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주 천지조화
<동학농민혁명 전명숙장군>백성을 위해 한번 죽기로 맹세한 백의한사 전명숙장군, 만고명장이 되다. 본문
<동학농민혁명 전명숙장군>백성을 위해 한번 죽기로 맹세한 백의한사 전명숙장군, 만고명장이 되다.
<동학농민혁명 전명숙장군>백성을 위해 한번 죽기로 맹세한 백의한사 전명숙(주1), 만고명장이 되다.
우리 일은 남 잘되게 하는 공부니 남이 잘되고 남은 것만 차지하여도 우리 일은 되느니라.
전명숙(全明淑)이 거사할 때에 상놈을 양반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두었으므로 죽어서 잘되어 조선 명부대왕(冥府大王)이 되었느니라.
전명숙이 고부에서 혁명을 일으킴
갑오(甲午 : 道紀 24, 1894)년에 태인 동골 사람 전명숙(全明淑)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동학 신도들을 모아 고부에서 난을 일으키니 온 세상이 들끓으니라.
일찍이 전명숙은 신묘(辛卯 : 道紀 21, 1891)년부터 3년간 서울을 오르내리며 흥선대원군을 만난 일이 있더니 대원군이 명숙의 뜻을 물은즉 “제 흉중(胸中)에 품은 뜻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한 번 죽고자 하는 마음뿐이오.” 하고 대답하니라.
증산께서 명숙과 나이 차이는 많이 나나 일찍부터 교분이 있으시더니 갑오년에 하루는 명숙이 찾아와 말하기를 “내가 민생을 위해서 한번 거사를 하려 하니 그대가 나를 도와주시오.” 하거늘 증산께서 그 전도가 이롭지 못함을 미리 아시고 “때가 아니니 나서지 말라.” 하시며
“성사도 안 되고 애매한 백성만 많이 죽을 것이라.” 하고 경계하시니라.
이에 명숙이 대하여 말하기를 “그대가 안 된다면 나 혼자라도 하겠소.” 하고 물러가니라. 혁명이란 깊은 한(恨)을 안고 일어나는 역사의 대지진인즉, 동방 조선 민중의 만고의 원한이 불거져 터져 나온 동학혁명으로부터 천하의 대란이 동하게 되니라. 증산께서 후천개벽을 알리는 이 큰 난의 대세를 지켜보고 계셨으니, 이 때 증산은 성수 스물넷이요 명숙은 마흔 살의 백의한사(白衣寒士)더라. 개벽의 새 시대를 알린 이 혁명은 갑오년 정월과 3월, 9월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나니라. (도전 1편 43장)
혁명전야
조선 말 경상도 지역에서 상제님 시천주 신앙과 다시 개벽을 주장하며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조정에 의해 1864년 대구장대에서 처형을 당한 이후, 동학은 꾸준하게 교세확장을 해 나갔다. 하지만 19세기 말 동방 땅 조선은 안팎으로 누란의 위기를 맞았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탐욕은 계속되었고, 이웃한 일본은 메이지이유신明治維新을 성공하면서 그 침략의 독니를 스승의 나라 조선으로 향했다. 그럼에도 정권을 잡은 민씨 일가는 궁중예산을 낭비하였고, 배상금 지불, 대외관계 비용지출 등 세출이 늘어나 국가재정은 극도로 궁핍해졌다. 이런 국가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일반 농민에 대한 조세 부담과 지방관들에 의한 압제와 수탈은 강화되었다. 이런 상황을 매천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군전軍錢은 아무 때나 마구 부과하고, 환곡은 원본을 회수하고도 이자를 독촉하며, 세미는 명목도 없이 징수하고 있습니다. 민가에 부과하는 각종 잡역은 나날이 늘어가고, 인척에게 재물을 빼앗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전영관(轉營官: 세금 운반을 담당하는 관리)은 실제보다 더 거두어들이면서도 독촉이 심하고, 균전관(均田官: 전라 서북지역에 소재하는 왕실 토지 균전을 관리하는 벼슬아치)은 토지 면적을 속여서 세금을 징수합니다. 더구나 각 관청의 구실아치(官吏)들은 백성들로부터 강제로 빼앗고 가혹하게 굴어, 그것들을 참고 견디어 낼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일본의 경제적 침략으로 인해 우리 경제는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동방 조선 땅 곳곳에서 민중들의 원과 한이 겹겹이 쌓이고 있었다. 마치 혁명을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마침내 이들의 원한이 폭발했다. 조선의 곡창지대인 호남, 그 중 전라도 고부에서 한 점 불꽃이 지펴졌다. 이 불꽃이 민중들의 원한을 재료 삼아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동방 한민족 1만년 역사상 가장 대규모적이고 가장 굳센 의지를 보여줬던 갑오 동학 농민혁명! 그 불꽃 가운데 백의한사로 일어선 전명숙이 있었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구하고자 창의의 깃발을 든 인물, 갑오년 핏발 어린 외침 속에서 하늘 아래 들판의 산 위에 가슴마다 타는 분노로 주린 배 움켜잡고 동학군이 죽창 들고 일어선 그날에 도탄에 빠진 백성을 건져 새 세상의 앞길을 열고자 했던 그 사람, 다시 개벽을 외치고 보국안민 기치를 높이 든 동학혁명군의 지도자 만고명장 전명숙. 몸이 작아 흔히 녹두綠豆라 칭하기도 한 그를 민중들은 녹두장군이라 불렀다.
태인 동골의 백의한사白衣寒士
최수운 대신사가 결정적으로 구도의 열정을 품게 되었던 을묘천서사건이 있던 그해 1855년 12월 3일, 전명숙은 고부군 궁동면宮洞面 양교리陽橋里(지금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봉준琫準 외에 철로鐵爐, 병호炳鎬, 자는 명숙明淑, 명좌明佐로도 기록되어 있다. 고창군 당촌 마을에서는 전명숙을 녹두장군 대신에 족보 명이자 아명인 ‘씨화로’ 혹은 ‘쇠화로鐵爐’라 불렀다고 전해온다. 집안의 불씨를 담은 ‘씨화로’, 불꽃을 피워 사람들을 훈훈하게 하는 ‘쇠화로’는 어쩌면 전명숙의 운명을 암시했던 것은 아닐까?
전명숙은 천안 전씨로 시조인 전악全樂으로부터 53세 손이다. 전악은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태조 왕건이 견훤에게 대패했던 공산전투에서 신숭겸과 함께 전사하여 삼사 좌복야에 추증되고 천안부원군에 봉해졌다. 이후 후손들은 관향을 천안으로 삼았고 무인武人으로 벼슬을 지낸 인물이 많은 집안이었다.
하지만 전명숙의 조부인 도신道信 이후에는 관직을 지낸 인물이 없었고 경제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던 백의한사였다. 부친은 전창혁全彰赫(일명 전승록, 다른 이름은 전형호全亨鎬)으로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 의협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는 거주지를 옮겨 다니면서도 전명숙 교육에는 열성적이었다.(주2) 훗날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한 행위에 격분하여 이를 항의하다 모진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죽음을 당했다. 이런 아버지의 저항적 기질과 부친의 비참한 최후는 전명숙에게 혁명의 큰 뜻을 가슴속에 품게 했다. 모친은 김씨로 언양 김씨 설과 광산 김씨 설이 있다.
