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道)를 잘 닦는 자는 그 정혼(精魂)이 굳게 뭉쳐서 죽어서 천상에 올라가 영원히 흩어지지 아니하나 도를 닦지 않는 자는 정혼이 흩어져서 연기와 같이 사라지느니라. (道典 9:29:1∼2)
상제님께서는 ‘도를 잘 닦는 자’와, ‘도를 잘 닦지 않는 자’로 구분하여, 명쾌하게 이분법으로 말씀하셨다.
상제님은 지금 우리에게 ‘도를 잘 닦는 자는 영원히 흩어지지 않는다’,‘도를 잘 닦지 않는 자는 연기처럼 영원히 흩어진다’고, 딱 잘라 말씀하고 계신다. 수행을 하지 않고는 누구도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없다.
생명의 유한성을 극복하는 길, 수행(修行)
왜 수행을 해야 하는가?
‘내 생명은 유한하다. 결국 인간은 살다보면 죽는다. 그것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결국 죽는다. 영혼까지도 언젠가 그 수명이 다하면 죽어 멸한다. 생명 현상의 궁극은 숨이 떨어지는 것이다.’
생명에 대한 이런 허무의식,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 절실할수록, 그것을 깨 주는 수행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다. 광명세계, 생명세계로 나아가려는 생명의식이 크게 터진다.
수행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게, 수행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다. ‘수행을 해야 한다’는 이 마음만 살아나면, ‘반드시 수행을 하겠다’는 이 마음만 끊어지지 않으면, 그 사람은 살아있는 참 생명이다. 생명력 있는 구도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냥 하루하루 사는 것 자체로 만족하는 사람은 수행의 필요성을 철저하게 절감하지 못하며, 기운이 열리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이나 의지에 따라 태을주의 기운, 신이 감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행을 하지 않는 삶은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면, 그 사람은 대단히 심오하게 깨지는 것이다. 엄청난 철학적 자각을 하는 것이다. 생명에 대해, 생명의 본질에 대해, 크게 눈뜨는 것이다.
생명의 본질 문제로 보면,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죽은 목숨인 것이다. 인류 구원의 법방, 태을주(太乙呪)
상제님 도법을 생활화하면서, 가슴속에 새겨 둬야 할 가장 근본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왜 태을주 수행을 해야 하느냐?’하는 수행의 필요성이다.
상제님 말씀을 요약하면, “오는 잠 적게 자고 태을주를 많이 읽어라. 이번에 개벽할 때 태을주를 읽지 않는 자는 신명도 인간도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죽는다."는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가? 예수를 믿든, 석가모니에게 매달렸든, 종교를 안 믿는 무신론자가 됐든, 태을주를 안 읽는 자는 이번에 다 죽는다는 말씀이다.
왜 태을주를 읽어야만 사는 것일까?
도전을 읽어보면, 상제님이 조화정부에서 우주신명들에게 그렇게 명령하셨다. 천명을 내리신 것이다. 개벽 때, 이 태을주를 바탕으로 의통으로써 인종씨를 추린다.
상제님은 태을주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다.
‘훔치’는 천지부모를 부르는 소리니라.
송아지가 어미를 부르듯이 창생이 한울님을 부르는 소리요 낙반사유(落盤四乳)는 ‘이 네 젖꼭지를 잘 빨아야 산다’는 말이니 ‘천주님을 떠나면 살 수 없다’는 말이니라. 약은 곧 태을주니라.” (道典 7편:74장)
개벽이 될 때에는, 천지부모를 찾아야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왜 태을주를 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있다.
대우주를 광명과 통일로 인도하는 태을주
태을주는 지구촌을 어둠에서 대광명의 세계로 열어주는 주문이다.
앞으로 가을생명의 주체, 모든 생명을 성숙케 하는 하늘,바로‘태을천(太乙天)’의 생명기운이 지구촌에 열리게 된다. 앞으로 대우주가 지구에서 통일되는 것이다. 대우주를 하나 되게 하는 힘이 태을주에 들어있다. 광명의 세계, 빛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는 그 출발점이 바로 태을주에서 비롯된다.
이 태을주를 읽으면 광명으로 들어가게 된다. 여러 가지 중요한 뜻이 여기에 있다. 태을주 수행을 단순히 기성 수행문화의 연장으로 보면 안된다. 그 속에는 상제님의 일꾼은 우주 통일의 주역으로서 새 우주를 여는 개척자라는 의미가 들어 있음을 철저하게 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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