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주 천지조화
환단고기(桓檀古記)의 가치성 본문
환단고기(桓檀古記)의 가치성
1. 머리말
어떤 한 민족의 역사가 왜곡되지 않고 올바르게 정립되어져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 민족만의 과거사를 규명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닌 그 지역과 연관된 타지역 넓게는 인류사 전체의 한 구성으로서 과거·현재를 바르게 파악하고 인류미래의 문화발전에 기여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한민족의 역사가 타민족의 침략으로 파괴되고 왜곡되어 제대로 전래되지 못하였음을 잘 안다. 특히 고대사부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그 체계조차 명확하게 세우지 못한 실정이어서 우리 스스로에게도 책임이 있다 할 것이다.
사실 ‘한국사(韓國史)’라 부를 만한 업적을 이룬 것은 근대이후의 일이다. 그것도 우리의 손이 아닌 남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제대로 성립될 수가 없었다. 근대이전 고려·조선시대에 일단의 선각자들이 민족사의 체계를 세우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으나, 왕조중심의 전반적인 사대사상(事大思想)으로 인하여 그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그런 와중에 급기야는 나라를 보전하지 못해 남에게 빼앗기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러한 민족의 시련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의 민족사에 대한 집중적인 구명(究明)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겠지만 그 민족의 시련기가 되면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우기 위한 민족사(民族史)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인물위주의 영웅사관(英雄史觀)에 입각하여 서술한다든지, 혹은 국난극복의 종교적 사명감을 고취시키는 고통극복사관(苦痛克服史觀)에 입각하여 서술하는 예가 보통이었다.
하지만, 우리 민족사의 경우는 이러한 예와 달랐다. 국난극복이라는 면에서는 궤적을 같이하고 있으나, 잊혀진 사실을 발굴하려는 노력으로 또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한데, 이러한 노력에 있어서 내용에 다소 과장된 부분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전체적인 줄거리에 대한 검토없이 과장된 부분만을 확대해석하여 내용전체를 부정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현재의 기성사학계에서 일관되게 견지되어 온 이러한 의식은 분명 수정되어져야 한다.
최근에 등장하여 이러한 경향을 지닌 우리의 민족사로, 『환단고기(桓檀古記)』,『규원사화(揆園史話)』,『단기고사(檀奇古史)』,『신단실기(神檀實記)』,『부도지(符都誌)』 등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환단고기(桓檀古記)』인데 다른 책들의 내용을 포괄하고 있고 또한 각 시대별로 서술된 여러권의 책들을 합친 것이다.
분명 『환단고기(桓檀古記』(‘환(桓)’을 ‘한’으로 발음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는 새로운 차원의 내용을 담고 있어 충격적이기도 하고 일견 거부감마저 들기도 한다. 여태까지 듣고 보지 못했던, 혹은 신화로만 여겼고 배워왔던 상고시대 고조선(古朝鮮)의 역사와 그 이전시대 한인·한웅의 민족기원까지 구체적인 사실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막연하게 동경하여 왔던 대륙에서의 선조들의 활약상이 너무나도 상세하게 그려져 있어 자칫 꾸며낸 이야기처럼 여겨질 우려마저 안고 있다.
현재의 역사연구의 분위기는 많이 달라지고 있는 추세이다. 고조선의 활동영역이 한반도에서 만주대륙으로 확대되어 지고 있고 고조선의 실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렇지만 고조선의 담당자로서의 단군조선 문제나 그 이전 단계인 한인·한웅시대 문제가 역사적 사실로 거론되기까지는 아직 요원하기만 하다.
한인·한웅시대가 신화적 차원으로 머물러 있고서야 진정한 의미의 고조선연구는 본질을 망각한 형체가 되엉 버릴 우려가 있어 심각한 일이 아닐수 없다. 이러한 결과는 워낙 자료가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환단고기』와 같은 역사서들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배격하는 태도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이 이러한 신화들을 신화 아닌 사실로 기록하고 있어 오히려 더 연구할 가치가 있을 터인데, 위작으로만 몰아부칠뿐 구체적인 고찰을 하지 않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 글을 쓰면서 한가지 경계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이른바 재야사학계에서 민족사복원이라 하며 일관되게 주장해 왔던 ‘우리의 역사는 반도가 아닌 대륙을 무대로 했던 역사’라고 하는 논리이다.