어릴 적 집안이 그다지 부유하지 못해, 약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으며 그 와중에 방술方術도 익혔다. 18세 무렵, 태인 산외면 동곡리東谷里 지금실知琴室로 이주했다. 이때 세 마지기의 전답을 경작하면서 훈장일도 보며 동네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러면서 항상 가슴에 품은 뜻만은 크고 웅대하여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滅族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조선은 상제님으로부터 천명과 신교를 내려 받아 창도한 동학의 시천주 신앙과 다시개벽 등이 일반 백성들 속에서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체계적인 조직 관리와 혁명적인 가르침을 통해 1880년대 말에는 수십만 명의 동학교도들이 활동하였다. 어수선한 나라 상황에 외세는 물밀듯이 밀려들어와 침략 야욕을 부리고, 온갖 참서와 유언비어가 나도는 가운데 탐관오리들의 착취와 조정의 무능은 극에 달해 위기 상황은 날이 갈수록 가중되었다. 제세의 뜻을 품고 때를 기다리던 전명숙은 마침내 1892 임진壬辰년에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을 통한 사회혁명! 어릴 때부터 품었던 뜻을 이룰 수 있는 터전을 찾게 된 것이다.
당시 동학 내부에서는 동학을 박해하는 조정에 대해서 신앙의 자유를 허락받기 위해 교조 신원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1890년 초반 동학신도가 급증하고 조직력이 강화되면서 조직적인 교조신원운동을 펼쳐나갔는데, 여기에 동학에 갓 입도한 전명숙은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교조신원운동은 1892년 10월 공주집회, 11월 삼례집회, 1893년 2월 11일 광화문 앞에서 40여 명이 모여 복합 상소를 올리며 사흘을 낮밤 없이 곡을 하는 등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전명숙은 11월 삼례집회 때부터 지도자로 참여하여 전면에 부각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평화적인 이런 상소 운동이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자, 전명숙은 동료 김덕명, 김개남, 최경선 등과 더 강력한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1893년 3월 11일 충청도 보은 집회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1만여 명이 모였다. 여기에서는 일본의 침략을 경계하는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표방하여 단순한 교조 신원운동 차원을 넘어섰다. 이때 전명숙 등의 주도 아래 금구군金溝郡 원평院坪에서도 집회가 있었다. 이 지역은 전명숙의 성장지였고, 훗날 동학혁명의 집강소 시기 전라우도의 중심부 역할을 했던 지역이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서서히 전명숙이 이념적인 지도인물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주3)
천하 대란을 이끈 갑오동학혁명-고부봉기
1894년 갑오년 혁명의 새 해가 밝아왔다. 지난 15년간의 흉년은 조선 사회를 불안과 혼란 속으로 밀어 넣었다. 갑오년 당시에도 대 가뭄이 있었다. 그럼에도 백성들을 어루만져야 할 관료들은 과중한 징세로 고통을 가중시켰고, 1893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趙秉甲(1844~1911: 순조 왕비 조씨 일족으로 탐관오리의 전형이다. 뒤에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고등재판관으로 승진하였다)은 이미 농민들이 만들어 놓고 쓰던 보가 있음에도 강제로 농민들을 동원해 쓸데없는 만석보萬石洑를 다시 짓게 했다. 하지만 이해 가뭄으로 수확을 제대로 하지 못했음에도 강제로 수세水稅를 과중하게 징수하였다. 이미 전해부터 조병갑의 가렴주구로 원한이 쌓여 있던 농민들과 함께 치밀하게 계획을 짜 나갔던 전명숙이었다. 주모자를 알 수 없게 1893년 11월로 날짜가 기록된 사발통문을 작성하였다. 이때 백성들은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 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어디 남아 있겠나” 하며 기회를 엿보았다. 당시 백성들의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 의지할 수 있는 길은 동학의 조직망뿐이기 때문이었다.
1894년 정월 10일 새벽 첫닭이 울자 때를 기다리던 동학교도들과 농민들이 흰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말목장터(마항시장)로 모여들었다. 이윽고 사람들 전면에 나선 전명숙은 조병갑의 불법 탐학행위를 낱낱이 밝혀 나갔고, 백성들이 원망하는 고로 백성을 위해 일어서게 되었다고 기병起兵 동기를 비장한 각오로 밝혔다. 말목장터 앞 감나무 앞에는 1천여 명의 농민들이 모여 열렬한 박수와 함성으로 응답하였고, 전명숙을 필두로 한 농민군은 먼동이 터 오는 동진강변의 찬바람을 맞으며 고부 읍으로 노도와 같이 진격해 들어갔다. 혁명의 시작이었다.
고부읍성(고부관아터는 지금 고부 초등학교가 들어서 있고, 고부 경무청이 있던 곳이다)은 쉽게 점령되었다. 조병갑이 제보를 받고 전주로 튀어버렸기 때문이다. 전명숙은 억울한 백성들을 석방하고 무기고를 털어 무장을 강화하였다. 세곡을 농민들에게 돌려주고, 백성들의 피눈물이 담긴 만석보도 파괴해 버렸다. 때를 같이 하여 무장 등지에서는 손화중이 기포하였다. 1월 25일 백산으로 동학군은 진지를 옮겼다. 고부에서의 봉기는 조선시대 흔히 있던 민란의 성격을 담고 있었다. 즉 탐관오리에 대해서 원한을 풀고 이를 조정에서는 잘 달래어 주모자 급만 처단하고, 나머지는 해산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 무렵부터 전명숙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상을 도모하고자 했던 지도부와 단순히 탐관오리를 내쫓고 원한을 해결하려 했고, 뚜렷한 의식 없이 참여했던 농민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이에 고부 봉기는 불길이 점점 꺼져갔고, 3월 13일에 농민군은 해산되었다. 전명숙 등의 지도부들은 무장의 손화중포로 피신하였다.
천지를 진동시킨 갑오동학혁명 3월 기포
이에 조정에서 진상을 밝히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안핵사로 파견 온 이용태는 역졸 800여 명을 이끌고 관아를 점령했다. 모든 책임을 동학교와 농민들에게 들씌우며 남자들은 닥치는 대로 구타하고, 부녀자는 강음强淫하며, 재산 약탈, 가옥 방화 등의 조병갑보다 더한 악행을 저지르면서, 자신은 전주에 있는 한벽당寒碧堂에서 향락에 취해 있었다. 농민군 해산 후 고부 관아는 자숙하기는커녕 악행은 도를 넘어섰고,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미 3월 1일 줄포의 세곡창고를 습격하여 2개월분의 군량을 확보하고 민가의 조총과 농기구 등을 거두어 무장을 하고 있던 동학농민군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명숙은 손화중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다시 일어설 것을 요청했다. 3월 20일 드디어 전명숙, 손화중, 김개남의 동학 세 영웅은 무장에서 농민군 진영을 편성하고 동학농민혁명의 개시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창의문을 포고布告하고 천제를 봉행하며 칼 노래와 칼춤을 추었다. 군기軍旗도 만들어 하얀 천 위에 ‘동도대장東徒大將’ 네 글자를 크게 쓴 깃발이었다. 또한 보국안민輔國安民(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보輔는 두 수레바퀴가 함께 굴러가듯 벼슬아치와 백성이 함께 나라를 운영한다는 뜻)의 깃발도 나부꼈다.
