

야마모토 곤베에(山本權兵衛)내각은 계엄령을 선포하며 이에 대처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은연중에 한국인을 살해하는 것을 방조하였다. 민간인들도 자경단을 결성하여 한국인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말을 걸어 한국인이라 의심되는 사람이면 죽창·쇠갈고리·도끼·일본도·권총·톱 등을 사용하며 잔혹하게 살해하였다. 그 당시 도쿄와 가나가와(神柰川)시에 살고있는 재일 한국인이 대략 1만 53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중 6,661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하니 한국인의 절반 가량이 피해를 입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의 교활하고 비인간적인 행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둘째>는 일본군의 잔혹한 민간인 학살로 유명한 남경대학살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일본군은 남경으로 진격 중에 약 30만 명을 살해하였고 난징 점령 뒤에 약 4만 2천명을 살해하였다. 전후 극동군사재판에 제출된 자료에 의하면, 2개의 자선단체가 난징에서 매장한 유기시체만도 15만 5337구(그 중 어린이가 859구, 부녀자가 2,127구)였고, 그밖에 양쯔강에도 대량의 시체가 버려졌다.

학살은 기총(機銃)에 의한 무차별사격과 생매장, 또는 휘발유를 뿌려서 불태워 죽이는 등 극히 잔학한 방법으로 자행되었다. 또한 부녀자에 대한 강간과 약탈·방화(시내의 약 1/3이 소실됨)도 횡행하였다. 피해는 중국인에게만 그치지 않고 미국·영국·독일 등의 외교관 저택에도, 또한 중국인 피난민을 구조하였다는 이유로 미국인이 경영하는 병원·학교·교회 등도 약탈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극동군사재판에서 당시 총사령관 마쓰이가 대학살의 책임자로서 사형에 처해졌다. 또 당시 제6사단장 하세 히사오(長谷壽夫)를 포함한 군 장교들이 남경의 법정에서 전쟁범죄자로 처형되었다.


셋째>는 관동군의 소위 마루타라 불리우는 공포의 생체실험을 들 수 있다. 산사람을 각종 세균을 사용하여 생체실험을 자행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군의 악랄한 만행은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보다도 더 지독한 것이었다. 이밖에 만세운동이나 독립운동에 관여했던 의사들을 고문하는 것이라든가, 사지를 잘라 죽이는 행위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잔악 행위가 일제의 깃발아래 자행되었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잔혹성을 미리 내다보시고, 상제님께서는 당신의 세상을 이 땅에 뿌리내리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일본의 침략열을 해소시켜주면서,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서양제국주의 세력을 동양에서 쫓아내는 일꾼으로 내세워 잠시 그 기운을 취하여 썼을 뿐이다.


태평양 전쟁과 일본의 참혹한 패망


서양사람에게서 재주를 배워 다시 그들에게 대항하는 것은 배은망덕줄에 범하므로 이제 판 밖에서 남의 의뢰없이 남모르는 일을 꾸미노라. 일본사람이 미국과 싸우는 것은 배사율(背師律)에 범하는 것이므로 참혹히 망하리라.(道典 5:91:1∼3)


일찍이 일본은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선에 의해 문호를 개방한 후, 미국과의 긴밀한 접촉을 통해 근대화를 이룩한 나라였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자 일본은 자신들에게 근대서구문명을 전파해준 스승인 미국에 대한 전격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미국의 해군, 공군력을 무력화시키려 하였다. 일본은 진주만 기습을 효과적으로 달성하여 처음에는 승승장구하는 듯 했다.


하지만 1942년 봄, 미국은 일본과의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전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즉 일본은 주력 항공모함과 전투기, 그리고 우수한 조종사들을 잃어버림으로써 전세는 미국의 승리로 기울어갔다. 1945년에 접어들자 미국은 격렬한 전투 끝에 일본의 심장부를 타격 할 수 있는 오끼나와를 접수하였다. 이로써 미국은 일본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사실상의 승리를 낙관할 수 있었다.