이런 주장은 다소 위험한 발상이 될 수도 있다. 마치 우리가 현재 우리의 삶의 터전을 부인하고 과거의 영광에만 사로잡혀 있는 듯한 오해와 착각을 불러 일으킬 소지가 다분한 것이다. 물론 부정적 시각의 ‘반도사관(半島史觀)’을 탈피하자는 의미에서 ‘대륙사관(大陸史觀)’을 강조하다 보니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으나, 이러한 잘못 때문에 오히려 기성사학계가 더욱 한반도중심의 역사관을 고수해왔는 지도 모른다.
대륙이 우리의 주무대였다는 논리는 자칫 현재의 한반도지역에 대한 애착감을 상실하게 만들수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고대의 한반도 또한 대륙과 연계되어 한반도 자체가 선사시대이후부터 뿌리내려온 역사의 터전이라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상에서와 같이 우리가 경계해야 할 부분은 경계해야 하고, 선조들의 대륙생활사는 한반도라는 한민족의 현재의 활동무대를 축으로 하여 그 연장선상에서 기원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연구되고 밝혀져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 남의 땅이 되어 버린 곳을 되찾겠다고 성급히 주장하기 보다는 우리의 본래모습, 곧 “민족사의 원형”을 재구성한다는 취지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한반도지역 내부에서만의 연구로는 원형을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륙과 연계해야만 올바른 정립이 가능하다는데 의의를 두고 한민족 삶의 터전에 대한 변천과 이동의 역사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2. 『환단고기(桓檀古記)』의 구성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삼성기(三聖記)』,『단군세기(檀君世紀)』,『북부여기(北夫餘紀)』,『태백일사(太白逸史)』 등의 네 권의 책을 묶어 편찬한 것으로, 환국시대와 단군시대의 고대역사를 기술했다는 의미의 제명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중에, “하늘로 부터의 밝음을 ‘桓(한)’이라 하고 땅에서 반사하는 밝음을 ‘檀(단)’이라 한다.”는 설명이 『태백일사』에 기록되어 있어 그런 의미를 부여해도 무방할 것이다.
『삼성기(三聖記)』는 신라의 승려인 안함로(安含老)의 상권과 행적이 불확실한 원동중元董仲의 하권을 합친 것인데, 한인·한웅시대의 역사를 담고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시발인 한국시대(桓國時代)의 7대 한인들의 3,301년의 역사와 신시시대(神市時代)의 18대 한웅들의 1,565년의 역사를 압축한 것이다. 하권에는 신시역대기가 붙어있고 인류의 조상인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의 고사까지 포함되어 있다.
『단군세기(檀君世紀)』는 고려말 이암이 엮은 것으로 단군조선의 역사를 47대 단군들의 재위기간과 치적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기원전2,333년부터 기원전239년 북부여의 해모수에 의해 종결될 때까지 2,096년 동안의 장구한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북부여기(北夫餘紀)』는 고려말 학자인 범장(范樟)이 전한 책으로 「상권」,「하권」,「가섭원부여기(迦葉原夫餘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조 해모수로부터 6대 204년의 역사와 가섭원부여(동부여) 108년의 역사가 담겨져 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의 출생에 대한 비밀이 담겨져 있다는 점이다.