어느 한 사람의 원한이 아니었다. 조선 땅에 차고 넘쳤던 불의와 패악을 모두가 떨쳐 일어나 이 땅에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한 결단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의로운 항쟁이었다. 다시 고부 읍을 점령한 농민군은 백산 언저리에 모였다. 백산은 해발 50미터 내외의 낮은 산이지만 교통의 요충지로 농민군 집결에 유리한 곳이었다. 또한 백산에는 ‘고부 백산은 가히 만민을 살릴 수 있다可活萬民’ 는 비결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던 곳이다. 이때 농민군은 흰 옷을 입고, 푸른 대나무로 만든 죽창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서면 백산白山이요, 앉으면 죽산竹山’이라는 말이 전해졌다. 소위 백산 결진이었다. 여기서 전명숙은 총대장으로 추대되었다. 동학농민군은 편제를 갖췄고, 격문과 행동강령 그리고 기율을 발표했다. 이는 개인의 원한이나 영달이 아니라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내고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원하고, 외래 침략세력을 격멸하기 위한 의로운 싸움의 선포였다.
분연히 일어선 전명숙! 동학농민군이 일어섰다는 소식과 함께 전명숙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들도 널리 전해졌다. ‘전全대장은 참말로 영웅이오. 이인으로서 신출귀몰의 재주가 있고 바람을 타고 구름을 휘어잡는 묘술이 있으며 천하의 장사요 세상에 없는 영웅이라. 총검에 맞아도 죽지 않으며 총구멍에서 물이 나오게 하는 법술이 있어 조화가 비상하다’는 소문과 함께 7세의 신동과 14세의 신동이 있어 항상 전 대장을 도와주고 있다는 소문 등이었다.
동학군의 행군은 자못 위용을 갖추었다. ‘보국안민’과 ‘동도대장’ 깃발을 앞세우고 그 뒤에 청 홍 흑 백 황의 오색 색깔로 된 기를 각기 벌려 방향을 표시했다. ‘오만 년 수운受運 대의’란 깃발도 있었다. 동학농민군들 머리에는 흰 수건을 동여매고 있었고, 포사砲士의 어깨에는 ‘궁을弓乙’을 붙이고, 등에는 ‘동심의맹同心義盟’ 넉자를 붙였다. 전명숙은 하얀 갓(白笠)에 하얀 옷(白衣) 차림으로 손에는 염주를 들고 입으로는 ‘삼칠三七’ 주문을 외면서 지휘했고, 행렬은 삼삼오오 진법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행진했다. 최종목표는 전주였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은 그동안 적당히 써왔던 미봉책으로는 더 이상 통할 수 없음을 늦게야 알아차리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관군을 조직하여 전라도 각 진영을 병사와 보부상의 별동부대 800명을 합한 약 2천명의 병력으로 동학농민군과 맞서게 했다. 4월 6일 부안을 떠난 동학군은 고부 쪽으로 길을 잡았다. 목표는 도교산道橋山이었다. 도교산은 황토산黃土山이며 황토산은 곧 황토재였다. 동학농민군의 운명을 가른 황토재 전투! 동학농민군은 최소 4천명이고 관군은 무남영武南營의 정예 3백명을 포함한 2천여 명이었다. 오후부터 시작된 이 전투는 7일 동틀 무렵 새벽녘에 끝났다. 관군의 참패! 전명숙의 뛰어난 전술전략으로 관군은 1천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이후 전세의 승기를 장악한 동학농민군은 양호 초토사 홍계훈의 중앙군과 운명의 결전을 벌여야 했다. 전명숙은 전라도 서해안 지방으로 방향을 돌리며 세를 불리고, 무장을 강화하였다. 이 무렵 동학혁명의 불길은 공주, 청산 등 충청도 전역을 휩쓸기 시작하면서 조선 땅 전체로 확대되고 있었다. 당시 갑오년 조선 땅은 그야말로 혁명 외에는 모든 게 마비된 상태였다. 23일 장성 월평장 황룡촌에서 전명숙은 또 한 번 뛰어난 전술을 구사하여 관군을 패퇴시켰다. 기습을 단행한 관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역으로 섬멸에 가까운 타격을 가했다. 정식 훈련을 받은 군대를 격파하면서 오합지졸이었던 동학농민군은 점점 자신감으로 차올랐고 의식도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4월 27일(양력 5월 31일) 새벽, 동학농민군은 여명의 공기 속에 우뚝 선 풍남문을 보며 결의를 다졌다. 용두치에서 일자진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전주성의 서쪽 문인 패서문沛西門으로 달려가 거의 무방비 상태였던 전주성을 공격했다. 점심 무렵 서문은 저절로 열렸다. 안에서 내응이 있었다. 전명숙의 동학농민군은 전라감사가 집무를 보는 선화당을 비롯한 모든 관청을 점령했다. 호남 제일성이자 조선왕조의 본향인 전주가 동학농민군에게 함락되었다. 토색질이 심한 악질 관리와 부호를 징치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며 백성들을 구제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세워나갔다. 하지만 이를 탈환하기 위한 홍계훈의 관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치르면서 동학농민군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현실은 냉엄했다. 관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전명숙은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고, 정진인鄭眞人처럼 신격화되었던 14세 애기장사(童壯士) 이복용李福用도 생포되어 참수되었다. 동학군은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치면서 총알을 막아준다고 믿던 ‘흰 베의 휘장’(白布帳)이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무능한 조정은 동학혁명을 해결하기 위해 외세인 청나라를 불러들였고 이 사태를 예의 주시하던 일본의 총리대신인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게 했다.
조선 조정이 동족을 처단하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임으로써 동학혁명은 새로운 차원을 맞게 되었고, 전명숙은 민족적 위기에 처해 정세를 냉철하게 판단하였다. 일단 최시형을 비롯한 북접의 호응이 없었고, 외세 개입, 내부의 동요와 양곡의 결핍과 외부와 연락두절 그리고 당시가 농번기라는 점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판단 아래 정부와 화약을 맺으면서, 죄를 묻지 말 것과 각종 폐단을 개혁할 것을 합의하게 되었다. 이른바 ‘전주화약全州和約’이다. 전명숙은 정부가 앞으로 시행할 14개 조로 된 폐정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이 개혁안은 환곡, 전세를 규정대로 하여 착취를 금하게 하는 등 백성들의 절박한 생활상의 요구를 담고 있었다. 6월 들어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명숙 장군은 폐정 개혁안의 실시를 통제하고 감독할 사명을 지닌 농민 대표기관인 집강소를 설치하여 치안과 개혁을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다시 혁명을 이끌다
전주화약 이후 조정은 청일 양국에 철병을 요구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속셈을 가진 두 나라는 기어코 충돌하게 되었다. 6월 21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조선의 주인이며 상징인 고종이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상태였다. 지난 임진왜란 때 도성을 점령하지 못한 한恨 때문이었을까? 일본의 강압에 의한 친일 괴뢰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드디어 6월 23일 일본군은 풍도에 정박해 있던 청국 함대를 선제 공격하면서 청일전쟁(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청과 일본이 조선 지배권을 놓고 벌인 전쟁으로 이 전쟁을 계기로 20세기 세계질서가 짜여지게 된다)이 조선 땅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조선 강토가 외적들의 싸움터가 되고 만 것이다. 청일전쟁의 결과는 일본군의 대승이었다.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조선군대를 무장해제시켰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인적 및 물적 자원들을 약탈하였다. 무능한 관료들은 그들의 만행에 항거는커녕 굴종적인 태도를 취했다. 또한 일본은 서서히 동학농민군을 압박하는 몰이 작전으로 서남해안 쪽으로 병력을 이동하고 있었다.
