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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왜곡>한국과 일본으로부터 훈장받은 식민사학자 이병도-손자는 서울대 총장 본문

역사 이야기/잊혀진 역사

<역사왜곡>한국과 일본으로부터 훈장받은 식민사학자 이병도-손자는 서울대 총장

세덕 2016. 11. 18. 09:50

<역사왜곡>한국과 일본으로부터 훈장받은 식민사학자 이병도-손자는 서울대 총장
<역사왜곡>한국과 일본으로부터 훈장받은 식민사학자 이병도-손자는 서울대 총장 

  

▲을사 5적중의 한 사람인 이완용 . 1907년 8월 10일 군대해산을 하는 등 일련의 친일공로로 일본정부로부터 욱일동화장(旭日桐花章)을 받았다. 1909년 12월 이재명(李在明)의 칼을 맞았지만 목숨은 건졌다.  

 친일파로 규정된 사람의 자손들이 당당하게 국립중앙박물관장(이건무)에 임명된데 이어 서울대학교 총장에 이병도의 손자 이장무씨가 올랐다.
 

▲증산도 도장에 모셔진 단군왕검영정     


서울대 총장인 이장무씨의 우봉리씨 가계의 증조부는 우리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은 을사오적중 하나인 리완용이다.또 그의 직계조부는 조선사편수회에서 수사관보로 근무하며,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왜곡하고 우리의 자랑스러운 단군조선의 역사를 신화화 시킨 대표적인 친일 사학자인 이병도이다.

이런 사람이 우리나라 교육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국립서울대학교의 총장에 올랐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그가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임명되면 자신의 조부인 이병도의 논리를 비판하거나 친일 잔재청산을 위한 객관적인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두 손자는 역사앞에 할아버지를 대신해 유감을 표명하고 이해와 용서를 구하는 대신,할아버지를 무조건 옹호하거나 공론화하는 기자(사람)에게 법률적 책임을 묻겠다고 경고하는 적반하장의 강경한 태도를 보인바 있다.[인터넷 日刊 플러스코리아: http://pluskorea.net/
 ♦ 식민사학자와 민족사학자의 다른 점

식민사학자들은 조국을 배신하고 일본왕에게 충성하며 모두 다 죽을 때까지 명예와 부귀를 누린 반면, 민족사학자는 하나같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모두 다 처참하게 참살되어 조국에 목숨을 바쳤다. 
 


♦ 이병도는 한국과 일본에서 훈장을 받았다.
한국의 역사를 말살, 왜곡한 반도조선사를 정립한 공로를 인정받은 이병도는 일본 왕으로부터 일등 공신 훈장을 받았다.
 
식민사학자들은 한국침략과 지배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한국인의 천손사상(天孫思想)을 말살하고, 사대주의와 식민주의적 사상(思想)을 구축하여 한국인을 일본인화 하고 민족혼을 말살하여 조국이 일찍 멸망시키는 과업에 심혈을 쏟아 무수한 위서(僞書)를 저작하여 마치 민족사학을 정립한 공로자(功勞者)처럼 철저히 위장했다.

즉 식민사학자들은 일왕에게 충성심을 더욱 높이기 위하여 서로 경쟁적으로 무수한 위서(僞書)를 저작 발표하여 일제의 만행에 적극 동조하며 민족혼을 말살했다.
 
식민사학자들 중에서 지략과 위장술이 뛰어난 이병도는 우리나라가 일찍 멸망(滅亡)해야 자손만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일본 학자들 보다 도 더욱더 악질적인 반민족적 범행을 자행하여 한민족의 정기를 철저히 말살하여 일왕의 일등 공신으로 인정받아 큰 포상금과 함께 훈장을 받았던 것이다.

이병도는 민족사학을 정립한 선구자로 훈장을 받았다. 

 ▲  이병도 전 문교부장관


이병도는 서울대학 사학과 교수, 문교부 장관 등을 역임하며 날개를 달고 합법적 범행을 자행한 이병도의 사기행각을 깨닫지 못한 한국의 정부당국자들은 오히려 민족사학을 정립한 공로자로 인정받아 한국정부로부터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학술원 공로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5.16 민족상 등을 수상했다. 지략에 뛰어난 이병도는 식민사학자에서 민족사학을 정립한 “민족사학자로 둔갑”했으나 그 누구도 민족반역자로 지적하지 않고 있으니 세계사적으로 희대의 사건이 아니고 무엇인가?


식민사학자가 민족사학자로 변신한 이병도의 처세술

일왕의 陰謀(음모)에 따라 우리나라 역사 왜곡의 주범자 이병도(1896-1989)는 노론(老論) 유력 가문의 우봉(牛峰) 이씨이다. 1907년에 열두 살의 나이로 서울에 올라온 이병도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불교고등학교를 찾아가 일어(日語)를 배웠다. 나라를 빼앗겨 대한독립을 위하여 수많은 애국청년 학도들이 조국에 목숨을 바쳤으나 이완용과 이병도는 애초부터 항일 의지 따위는 뇌리에 없었다.