『태백일사(太白逸史)』는 조선 중종때 이맥(李陌)이 전한 책으로 『환단고기』중에 가장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환국본기(桓國本紀)」,「신시본기(神市本紀)」,「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고려국본기(高麗國本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신오제본기」는 주로 우주의 생성과 운용법칙에 관한 철학서이고, 「환국본기」는 한인이 시베리아지역에서 다스린 환국의 역사서이며, 「신시본기」는 한웅이 다스린 배달국(培達國)의 역사서이다. 단군조선은 삼한(三韓:三朝鮮)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삼한관경본기」에는 삼한중 『단군세기』의 주인공인 진한(眞韓)을 제외한 번한(番韓)과 마한(馬韓)에 대한 역사만을 담고 있어 「번한세가(番韓世家)」와 「마한세가(馬韓世家)」로 나누어져 있다.
「소도경전본훈」에는 ‘천부경(天符經)’,‘삼일신고(三一神誥)’등 한민족 고유의 사상과 철학 등이 경전으로 전해지고 있으며,「고구려국본기」,「대진국본기」,「고려국본기」는 각각 고구려, 발해,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것들인데 발해를 ‘대진국’이라 지칭하고 있음이 이채롭다.
『환단고기』의 가장 큰 특징으로서는 일련의 일관된 흐름이 있다는 것이다. 각 권마다의 구성의 치밀함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아왔던 삼국시대이후의 불교사상이나 고려·조선시대의 유교사상과는 다른 한인시대부터의 독특한 ‘삼신사상(三神思想:한사상)’이라 하는 민족고유의 사상을 바탕으로 고대사가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도교사상(道敎思想)과도 거리가 멀어 신라시대 최치원이 말한 ‘현묘지도(玄妙之道)’, 신채호선생의 ‘낭가사상(郎家思想)’등으로 표현되는 고유의 전통사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삼신사상은 오히려 불교사상이나 유교사상보다 훨씬 원초적인 인간존중의 사상으로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의 구체적 방법론처럼 여겨진다. 이러한 것이 『환단고기』의 첫번째 특징이다.
『환단고기』의 두번째 특징으로는, 신화적 인물로만 여겨져 왔던 한인,한웅,단군 등이 각각 한사람을 호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닌 군장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각 시대에 대한 역대계보가 구체적 실사(實史)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번째 특징으로는, 기존학계에서 밝혀내지 못하는 사실들로 고조선의 위치, 정부형태, 정치제도, 풍습 등과 부여의 건국과 역사, 고주몽의 계보, 발해의 건국비화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세가지 특징외에도 민속학적, 언어학적인 많은 정보를 전해주고 있어 앞으로 다방면으로 연구되어져야 할 부분이 너무도 많다. 이는 물론 역사서로서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기성사학계에서 최고의 사서로 인정되고 있는 책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이다. 정사(正史)로 인정되고 있는 『삼국사기』가 김부식의 사대사관을 반영하고 있다고 해서 배척할 필요는 없다. 김부식은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에 대한 역사만을 중점적으로 다루었기에 제명도 『삼국사기』인 것이다. 이 점은 일연의 『삼국유사』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종류의 사서들에도 당시의 언어변천이나 풍속 등을 전해주는 귀중한 내용이 담겨져 있어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환단고기』는 삼국시대의 역사가 아닌 삼국이전의 환국과 단군의 역사를 담고 있는 것으로 또다른 가치를 지닐 수 있다. 이것이 위작이든 진실이든간에 잃어 버린 역사에 대한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가치는 충분히 존재하는 것이다.
3.『환단고기(桓檀古記)』 비판론에 대하여
『환단고기』를 사서로서 부정하고 위서(僞書)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견해로는 다음과 같다.
- 송찬식, 〈僞書辨〉, 《月刊中央》, 1977, 9월호
- 이도학, 〈在野史書 解題《桓檀古記》〉, 《민족지성》, 1986, 11월호
- 조인성, 〈《揆園史話》論添補〉, 《慶大史論》3, 1987, 경남대학교
- 이순근, 〈고조선위치에 대한 제설의 검토〉, 《성심여자대학교》, 1987.5.15
- 조인성, 〈現傳 《揆園史話》의 史料的 性格에 대한 一檢討 〉,
《李丙燾 九旬紀念 韓國史學論叢》, 1987
- 조인성, 〈《揆園史話》와 《桓檀古記》〉, 《韓國史市民講座》2輯, 1988
이들의 공통된 주장의 논점은,
첫째, 용어사용의 부적절
둘째, 인용서적의 불분명
세째, 저술연대와 저자 문제 등이다.