이런 사태를 예의주시 하던 전명숙은 “왜적 놈이 병사를 내어 우리 임금을 협박하고 우리 백성을 어지럽히니 어찌 인간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흩어져 있던 동학농민군들이 다시 결집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호남을 비롯한 삼남지역과 전국적으로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왕성해졌다. 청일전쟁이 끝나면 일본의 총구가 동학농민군들에게 돌려질 것이 자명한 상태였고 8월 말에 들어서면서 전국 각지의 동학농민군은 거의 들고 일어난 상태였다. 8월 29일 문경지역에서는 일본군과 충돌하기도 했다. 이제 동학농민군은 탐관오리와 철천지원수 일본 그리고 무능한 정부관리들을 한 번에 청소할 수 있는 강력한 통솔력을 가진 지도자를 기다렸다. “조선은 전봉준 손에 달렸고 세상은 동학군의 천지가 된다.” 동학농민군의 3월 기포 때 유행하던 말이었다. 전명숙은 장성에서 손화중을 만나 기포起包의 불가피성을 서로 공감했다. 9월 초에는 대원군의 밀사가 전명숙과 김개남을 만나기도 했다. 일본군은 조선 주둔 병력을 늘리며 동학농민군이 서로 연합하지 못하게 각개격파하며 공주 쪽으로 세력을 집결하고 있었다.
의로운 군대가 일어서고-갑오동학혁명 9월 기포
재기포냐, 아니면 조용히 일본군을 맞아 죽을 것이냐. 어차피 한번은 끝장을 보아야 한다. 세상을 바꾸고 새로운 세상을 세우는 일! 동학군 수뇌부는 다시 혁명의 대열을 이끌기로 결정하고 9월초 재기포를 명령했다. 우선 무기와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 각지에 통문을 보냈다. 최강의 전투력을 지닌 김개남 부대를 설득하지 못한 게 마음이 걸렸다. 무장한 동학농민군들이 도처에서 속속 삼례參禮로 모여들었다. 9월 18일 우여곡절 끝에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은 청산靑山에서 북접주(주4)에게 기포령을 내렸다.
갑오년 1894년 10월 12일 전명숙은 경군과 충청 감영군에 보내는 통문을 발표하고 16일에는 논산에 도착하여 동학 통령 손병희의 호서동학군 5천, 이른바 북접군과 합류하였다. 험한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공주에 먼저 들어가 일본군을 맞아 싸울 계획이었다. 그러나 작전계획이 차질이 생겼다. 초포마을과 노성산성 등에서 군대를 조련하고 통제하면서 각지에 흩어져 있던 전열을 갖추고 세력을 규합하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공주에서 관군과 일본군이 집결하고 방어태세를 갖춰버렸다. 공주 자체가 전략적 요충지이고 산과 금강이라는 천연 방어시설이 있어 점령한다면 탈환하기 어려운 곳이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의 전체 전력은 지역적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최경선과 손화중의 동학군은 서남쪽으로 일본군이 상륙할 수 있어 이를 대비하기 위해 나주지역(나주는 갑오년 당시 동학에 협조하지도 점령되지도 않은 유일한 지역이다)에 주둔했고, 김개남 부대는 전명숙의 제의를 거부 독자적인 움직임을 벌였다. 이제 전명숙 휘하의 동학농민군에게 공주를 둘러싼 혈전은 불가피해졌다. 여러 지점을 동시 다발적으로 공략해 절대 병력 열세인 관군의 병력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노리기로 했다. 동학군은 신앙으로 뭉쳐 있지만, 지역적인 정서가 달라서 일사불란하게 손발을 맞추기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한편 관군과 일본군의 조일연합군에게 있어서도 공주는 동학군을 토벌하는 거점이 되어 주력 병력을 공주 쪽에 집결시켰다. 당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대략 10만에서 20만으로 추산되나, 실제 공주 전투에서 참전한 수는 전명숙이 삼례에서 거느리고 간 4천 명을 합한 2만 명이 주력부대였다. 그 외에 공주를 둘러싼 지역으로 목천 세성산細城山의 김복용 부대와 옥천에서 공주 효포로 진출한 옥천포 부대가 있었다. 공주에 포진한 관군은 충청감사 박제순을 중심으로 한 1만 명과 중앙 각 군영의 병력 1,200명에 서산 군수 성하영, 공주감영 참모관 구완희, 안성군수 홍운섭, 경리청 영관 구상조, 공주 우영장 이기동, 경리대관 백낙완, 증원병력 토벌군 선봉장 이규태 병력 등이 합세했다. 일본군은 선봉장 스즈키 아키라 소위 1개 2중대 200명, 증원병력 모리오 대위 1개 중대 100명, 일본군 1개 대대 500명으로 약 1천여 명이 포진하고 있었다.
동학군의 9월 재기포
전주화약(全州和約) 이후 동학군의 요구대로 폐정개혁안이 시행되고 호남 전역에 집강소(執綱所)가 설치되어 동학군이 치안과 민정을 맡아 잠시 안정되는가 하였으나 일본군의 대궐 침범과 패륜적인 내정 간섭으로 조선은 다시 걷잡을 수 없는 망국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기회만 노리던 일본군이 드디어 아산만 풍도(楓島) 앞바다에서 전단(戰端)을 열고 청군에 포격을 개시하니 이로써 청일전쟁이 불을 뿜기 시작하니라.
이후 청일전쟁에서 연전연승하던 일본은 평양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조선의 내정에 더욱 깊이 개입하며 본격적으로 동학군 토벌에 나서거늘 이에 외세에 기울어 가는 국운을 통탄한 동학군의 수뇌들이 9월에 전주 삼례에서 회동하여 화전(和戰) 양론의 대립 끝에 다시 기병을 결정하니 마침내 동학군은 전명숙을 대장으로 하여 손화중(孫華仲)은 무장에서, 김개남(金開南)은 남원에서, 김덕명(金德明)은 금구 원평에서, 차치구와 손여옥은 정읍에서, 최경선은 태인에서, 정일서는 고부에서, 류한필은 함열에서, 오동호는 순창에서, 기우선은 장성에서, 손천민과 이용구(李容九)는 청주에서 일어나 삼남의 강산과 전국을 뒤흔드니라. (도전 1편 52장)
아! 우금치 그리고 피노리
이제 갑오동학혁명의 향방을 가르는 공주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20일 동학 주력부대는 경천점敬天店방면으로 진격했다. 공주 공방전의 전초전은 목천 세성산에서 일어났다. 이곳은 공주와 청주로부터 서울로 통하는 요충지였다. 세성산 요새지를 지킨 김복용의 동학군은 일본군과 관군 이두황 부대를 맞아 치열하게 저항하였지만, 우월한 화력을 이기지 못하고 세성산은 함락되었다. 김복용은 이때 관군에 체포, 총살을 당했다. 만일 이때 세성산에 웅거한 동학농민군이 정예부대인 남접 농민군의 후원을 얻어 그길로 북상하였다면 서울은 큰 위협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기를 놓쳤고, 이 세성산 전투 패배 소식은 동학농민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다.