산업시설의 파괴되고 함대가 분쇄당한 일본은 더 이상 미국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1945년 7월 26일, 미국·영국·중국은 일본에 무조건 항복할 것을 촉구하는 공동선언을 발표하였지만 일본은 이에 불응하였다. 미국은 전쟁을 통한 더 이상의 피해를 원치 않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개발한 무기를 실전에 사용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미 며칠 전부터 히로시마 시민들 사이에서는 대대적인 공습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8월 6일 아침, 그날도 방공호에서 잠을 설치다 밖으로 나온 일본인들의 눈에는, 도시의 하늘을 높은 고도로 날아가던 B-29 폭격기에서 떨어지는 조그만 낙하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보게 되는 풍경이 되고 말았다.


정확히 8월 6일 아침 9시 15분, 조그만 낙하산에 매달려 떨어진 원자탄의 연쇄 폭발 반응은 섭씨 수백만 도의 열을 발산했다. 십만 분의 1초라는 극히 짧은 순간에 무려 섭씨 30만도에 이르게 된 불기둥은 1초 후에는 그 반경이 무려 250m로 부풀었다. 원자탄 투하로 히로시마는 뼈대만 앙상히 남은 몇 개의 건물을 제외하곤 완전한 폐허의 공터로 변하고 말았다. 그리고 30만명의 시민 중 1/3이 생명을 잃는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만다. 많은 사람들이 직접적인 폭발의 충격으로 사망했으며 폭발 직후 전 도시를 뒤덮은 열폭풍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다. 치명적인 방사선에 화상을 입은 사람들도 매일 수없이 죽어갔다. 충격에 넋을 잃은 생존자들이 한때는 화려했던 도시의 잔해 속을 절망 어린 모습으로 방황하기도 했다.

7km 상공까지 버섯구름을 솟구치게 한 이 거대한 원자탄 폭발을 상공에서 내려다보던 미 해군 소속 대위는 이렇게 표현했다. 원자탄을 투하한 임무를 맡게 된 폭격기는 조종사의 어머니 이름을 따 ‘에놀라 게이’라는 애칭이 붙은 폭격기였는데 조종사 티베트 대위는 폭발의 열 반응이 16km가 넘는 지역의 상공에도 미치고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한 직후 미국은 일본에 즉각적인 항복을 촉구했다. 곧이어 미국의 강한 의지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원자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져 4만명의 일본인들이 사망하는 비극을 초래하였다. 항복을 하지 않을 경우 원자탄을 계속 사용해서라도 전쟁을 종식시키겠다는 것이 미국의 확고한 태도였다.


설상가상으로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를 개시하여 만주로 진격하였다. 두 번에 걸친 원자탄 공격, 그리고 소련의 대일선전포고는 일본을 너무나 큰 충격과 비탄에 휩싸이게 했다. 이제 일본은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마침내 최고 전쟁 지도자 회의를 열어, 8월 14일, 일본은 무조건 연합국 측의 요구를 수용할 것을 의결하였다. 일본은 그 다음날 8월 15일, 이러한 내용의 항복선언을 라디오를 통해 발표했다. 그리고 일본의 항복과 더불어 전세계를 불바다로 만들었던 제2차 세계대전도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6년간에 걸친 전쟁에서 약 5천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1조 1, 540억 달러의 전비가 소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참전국은 물론, 전세계 인류에게 너무나 큰 피해와 상처를 안겨주었다. 인류는 진정한 평화를 염원하였고, 이를 시행할 수 있는 방안으로서 국제적인 상호의결기구인 국제연합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전쟁종식 후 곧 미·소라는 자본주의 對 공산주의의 양극체제로 분열된 세계는 극심한 군사적·경제적 대립양상을 보이며 냉전체제라고 하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창출하기에 이른다.


“히로시마의 상생교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라”

나의 도는 상생(相生)의 대도이니라.(道典 2:15:1)


오늘날 인류문명을 송두리째 멸망시킬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핵(核)’을 염두에 두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공할 살상력을 지닌 핵이 처음 사용된 곳이 어디인가? 제국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악독하고 잔혹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처음으로 투하되었다. 그렇다면 원자탄의 투하 목표지점은 어디였을까?
원자탄의 투하 목표지점은 바로 상생교(相生橋). 상생교!!


상생(相生)이란 무엇인가? 바로 남을 잘되게 하고, 더불어 함께 살라는 사상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언어이다. 히로시마의 심벌이자 세계평화의 상징이 된 ‘원폭 돔’의 서쪽으로 가다보면 T자형 다리인 상생교가 있는데, 당시 시가지의 동서쪽과 서쪽을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전한다. 바로 이 상생교가 원폭투하의 목표물이었으며, 실제로 원자탄이 작렬한 지점은 상생교의 동남쪽 약300m 지점인 사마병원 상공 약 580m였음이 후일 조사로 밝혀졌다.