위와 같은 위서론을 견지하는 이들은 『환단고기』류의 내용을 일제시대 민족정신 고양의 방안으로 창출되어진 위작으로 보고 있다. 위작이라 보는 데 대한 근거로 이러한 책들의 저자들과 저술연대에의 의혹, 인용고서들의 존재여부, 사서에 쓰인 용어사용의 부적절 등을 제시하고 있는데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 부분도 있다.
『환단고기』의 비판론자들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는 일단 미루어두고 몇가지 중요한 비판요소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규원사화』는 『환단고기』와 맥을 같이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단군조선의 연대가 1,195년으로 나와 있어 2,096년의 『환단고기』와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점에 대해서는 어느 쪽이든 자료로 인용한 인용서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야기된 것이지 서로간에 참고로 하여 발생한 차이가 아니라는 점이 주목된다.
두 책이 인용한 지금은 이름만 전해지고 있는 사료들이 있었고 이를 편찬자가 잘못 이해한 것이라는 점이다. 즉 인용서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이다.
『환단고기』의 〈범례〉에 의하면, 이맥의 『태백일사』빼고는 세 책이 모두 조선시대 이전의 서술로 되어 있다. 『환단고기』 자체는 계연수가 편찬하고 이기가 감수하여 1911년 인쇄되었고 1979년에 와서야 영인되어 세상에 등장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문제는 1979년 이전에 『환단고기』에 실린 책들을 인용한 문헌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이들 책들이 모두 근대이후에 저술되었다는 점이다.
『환단고기』에 실린 책들의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삼성기』상권은 계연수의 집안에서 내려왔다 하고 『삼성기』하권과 『단군세기』는 태천의 진사 백관묵으로부터 얻었으며 같은 내용의 또 다른 책인 역시 『단군세기』와 『북부여기』는 『단군세기합편』이라는 제명으로 朔州 梨洞 진사 이형무에게서 얻었다고 했다. 『태백일사』는 이기가 간직했던 것인데 이상의 책들을 모두 합편하여 계연수가 홍범도, 오동진 등의 자금지원을 받아서 인쇄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 전하고 있는 『환단고기』는 1949년 이유립(1907~1986)이 오형기로 하여금 정서(正書)시킨 것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원본과 인쇄본, 필사본 등이 사라지게 된 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러 손을 거치면서 저술된 시대와 다른 근대적 용어가 사용되고 비전문가로서 역사가에 의하지 않은 인쇄,필사 등을 통하다보니 본문(本文)과 주해(註解)가 혼동되어 진실성에 대한 의구심이 확대되고 후대의 위작이라는 근거를 마련해준 셈이 되었다.
고대 역사서로서의 가치는, 저술될 당시의 이해되지 않는 본문에 대해 편찬자들이 주해의 형식을 빌어 명확하게 구분하여 서술함으로써 사서의 시대적 생명력을 살리는데 있음에도, 필사와 정서의 과정에서 비전문가로서 내용전달에만 주안점을 두다보니 이러한 생명력전달에 소홀하게 된 것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환단고기』류의 사서들로 하여금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게 만든 가장 핵심적인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신중한 작업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해 주는 부분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용어의 윤색된 사용이 사서 그 자체의 내용전달에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도 볼 수 있으나, 이로 인하여 위작시비의 빌미를 제공한 셈이 되는 것이 문제이다.