널치 고개를 넘어가면 23일 처음 공주로 진입하기 위해 돌파를 시도한 효포孝浦가 나온다. 우금치에서 패배하고 밀려올 때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았던 곳으로 관군이 이때 농민군 복장으로 변장해 기습했던 곳이기도 했다. 10월 24일 이른 아침부터 이인역利仁驛에서 시작한 전투는 양측이 치열한 공방을 벌였으나 동학농민군의 패배로 끝났다. 전열을 정비한 후 이 싸움의 결정판인 우금치고개로 집결하였다. 우금치는 소를 가지고 넘어가지 말라(禁)는 말처럼 약탈이 심했다는 기록이 있고 현지에서는 금金으로 표기되기도 한 지역이었다. 우금치를 현지 주민들은 우금재라 부른다. 우금재의 최고 봉우리를 한자로 견준봉이라 표기하나 현지 주민들은 ‘개좆백이’라 한다. 아주 험준해서 오를 때 욕을 한다는 어감이 풍긴다. 앞서 효포는 탐색전의 성격이었지만 이곳은 운명을 걸고 돌파를 해야 했다. 11월 9일 동학군은 죽음을 무릅쓰고 공격을 퍼부었으나, 이미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을 무모하게 일방적으로 돌진하는 전략으로 뚫을 수는 없었다. 일본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동학농민군은 극심한 피해를 당했다. 차라리 일방적인 학살에 해당할 만큼 동학군은 큰 희생을 치르며 동학농민군은 결국 패하고 말았다.
차가운 비와 추위는 숙영을 해야 하는 농민군에게 큰 장애요인이 되었는데, 추위 극복을 위해 피웠던 불은 부대 위치과 규모를 노출시켰다. 체계적인 탄약 보급도 없었고 무장 면에서도 동학군의 주력무기인 활은 근대전에서 효용에 한계가 있었고, 화승총(총구장전식, 유효 사거리 70미터, 30초당 1발) 화약은 비가 오면서 젖어버렸다. 일본군은 자동점화 장치가 되는 스나이더 소총(후장後裝식 장전, 유효사거리 350미터, 초당 1발)을 사용하여 비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았다. 망원경 등의 장비로 병력이동 정보를 수집해 신속하게 군대를 이동 배치한 관군에 비해, 파발과 탐보로 맞선 동학군은 미리 계획된 전술에만 따를 뿐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할 수가 없었다. 정보수집 능력이나 지휘통제 체제가 일관되지 못한 동학농민군의 패배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전명숙은 앞날을 기약하면서 통분의 눈물을 흘리며 퇴각하였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모두 패하여 후퇴를 거듭하였다. 태인에서 세를 규합하여 일전을 겨뤄 전세를 돌려보고자 하였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대세는 기울었다. 동학혁명의 불길은 완전히 꺼지고 말았다. 갑오년도 저물고 전국을 진동시켰던 혁명의 물길도 가라앉았다. 태인 전투 패배 후 새로운 준비를 위해 서울로 상경하려 한 전명숙은 순창 피노리避老里(전북 순창군 쌍치면 소재)에 있는 옛 부하 김경천을 찾아갔다.(주5) 하지만 어찌 알았으랴! 김경천은 전명숙 일행을 반갑게 맞아 주는 듯하면서 전주퇴교全州退校 한신현韓信賢에게 달려가 밀고하여 체포당하게 했다. 12월 2일 체포된 전명숙은 일본군에게 넘겨져 전주와 공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이 하나 둘 말없이 사라져 갔고(주6), 일본군은 가혹한 토벌로 삼남 일대에서만도 약 30만 명 이상이 학살당하였다.
동학군의 패망
그 뒤에 동학군은 11월 25일 원평 접전과 27일 태인 접전에서 연패하여 전군이 모두 흩어지니 이로부터 동학군이 전국에서 닥치는 대로 피살, 포살되니라.
증산께서 조선의 민중들에게 큰 시련과 좌절을 안겨 준 슬픈 겨울을 보내고 스물다섯 살의 봄을 맞으시니라. 그러나 따뜻한 봄날에 차가운 비극의 소식을 들으시니, 체포당한 김개남, 김덕명, 전명숙, 손화중, 최경선 등 동학의 거두들이 삼사십 대의 젊은 나이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하니라. (도전 1편 62장)
전명숙은 진실로 만고명장이라
일본 공사관 감방에 갇힌 전명숙은 1895년 2월 9일부터 3월 10일까지 법정 심문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전명숙의 불굴의 투지와 기개에 감복한 일본인들은 회유하고자 갖은 수단을 다 사용하였으나, 그는 “구구한 생명을 위해 살길을 구함은 내 본의가 아니다. 정의를 위해 죽는 것은 조금도 원통한 바 없으나 오직 역적의 이름을 받고 죽는 것이 원통하다”고 대성일갈하였다.
수운 최제우가 시천주 신앙과 다시 개벽을 선포하였다면, 전명숙은 동학혁명을 일으켜 이를 현실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참담한 희생만 남기고 실패로 돌아갔고, 조선의 대들보는 무너졌다. 이후 조선은 망국적 징후에 시달렸고,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며 개혁의 몸부림을 쳤으나 실패. 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비록 패장이었지만 조선의 영웅 전명숙. 작은 체구에는 큰 뜻과 엄정한 기상과 강건한 투지를 지니고 있던 만고萬古의 명장이었다. 갑오년에 보여준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의 동학혁명은 성경신誠敬信 없이는 나설 수 없는 길이었다. 1895년 3월 29일, 전명숙을 비롯한 동학군 지도자는 다 함께 처형당했다. 당시 나이 41세. 교수대 앞에서 절명시를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時來天地皆同力(시래천지개동력) 때가 와서 하늘땅과 함께 힘썼으나
運去英雄不自謀(운거영웅불자모) 운이 가니 영웅도 꾀할 바 없구나.
愛民正義我無失(애민정의아무실) 백성 사랑 올바른 길 무슨 허물이더냐.
爲國丹心誰有知(위국단신수유지) 나라를 사랑한 붉은 마음 뉘 알리요.
전명숙이 죽은 후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노래로 그를 애도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백의한사白衣寒士로 일어나서 능히 천하를 움직인 전명숙. 그가 주도한 동학혁명은 조선 역사에서 근대를 열었고, 이후 현대사에 일어난 모든 대변혁의 시발점이 되었다. 조선 후기 국가 통치질서가 극도로 문란해지자 감사나 아전 등에 의해 백성에 대한 수탈이 극심해졌다. 여기에 신분제도의 질곡과 압제 속에서 백성들의 쌓인 원한은 뼈에 사무쳤다. 조세제도와 그 수탈 방식은 그 사회지배층의 통치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배층은 태산 같이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 갔고, 백성들은 이를 거부할 힘도 없었다. 악랄한 관료들은 이를 통해 치부하면서 외세에게 빌붙어 자리보전이나 하였고, 나라의 온갖 이권을 넘겨주었다. 이를 전명숙은 외면할 수 없었다. 각종 세금을 통해 백성들을 쥐어짜던 탐관오리들의 탐학이 갑오동학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이는 갑오개혁을 통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세금을 감하게 되기도 했다. 또한 신분제도 폐지라는 과감한 의지와 행동 역시 갑오개혁에 반영되어, 공식적으로는 신분제가 철폐되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을 역사의 현장에서 직접 보신 증산상제님께서는 전명숙의 공덕을 인정하여 만고명장으로, 만고역신萬古逆神의 주벽으로 삼았다. 역신은 쾌도난마의 의기로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으려다 역적의 누명을 쓰고 무참히 죽음을 당한 영신靈神을 뜻한다. 이런 역신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한 주벽신으로 삼고 인류사의 새 장을 열어 놓는 천지공사의 가장 중요한 핵심문제인 역신해원의 머리가 되게 해 주신 것이다. 또한 후천 개벽기에 한민족의 생사를 판단하는 조선 명부대왕에 임명하여, 죽음의 질서를 다스리게 했다.