매국노 이완용의 후손 이병도는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의 장기적 계략에 포섭되어 일본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와세다대학 사학과에 들어가 1919년에 졸업했다. 이때 일인 학자 요시다(吉田東伍)가 이미 한국의 역사를 변조하여 저술한 일한고사단(日韓古史斷)을 독파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왜곡의 주역이었던  일인 학자 동경제국대학의 이케노우치(池內宏)와 와세다대학의 강사 츠다(津田左右吉)로부터 소위 문헌고증학, 실증사학의 기초를 다지며 한국역사 왜곡에 대한 개인적인 세뇌 지도 교육을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귀국한 이병도는 이케노우치(池內宏)의 추천을 받아 1925년에 설치된 『조선 반도사』 편수회의 핵심위원으로 들어갔다. 1920년대 연희전문․ 보성전문․ 이화여전 등 민립대학이 설립되자 일본은 경성제대(서울대)의 문을 열어 식민사학을 맹렬히 전파하여 『조선 반도사』를 합리화 시켰다.

이외에도 호소이(細井肇)를 비롯해 아오야나기(靑柳南冥) 같은 일본 국수주의 국학자들도 조선사편수회와 경성제국대학과 함께 식민사학을 무수히 쏟아내어 조선국은 고대로부터 반도국가로서 미개한 민족이라고 역설하고 있었다.

일왕의 음모에 의하여 『반도 조선사』편찬에 착수한 일제는 우리나라를 고대부터 반도국가로 왜곡시킨 반도 조선사를 청년학도들에게 세뇌시켜 고착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사편수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등에 한4군(漢四郡)의 강역을 한반도 내의 존재 설을 입증하기 위해 무수한 위서를 발간하여 강력히 주장하였다.

즉 이병도는 당시 독립관청으로 승격된 총독부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는 『조선사 편수회』에서 발행하는 기관지에 삼한과 삼국은 고대부터 한반도 중부이남 지역에 위치한 부족국가로서 중국에서 설치한 한사군(漢四郡 : 낙랑(樂浪),임둔(臨屯),현도(玄菟),진번군(眞番郡)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고대부터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이론을 수없이 쏟아낸 일본 학자의 학설에 합리화하고 역사왜곡에 일본 학자들 보다도 더욱 더 광분하였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사학자, 호암 문일평 선생 

   
1926년에 문을연 현 서울대 전신인 경성제국대학도 식민사학을 전파한 또 다른 기관을 만들었다. 1930년 5월 경성제대 교수와 조선사편수회원과, 조선총독부 관리들이 총동원되어 청구학회(靑丘學會)라는 어용 학술단체를 조직하는데 이들 역시 조선총독부의 막대한 자금지원을 받았다. 
 일제의 한반도 및 대륙침략 의도에 발맞춰 조선과 만주를 중심으로 한 극동문화 연구와 보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어용 단체는 저술, 출판,강연 등의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 단체의 회무감독은 경성제대 교수 쇼우다(小田省吾)이고, 서기는 조선사편수회 서기인 마에다(前田耕造)이고, 이병도는 신석호와 함께 이 단체의 핵심위원이었다. 또한 이병도는 이나바(稻葉岩吉),쇼우다 등의 일본인과 손진태, 홍희, 유홍렬 등 한국인들과 함께 어용 학술단체기관지의 청구학총(靑丘學叢)의 주요 필자이며 또 다른 식민사학 학술지의 [조선사학] 주필이었다.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33년 불교전문학교 강사 시절이었다.

일본인 학자들과 함께한 청구학총이 어용단체로 밝혀지자 이를 두려워한 일제와 이병도는 일인을 배제하고 1934년 5월에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설립하였다. 즉 일인을 배제하고 순수 민간 학술단체로 위장하여 국내 및 주변지역에 대한 역사,언어,문학 등 인문학에 관한 연구를 목적으로 한국 학자의 힘으로 연구하고, 그 결과를 국어로 발표하려는 의도 하에 창립되었다. 초대 편집 겸 발행인 이병도(李丙燾)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출강하면서 기관지인 진단학보(震檀學報)를 발행하였다.

1938년(소화13년) 3월에 [반도조선사]가 완료되자 진단학보는 1941년 6월 제14호로 종간하고 해산되었다. 1945년의 8․15 해방을 맞아 진단학회의 자진해산 후에도 조선사편수회를 지켰던 이병도는 해방 후 경성대학(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취임하고 곧이어 서울대학 대학원장에 취임하였다.