비판론에 있어서 또 다른 중요한 핵심문제는 인용서에 관한 것이다. 『환단고기』는 고대서로 보이는 책들을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 거의 20여종이나 된다. 『조대기(朝代記)』,『삼성밀기(三聖密記)』,『표훈천사(表訓天詞)』,『대변경(大辨經)』,『진역유기(震域留記)』,『삼한비기(三韓秘記)』,『고려비기(高麗秘記)』,『신지비사(神誌秘詞)』 등의 고대서들이 『환단고기』외 다른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모두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중에서 『표훈천사』,『조대기』,『대변경』,『삼성밀기』 등은 조선시대 『세조실록』7, 3년5월 무자년조에 책이름이 보이지만 근대에 와서 내용이 위조되어 책명만 인용되었을 뿐이라는 주장이 요지이다.
이러한 고대서들의 실존여부에 대한 조사는 서희건 편저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2,3권(1986)에 상세하게 밝혀져 있는데, 서희건은 일제시대때 조선총독부 지원하의 조선사편수회에서 행한 한민족 역사왜곡과 고서소각의 실상을 낱낱이 파해쳐 고발하고 있다.
『환단고기』상의 인용서들이 현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혹은 서명만 존재했었다고 해도 내용이 모두 위조되었을 것이라는 논리로 전체를 위작으로 치부해버리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현재 전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책이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그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전혀 근거없는 허위가 아닌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는 것이다.
즉, 책명에서 유추할 수 있는 뉘앙스와 926년 발해멸망이후 발해왕자 대광현(大光顯)이 고려에 망명할 때 가지고 온 책이라 전하는 『조대기(朝代記)』에 인용된 내용만의 재구성(단군조선~고구려까지의 역사로 구성됨)을 통해 볼 때, 『환단고기』가 담고 있는 내용과 전혀 다르지 않은 분위기의 내용일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다.
조인성은 인용서에 대한 비판에서, 『태백일사』가 인용한 『조대기』에 ‘男女平權’, ‘父權’ 같은 근대적 용어가 등장하기 때문에 『조대기』의 내용이 근대에 위조되었을 것이라 한다든지, ‘寧古塔’이라는 지명이 淸의 시조전설과 관련하여 생긴 지명이기 때문에 이를 인용한 『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 등은 청대이후의 기록이 될 수 밖에 없다든지, ‘常春’이라는 지명도 청나라 이후에 등장한 ‘長春’의 오기로 본다든지 하는 주장도 납득하기 어렵다.
청대이후의 ‘장춘’이라는 지명을 인용했다면 굳이 ‘상춘’이라고 오기할 이유가 없으며, 또한 일부러 유사한 지명으로 개작했다면 ‘영고탑’이란 지명도 개작했어야 옳다. ‘영고탑’,‘상춘’이라는 지명이 부각된 것은 만주에 터전을 둔 청나라가 중국을 제패하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보면 그이전부터 지명은 전해지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중국사서에 지명이 전해지지 않는다고 그 지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무리한 주장이 아닐런지.
『조대기』에 나오는 ‘연개소문’의 父인 ‘太祖’와 조부인 ‘子遊’라는 이름에 대한 시비도 마찬가지이다. 1923년 중국 낙양에서 발견된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의 묘지명에서 비로소 나타난다고 하여 『환단고기』가 1923년이후에 쓰여진 것이라는 주장을 따르면, 계연수가 1911년에 편찬했다고 하는 내용도 믿지 못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에서 인용하고 있는 연개소문에 대한 내용을 보면,
- 淵蓋蘇文은 蓋金이라고도 하는데 姓은 淵氏이다. 그 선조는 鳳城人인데 父는 太祖라 하고 祖父는 子遊라 하며, 曾祖는 廣이라 한다. 모두가 莫離支였다. -
라고 되어 있다.
북경 낙양에는 중국식 발음 표기인 ‘천씨(泉氏)’로 되어 있지만, 이책에는 ‘연씨(淵氏)’로 되어 있고, 선조가 봉성인이라는 사실과 증조부의 이름이 廣이라는 사실까지 나와 있는데 이러한 것들을 모두 위작이라 볼 수 있을까?