강증산 상제님은 당신의 진리를 ‘상생(相生)의 대도’라 말씀하셨다. 원자탄 투하 목표지점이 공교롭게도 강증산 상제님의 근본이념인 상생(相生)과 동일한 이름이라고 하니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지명(地名)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자못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킬 만하다.


서로서로 살리며 돕고 살아야 한다는 상제님 천지공사의 이념을 일본인과 전 인류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상제님께서 상생교에 원자탄을 투하하도록 공사를 집행하신 것은 아닐까?


七月七夕三五夜 칠월칠석삼오야(道典 5:308:3)


상제님은 일본이 패망할 날짜를 ‘칠월칠석삼오야(七月七夕三五夜)’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일본이 패망할 시간대를 정확히 밝혀준 말씀으로 충격과 신비감을 더해준다. 일본은 원자탄의 위력과 소련군의 참전으로 항복을 결심하였는데 이날이 바로 8월 14일이다. 8월 14일 당시 일본의 수뇌부는 회의를 통해 연합국의 제의를 무조건 수락한다는 내용의 사실상의 항복선언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일본이 패전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날이었다.


그해 칠월칠석절은 양력으로는 8월 14일로, 그 다음날인 삼오야 즉 3과 5를 더하면 8이 되고(3+5=8), 3과 5를 곱하면 15가 되는데(3×5=15), 이는 바로 일왕이 8월 15일날 항복조서를 발표한 날로써 상제님께서 일본의 패망 날짜를 공사로써 못박아 놓으셨던 것이다


총각판 씨름의 결과 국제연합 창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서구의 제국주의 열강은 동양으로부터 대부분 물러나고, 독립을 열망하던 아프리카, 아시아 등의 약소민족들에게는 민족해방의 광명을 열어주는 전기점이 마련되었다. 또한 천상의 조화정부가 인사로 실현된 세계기구가, 1변 애기판의 국제연맹에 이어 국제연합으로 새로 발족되었고, 지구촌 통일문화시대를 향하여 동·서의 낡은 정신은 한꺼풀을 더 벗게 되었다.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은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하며,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국제협력을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는 국제기구이다. 1946년 붕괴된 국제연맹을 계승한 것으로 이 명칭은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가 고안한 것이며, 제1차 세계대전 중 26개국 대표가 모여 추축국에 대항하여 계속 싸울 것을 결의하였던 1942년의 ‘연합국 선언’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국제기구에 관한 연합국 회의’에 참석한 50개국 대표는 1944년 덤바턴오크스에서 회합한 미국·영국·중국·소련 등 4개국 대표가 합의한 초안을 기초로 국제연합헌장을 작성하였다. 50개국 대표는 1945년 6월 26일 국제연합헌장에 서명했으며, 폴란드가 추후 서명하였다.
국제연합은 미국·영국·프랑스·중국·소련과 여타 서명국 과반수가 국제연합헌장을 비준한 1945년 10월 24일 공식 출범하였으며, 이후 매년 10월 24일을 국제연합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본부는 미국 뉴욕시(市)에 있다.
주요활동은 크게 평화유지활동·군비축소활동·국제협력활동으로 나눌 수 있으며, 주요기구와 전문기구·보조기구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기구에는 총회·안전보장이사회·경제사회이사회·신탁통치이사회·국제사법재판소·사무국이 있다. (출처: 두산세계대백과)


20세기는 대전쟁의 시대
미국 한 전쟁전문가의 조사에 따르면 1816∼1965년의 74차례 국제전 중 사망자 수로 등급을 정할 때 상위 4위까지 전쟁이 모두 20세기에 일어났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과 1937년 중일전쟁, 그리고 한국전쟁이 그것이다.
더욱 가공할 일은 1차대전 이후 민간인 사상자 수가 군인 사상자 수보다 훨씬 많다는 점이었다. 전쟁이 이처럼 야수성을 더하게 된 데는 과학 발달에 따른 무기의 대량생산 기술도 한몫 했다. 19세기 전쟁에서 하루 1만여발의 포탄이면 충분했던 프랑스가 1차대전 들어 하루 20만발을 사용해도 모자라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