그때 김상기․ 이상백․ 이인영․ 유홍렬․ 손진태 등 사학자들과 조윤제․ 이숭녕 등 국문학자들이 서울대 교수로 취임해 진단학회는 친일파 식민사학자들이 완전히 장악하여 날개를 달았다. 해방 다음날 경제사학 계열의 백남운을 중심으로 조선학술원이 결성되고, 같은 날 진단학회도 재건되었으나 진단학회가 곧 “ 친일파 제명운동 ”에 들어간 것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조윤제가 주도한 이 운동의 제명 범주에 이병도가 들어간 사실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1945년 8.15광복 후 다시 진단학회가 발족되었으나 결국 이병도는 진단학회를 주도할 수 없었고 송석하와 조윤제가 위원장과 총무를 맡고, 송석하가 사망하자 1948년 8월 이상백이 그 뒤를 이었다.
 
친일파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남한 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1950년 6․25전쟁이었다. 이병도는 6․25전쟁을 계기로 친일파 청산 제 1호에서 벗어나 국사학계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6․25전쟁은 많은 민족주의 인사들이 납북됨으로써 남한 학계를 가짜 실증사학의 이병도 독무대로 만들었던 것이다.

남북휴전 다음해인 1954년에 이병도가 진단학회의 이사장으로 취임하고 같은 해 이병도는 식민사학을 유포하던 경성제대의 후신인 서울대학교 대학원장과 학술원 부원장을 맡아 역사학계의 최고 원로로 부상했다. 이병도는 1960년 문교부장관에 등용되고 같은 해 학술원 회장에 선임되었다.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65년 동구학원(東丘學園) 이사장, 1966년 성균관대학교 교수 겸 대동문화연구원장에 취임하고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에 추대되었다.

1976년 동도학원(東都學院) 이사장에 선임되었고 1980년 85세의 고령으로 국정자문위원(國政諮問委員)에 위촉되었다. 그 동안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학술원 공로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5․16민족상 등을 수상하였다.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


1986년 10월 9일(목)자 조선일보에 단군은 신화가 아니고 우리나라 국조이며 "역대왕조의 단군제사는 일제 때 끊겼다" 라는 제목으로 특별기고 하여 우리나라 고대역사 왜곡의 사실을 발표하고 1989년에 죽었다.

오직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일평생 일왕에게 신명을 다 바쳐 충성한 세계사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희대(稀代)의 사건이며, 죽을 때까지 명예와 부귀영화를 누린자들을 식민사학자라 합니다. 그 대표적 인물은 이병도,신석호, 홍희 등이 있다.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대표적 위작(僞作)으로 [한국사대관, 한국사(고대편), 한국사(중세편), 고려시대연구, 국사와 지도이념]등의 위서(僞書)가 있습니다. 일본왕에게 온갖 정성을 다해 적극 충성하며 우리 민족혼을 말살하여 우리나라를 서서히 멸망시키고, 민족적 자긍심을 철저히 말살하는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저작한 [한국사대관의  위서]에 준거하여 현행 국사가 편찬되었다면 어찌 망국적 국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민족사학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잃었다. 

▲환단고기 저자 계연수 선생은 평안북도 선천(宣川)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운초(雲樵)·일시당(一始堂)이다  

   
식민사학자들은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린 반면, 민족사학자는 나라의 독립은 오로지 민족역사를 통해 민족의 자주독립을 추구하고자 분투하며, 역사서를 저술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모두 다 일본 밀정에 붙잡혀 처참히 참살되어 조국에 목숨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그 대표적 선각자로 계연수, 김교헌, 신채호, 박은식 등의 민족사학자님이 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잃은 민족사학자의 대표적 민족사서로 [계연수 선생님의 환단고기], [단군교 김교헌님의 신단민사(神檀民史),신단실기(神檀實記), 배달민족사(倍達民族史)], [신채호님의 전후 삼한고, 조선상고문화사]와 박은식 선생님의 1915년에 저술한 韓國痛史,韓國獨立運動之血史, 국권회복투쟁사 등이 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犧牲)된 민족사학자님은 한민족의 역사를 체계화하고, 민족사관의 정신적 지주로서 독립운동에 활력을 제공하였습니다. 한편 민족의식 고취와 민족단결력을 호소하여 결국 3.1 독립 운동이 일어난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넋을 잃은 7천만 한겨레여 진실로 각성하여 깨어나라...!
“민족사학자”와 “식민사학자”도 구별하지 못하는 얼빠진 민족인가?
어찌하여 한국인을 일본사람으로 동화시켜 대한제국을 영원히 멸망시키기 위해 일왕에게 충성한 “식민사학자들이 만든 국사”를 해방 61주년을 맞은 지금까지 고수하며 개편하지 않고 있단 말인가? 피고(국사편찬위원회)는 식민사학자들처럼 정녕 대한민국이 일찍 멸망하기를 소망하고 있는가? 어찌하여 민족혼을 말살하고 대한민국을 망치는 현행 국사를 적극 사수하며, 말살된 역사를 복원하지 않고, 유린된 역사를 고수하며, 망국적 치욕의 국사를 그대로 청년학도들에게 교육하고 있단 말인가?

[한얼원이 기고해 준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