지금 전명숙은 후천 통일문화권으로 궤도 진입해 들어가는 장구한 역사의 대세인 남조선 뱃길에서 도사공(뱃사공의 우두머리)이 되어 인류가 대망하여 왔던 진인, 곧 성주聖主가 타고 있는 남조선 배를 지휘하고 있다. 고난을 이겨내어 천추만대에 길이 빛나는 도덕군자의 모든 성신들과 함께 이 배를 운전하며 후천선경 건설로 나아가고 있다. 변하지 않는 일관된 마음으로 천지와 더불어 한 마음(一心)을 지닌 전명숙. 혼란한 세상을 정의롭게 바로잡으려다 역적의 누명을 쓰고 무참히 참수당한 그는 이제 천지의 주인이신 상제님께 공덕을 인정받아 후천선경 건설의 돛을 올린 창업군주의 첫머리가 되었고, 만고명장의 사명기도 받게 되었다(5편 178장, 5편 339장 참조).
만고명장 전명숙의 공덕
전명숙(全明淑)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건지고 상민(常民)들의 천한 신분을 풀어 주고자 하여 모든 신명들이 이를 가상히 여겼느니라. 전명숙은 만고(萬古)의 명장(名將)이니라.
벼슬 없는 가난한 선비로 일어나 천하의 난을 동(動)케 한 자는 만고에 오직 전명숙 한 사람뿐이니라. 세상 사람이 전명숙의 힘을 많이 입었나니 1결(結) 80냥 하는 세금을 30냥으로 감하게 한 자가 전명숙이로다. 언론이라도 그의 이름을 해하지 말라. (도전 4편 11장)
동학혁명군 최고의 돌격대장, 김개남金開南(1853~1895)
박경리 선생의 『토지』에서 모든 갈등의 시발점 역할을 하는 인물이 동학군 지도자 김개주이다. 이 김개주라는 인물은 실제 갑오동학혁명 당시 농민군 중 가장 강력한 전투력과 급진성을 지닌 김개남金開南 장군을 모델로 했다. 실로 김개남 장군은 불꽃같은 삶을 산 진정한 혁명의 지도자였다.
김개남 장군은 1853년 철종 4년 도강道康 김金씨의 집성촌인 태인현 산외리 동곡리 윗지금실에서 부잣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김대흠金大欽(1817~?) 초명은 영주永疇, 자는 기선箕先·기범箕範이었다. 개남이라는 이름은 스스로 밝히길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개남開南 두 글자를 손바닥에 써서 보여 주었기 때문에 이름을 ‘개남開南’으로 고쳤다고 했다. 이는 ‘남조선을 개벽한다, 남조선을 연다’는 의미로 이상사회를 건설한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이후 타협을 모르고 후퇴가 없는 강경파로 동학혁명군을 이끌었다.
어려서부터 병서를 많이 탐독했고, 현실개혁의 의지가 충만한 인물로 주로 사귀던 사람들은 시세에 불평불만을 가진 사람, 기개가 있고 호걸스러운 사람, 사회현실의 모순에 신음하던 일반 서민들이었다.
동학에는 1890년경에 입도하여 동학의 시천주신앙侍天主信仰과 후천개벽사상後天開闢思想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수행과 포교에 힘써, 1891년 두령頭領, 즉 접주가 되었다고 하고, 1892년 6월 처음으로 이곳에 순회 온 동학의 제2세 교조 최시형崔時亨이 태인 지금실 김개남의 집에서 머물렀고, 이때 그는 여름 옷 다섯 벌을 지어 바쳤다고 한다. 태인 접주로 활동하면서 동족인 도강 김씨 친족들을 동학으로 많이 포교하였다.
이를 한말의 유학자 매천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도둑들(동학군)이 처음 고부에서 봉기할 적에 그 괴수는 태인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전라 좌우도에서 태인접이 으뜸이었다. 전봉준과 김기범은 나이가 마흔 살쯤 되었다. 기범의 일가붙이는 대대로 태인에 살았는데, 사람들이 도강 김씨라고 불렀다. 기범은 사납고 무단스러워 난을 일으킬 적에 여러 일가붙이가 모두 따랐기 때문에, 도강 김씨에 스물네 명의 접주가 있었다.”
또한 『갑오약력』을 보면, 김개남의 종형從兄인 김삼묵은 수천 명을 거느렸던 동학두령이었다고 한다.
김개남 장군은 뜻이 통하는 고부 접주 전봉준全琫準, 무장 접주 손화중孫華中, 금구 접주 김덕명金德明, 주산 접주舟山接主 최경선崔景善 등과 각별한 친교를 맺게 되었다. 1892년 전국 교도들이 전라도 삼례參禮에 모여 탐관오리의 제거와 교조 신원운동을 폈을 때, 호남 접주들과 더불어 많은 신도들을 동원하여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1893년 보은 장내리에 수만의 동학교도들이 모여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양斥倭洋의 깃발을 내걸고 일대 정치적 민중시위를 벌였을 때, 또다시 호남 교도들을 동원, 태인포泰仁包라는 포명과 함께 대접주의 임첩任帖도 받았다. 그러나 두 차례의 평화적 민중시위가 성과 없이 끝나고 각지에서 동학교도에 대한 가혹한 탄압이 가해지자, 호남지역의 강경파 접주들은 독자적인 대책을 모색하게 되었다.
1894년 전명숙의 주도로 ‘고부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손화중과 함께 기포하여 4월에는 백산白山에 호남창의소湖南倡義所를 설치하고, 전명숙을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한 뒤, 손화중과 함께 총관령總管領직을 맡았다.
전주화약全州和約 후 나주·남원·운봉 등 세 고을이 집강소 설치에 불응하므로,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의 요충지인 남원을 공략하기 위해 3천의 병력을 동원, 남주송南周松을 선봉으로, 김중화金重華를 중군으로 하여 출동, 남원성에 입성하였다. 도망치던 남원부사 이용헌李龍憲을 생포하고 성을 장악, 이 후로 남원에 계속 주둔하면서 전라좌도를 관할, 폐정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때 동학농민군 규모는 7만여 명이었다. 이로부터 김개남의 남원 100일 천하가 시작되었다. 남원부성 북쪽 교룡산성을 중축하는 한편, 구례 화엄사에 식량과 무기를 비축하여 기병에 대비하였다. 그가 남원에 웅거하고 호령할 적엔 천민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다시 말해 노비, 백정, 승려, 장인, 재인을 중심으로 한 천민부대로 그들은 온갖 차별의 굴레를 벗기 위해, 아니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해 한바탕 활개를 쳤다. 천민들은 양반이나 사족을 가장 미워해 길에서 갓을 쓴 사람을 만나면 “네가 양반이냐”고 윽박지르며 갓을 벗겨 찢어버리기도 하고 제 머리에 얹어 쓰고 다니며 횡행했다. 노비로 농민군을 따르던 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지 않은 노비들도 주인을 겁주며 노비문서를 불태웠고 강제로 양인 신분을 얻으려 했다. 더러는 그들의 상전을 묶어 주리를 틀기도 하고 곤장을 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김개남 군에서 제일 많았다. 김개남은 이들을 끌어안고 스스로 왕이라 자처했다고 하며, 흥선대원군의 밀사를 꽁꽁 묶어 죽이려 했고, 전명숙에게 협조를 아끼지 않은 전라감사 김학진과는 대화를 끊고 전혀 상대하지 않았다. 협조를 거부하는 수령을 서슴없이 처단하는 등의 강경노선을 추구해, “광망포학하기가 여러 도둑 중에서 으뜸이어서 사람들이 호랑이와 이리같이 두려워했다”(『오하기문』)고 한다. 이런 한 맺힌 천민집단의 폭발한 해원의 모습은 그가 이끌던 군대가 동학혁명군 중 최고의 전투력과 급진성을 갖도록 했다. 이후 남원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인근 금산, 무주, 진안, 장수, 용담, 임실, 순창, 구례, 곡성, 담양을 총괄하는 대접주로서의 위세를 떨쳤다.
9월말 2차 기포 당시 전명숙이 남원에서 함께 북상할 것을 요청했으나, “남원을 점령하고 49일을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참서讖書의 기록을 구실로 출병하지 않았다. 이후 지리산 중심의 정예 포병 8천 명을 이끌고 금산, 청주를 거쳐 서울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11월 10일 남원에서 정예 부대 5만 명을 이끌고 11월 12일 전주에 재입성하여 전라감사 김학진을 체포, 3일간 전주에 머무르면서 고부 군수로 부임 중이던 양필환梁弼煥을 참수하고 군비를 정비하여 15일 서울 진격에 나섰고 이후 한 달간 금산 일대에 머물렀는데, 이때 전명숙이 이끌던 동학 주력군은 공주 지역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충청도 진잠현鎭岑縣(지금의 태전광역시)을 점령, 이튿날 신탄진新灘津을 거쳐 13일 새벽 청주를 공격하였다. 이때 청주를 공격한 이유는 논산에 집결한 전명숙 부대가 그에게 후원과 연합작전을 계속 요청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못 이겨 1백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후퇴하게 되었다.
청주 싸움에서 패하자 진잠을 거쳐 연산連山 쪽으로 남하, 간신히 태인으로 돌아왔다. 매부 서영기徐永基의 집(태인 너듸四升마을: 정읍시 산외면 장금리)에 숨어 있던 김개남을 옛 친구인 임병찬(면암 최익현의 제자로 항일의병장, 1851∼1916)은 김종섭을 시켜 송두용宋斗鏞의 집(종송리種松里: 정읍시 산외면)으로 유인하게 했다. 종송리는 회문산回文山 자락으로 너듸마을보다 험하고 높은 곳에 위치한 곳으로 안전하리라 여겼던 것이다. 12월 1일 새벽 임병찬의 밀고를 받은 전라감사 이도재李道宰는 혁명군 진압을 위해 내려온 강화병江華兵을 이끌던 황헌주黃憲周로 하여금 그를 체포하게 했다. 황헌주가 김개남이 숨어 있는 집을 포위하고 어서 나오라고 소리쳤다. 이때 마침 김개남은 측간에서 대변을 보고 있다가 “올 줄 알았네. 똥이나 다 누고 나가겠네”라고 대꾸했다 한다. 이렇게 해서 기개에 찬 영웅은 잡혔다. 그런데 이곳은 전봉준이 잡힌 피노마을과 불과 20여 리 거리에 있다. 두 지도자는 서로 만나 재기를 도모하려 각기 이곳으로 왔다고 일부 기록은 전한다. 그러나 서로 만나지 못하고 한 사람은 옛 부하, 한 사람은 옛 친구의 밀고로 12월 2일 한날에 잡혔다. 묘한 인연이요, 운명이다.
전라감사 이도재는 그를 심문하다 기개와 서슬에 깜짝 놀랐다. 또한 김개남의 명성에 겁을 먹고 서울로 압송하는데 위험을 느껴, 당초 서울로 압송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1895년 1월 8일 전주장대全州將臺에서 임의로 참수하여 배를 갈라 간을 큰 동이에 담으니 보통 사람의 것보다 컸다 한다. 원수진 사람들이 그 고기를 빼앗아 씹기도 하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한다. 그의 머리만 함지박에 담아 서울로 보내 1월 20일 서소문西小門 밖에 3일간 효수한 뒤 다시 전주로 내려 보내 달아매었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그가 잡혀갈 적에 백성들은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그 많던 군대 어데 두고 짚둥우리가 웬 말이냐” 또는 “개남아, 개남아, 진개남아, 수많은 군사 어데 두고 전주야 숲에는 유시遺屍 했노”라고 노랫가락으로 안타까워했다. 전라도 사람들은 ‘김’을 ‘진’이라고 곧잘 발음해서 ‘진개남’이라 불렀다.
갑오동학혁명 100주년인 1994년 5월 뜻있는 이들의 성금으로 전주 덕진공원德津公園에 동학혁명의 세 영웅을 추모하는 비석을 세웠다.
갑오동학혁명군의 실질적인 주역, 손화중孫華仲(1861~1895)
갑오동학혁명이 일어나기 한 해 전 가을쯤. 전라북도 고창 선운사 도솔암 마애석불 앞에는 한 패의 무리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미 그곳 승려들을 한 군데로 밀쳐서 새끼줄로 묶어 놓고, 청죽 수백 개와 새끼줄 수십 타래로 사다리를 만들어 놓은 300여 명의 장한들은 새로운 시대를 염원하면서 모였다. 칠송대라는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 황토 빛이 도는 바위벽에 음각과 양각을 혼합해 새겨진 14m 미륵불은 백제 위덕왕이 검단대사黔丹大師에게 부탁해 새긴 미륵불상. 본래는 불상 속 복장에 주로 다라니경이나 금붙이 같은 귀중품 등을 넣는 경우가 있는 데, 이곳 미륵불을 조성할 당시 오목가슴 부위를 사발만한 크기로 둥그렇게 파낸 다음, 여기에 비결서를 집어 넣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왔다. 이걸 꺼내는 사람이 새로운 용화세계의 주인이 된다는 전설이 내려왔는데 이제 그 비결서를 꺼낼 인물이 등장한 것이다. 바로 동학 무장포茂長包 접주 손화중이었다. 비결을 꺼낸 손화중은 “후천개벽의 시대가 왔으며, 머지않아 미륵이 내려와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제하리라”고 선언하였다.
손화중(孫化中, 孫華仲)은 전봉준, 김개남과 함께 갑오동학군을 일으킨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그가 이끈 무장포는 일대에서 가장 큰 동학조직이었다. 고부혁명 후 안핵사 이용태가 고부민을 동학교라는 혐의를 씌워 탄압하자 전봉준은 무장으로 와 처음으로 기포해 고부 관아를 점거했다. 손화중은 지역사회의 인심을 얻었던 재력가로, 탁월한 조직가적인 면모를 지녔던 인물이다. 혁명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초기 단계에 인원 동원이 필수적인데, 갑오년이 되기 한 해 전 가을인 이즈음 손화중포는 전북 고창의 선운사 도솔암 미륵불의 배를 쨌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호남 일대를 돌았다. 사실 여부를 떠나 새로운 세상을 열망한 민중들에게는 이만한 선전 선동이 없었다. 또한 고창 선운사는 조선 후기 반체제 비밀결사 승려들의 조직인 당취黨聚(훗날 땡초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들이다. 미륵불 세상을 염원한 승려집단일 수 있다)들의 거점이었다. 영광 불갑사 해불암의 금화錦華가 당취들의 대장이고 당취들의 훈련도장이 선운사였다. 금화는 전명숙에게 병법을 전해준 스승으로 동학군은 해불암은 공격하지 않고 보호했다고 한다.
1861년 철종 12년인 신유년 전라북도 정읍현井邑懸 남일면南一面 과교동科橋洞에서 부친 손호열孫浩烈 모친 평강平康 채씨蔡氏 사이에서 태어난 손화중은 본관은 밀양密陽, 이름은 정식正植, 자는 화중華仲·和中·化中, 호는 초산楚山이었다.
1881년(고종 18)에 처남 유용수柳龍洙를 따라 지리산 청학동에 갔다가 동학에 입도入道하여 수도하다가, 1883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정읍 군내 농소리農所里·입암리笠巖里·신면리神綿里·음성리陰城里 등지에서 포교행각을 하며 세를 규합하여 전라북도 무장茂長에 가서 포교소를 설치하였다. 언제 접주가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1892년 전라북도 삼례의 교조敎祖 신원운동伸寃運動에 많은 신도를 동원하는가 하면, 1893년에는 광화문 복합상소 때 호남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으며, 충청북도 보은 장내리帳內里 집회에서도 많은 신도들을 동원하는 등 탁월한 조직력과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1894년 3월 동학혁명에서는 김개남과 함께 총관령을 맡았으며, 혁명군의 전주화약 후에는 전라남도 나주 지방으로 가서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제2차 동학혁명운동이 일어나던 9월 혁명 때는 일본군이 남해안 쪽에 상륙할 것을 대비해 북상 농민군에 합류하지 않고, 최경선崔景善과 같이 나주 부근에 주둔, 광주 나주 일대를 지켰다. 전명숙이 이끄는 동학 주력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대패한 뒤, 나주성을 공격했으나 지형 관계로 실패하고 12월 1일 농민군을 해산하고 고창군 부안면 안형리로 피신했다. 전라북도 흥덕興德에 있는 이모李某의 재실齋室에 숨어 있었으나, 1895년 1월 6일 재실지기 이봉우李鳳宇의 고발로 체포되었다. 전주감영으로 압송되었다가 서울로 이송, 여러 차례의 심문 끝에 전봉준·김덕명金德明·최경선崔景善·성두환成斗煥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
손화중은 혁명의 부싯돌 역할을 하였다. 전명숙이 전체 전략을 이끌었던 전략가형 지도자이고 김개남은 가장 전투적인 무장대원을 이끈 행동대장이라면 손화중은 조직 구성과 자금력 등으로 혁명군의 살림을 맡았던 인물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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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의 못 다한 한국사 이야기』(이이화, 푸른역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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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1-수운의 삶과 생각』(표영삼, 통나무, 2004)
『우리 역사를 바꾼 전쟁들』(이희진.김우선, 책미래, 2014)
『조용헌의 휴휴명당』(조용헌, 불광출판사, 2015)
주1) 명숙明淑은 전봉준全琫準의 자字이다. 전봉준은 농민군을 지휘하면서 본명보다 명숙으로 널리 알려졌고, 다른 혁명군 지도자들 역시 대개 본명보다 자를 사용하였다.
주2) 전명숙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여섯 살 때인 1859년 서당에서 글공부를 했다. 13세에는 백구시白驅詩를 지어 뛰어난 문재文才를 보여주었다. 이런 재능은 훗날 창의문 등을 짓는 데 유감없이 발휘되기도 했다.
自在沙鄕得意遊자재사향득의유 모래불을 고향 삼아 마음껏 노닐고
雪翔瘦脚獨淸秋설상수각독청추 눈같이 흰 나래 가는 다리로 맑은 가을날 홀로 섰구나
蕭蕭寒雨來時夢소소한우래시몽 부슬부슬 찬비 속에 홀로 꿈꾸고
往往漁人去後邱왕왕어인거후구 때때로 고기잡이 가고나면 언덕이 노니네
許多水石非生面허다수석비생면 맑고 맑은 물가의 바위 낯설지 아니하고
閱幾風霜已白頭열기풍상이백두 얼마나 많은 풍상을 겪었던지 머리도 희었구나
飮啄雖煩無過分음탁수번무과분 마시고 쪼는 것이 쉴 새 없으나 분수를 아노니
江湖魚族莫深愁강호어족막심수 강호의 고기떼들아 너무 근심치 말지어다.
주3) 당시 전명숙과 흥선대원군 간에 밀약설이 있다. 『천도교창건사』에는 전봉준이 갑오년 기병하기 3년 전에 서울에 올라 대원군 문하에서 출입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대원군이 소망이 무엇인지 물으니 “제 흉중胸中에 품은 뜻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한 번 죽고자 하는 마음뿐이오”라며 벼슬을 원한 것은 아니라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이후 혁명 당시에도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 받았으며 9월의 2차 기포는 대원군이 사주했거나 적당한 때를 알려줬다고도 한다. 여러 주장이나 자료에도 불구하고 전명숙과 대원군이 내통했는지 여부는 쉽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전명숙이 대원군의 사주를 받거나 비호를 기대했던 게 아니고 대원군을 이용하여, 민란 수준을 넘어 그 이상으로 지지기반을 확대하고, 민중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보인다.
주4) 1863년 최시형은 최제우에 의해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에 임명된다. 이 표현이 1900년대 이후에는 북접주인北接主人 또는 북접법헌北接法軒으로 바뀐다. 남접이란 용어는 갑오동학혁명 이후에 등장한다. 『전봉준공초』에는 남접을 호이남湖以南(전라도 일대)으로 호중湖中(충청도 일대)을 북접이라고 지칭한 대목이 나온다. 이에 대해 박맹수 교수는 남접과 북접에 관한 전봉준의 진술은 동학 조직 내의 어떤 실체적 조직을 가리키는 의미가 아니라 편의상 지역 기준으로 나눈 것에 지나지 않으며, 남북접 대립설은 허구라고 지적하고 있다.
주5) ‘장래 백만대중의 우두머리가 되어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될 것이나 경천을 조심하라’는 점괘에 따라 충청도의 경천京川이란 시냇가를 넘자 안심했을 정도로 전명숙은 경천을 계룡산 남쪽의 경천이란 지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의 공격을 주저하다 공주성에 들어가는 시각이 늦었고 결국 패하는 요인이 되었다고 한다.
주6) 반면 동학혁명을 유발시킨 조병갑, 김문현, 이용태, 조필영 등은 이해 7월 방면되고 오히려 승진까지 하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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