위작이라면 굳이 성을 다르게 표기할 필요도 없이 ‘淵’이 아닌 ‘泉’을 써야하지 않을까? 확실한 물증이니 말이다. 그리고 선조들의 이름도 중국식발음을 감안하여 다른 한자로 표기해야 옳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볼 때 오히려 『조대기』의 내용에 대한 신뢰감과 더불어 더욱 많은 정보획득의 자료를 제공해주는 『환단고기』에 대한 가치를 높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환단고기』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편찬자가 유명한 학자가 아니라는 사실과 뚜렷한 업적이 없었다는 이유로 저술연대와 저자들에 대해 의심을 하고, 용어사용의 부적절함을 내세워 내용전체를 위작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해 왔지만 비전문가에 의한 편찬과 정서(正書)에서 잘못된 용어사용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 내용의 검증이다.
다행스럽게도 『환단고기』에서 기술한 중국관련 기록들이 실제 중국측 사서들과 서로 일치하거나 더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만약 중국사서와의 일치된 부분을 놓고 그 전후의 사건들을 모두 꾸며내었다고 주장한다면, 『환단고기』의 작자는 정말로 위대한 소설가라 아니할 수 없다.
저작자가 개인이든 집단이든 중국의 고대사서를 철저히 분석하고 대단한 상상력과 창작력을 발휘하여야 가능한 방대한 내용을 『환단고기』는 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상고시대의 철학과 사상 등에도 해박한 정도가 아닌 꿰뚫는 혜안이 있어야 가능한 내용도 담겨져 있으므로, 분명히 오랜 기간에 걸친 역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환단고기』이외의 다른 루트를 통해 알려진 책들(『단기고사』,『규원사화』등)과도 내용과 줄거리가 유사하다는 점도 위작이라는 논리하에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4. 중국문헌과의 비교검토
『환단고기』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에 대해 현재 비교적 신빙성있는 사료(史料)로 인정되고 있는 중국의 사서들과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중국측에는 정사(正史)로 인정되는 ‘25史’외에도
『죽서기년(竹書紀年)』,『설문(說文)』,『춘추좌전(春秋左傳)』,『자치통감(資治統監)』,『산해경(山海經)』 등의 고서(古書)들이 있고, 『맹자(孟子)』,『논어(論語)』,『시경(詩經)』,『서경(書經)』등의 유가경전에도 역사적 사건에 대한 단편적 기록들이 남아 있다.
한민족에 관한 기록은 한나라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이후의 『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등에 와서야 「동이전(東夷傳)」이나 「조선전(朝鮮傳)」으로 체계화되지만, 그 이전시대에는 중국중심의 역사서술에 단편적으로 삽입되어 있거나 사물의 기원, 이민족의 풍습 등을 소개할 때 간혹 등장하곤 한다.
우선 중국내륙지역과 가장 접촉이 빈번했던 시기로 알려지는 고조선의 실체인 단군조선(檀君朝鮮)시대의 기록을 검토해 보자. 이는 단군조선의 건국(B.C.2333)이후 중국내륙인 중원지역에 왕조라 인정할 夏·殷·周·春秋戰國時代 등이 전개되어 중국의 역사기록과 비교할 수 있는 자료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1) 기독교의 구약성서에는 홍수설화가 있는데 밝혀진 바로는 슈메르문명(기원전 3천년경의 메소포타미아지방)의 홍수설화와 유사하며, 지질학적으로도 기원전 2천년전에 지구에 큰 홍수가 있었다고 한다. 홍수에 관해서는 동양의 고대사에도 유사한 기록이 남아 있다.
『환단고기』중의 『단군세기』와 『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번한세가(番韓世家)편에 1세 단군왕검때(丁巳50년, B.C.2284) 큰 홍수가 있었는데 풍백인 팽우에게 명하여 치수사업을 성공시켜 이를 극복하고 그 비법을 중원지역 요순시대(堯舜時代) 순(舜)이 파견한 우(禹)에게 태자 부루(扶婁)를 도산(塗山)에 파견하여
치수를 위한 삼보(三寶)를 전해주고 국경을 정해 유영지방(幽營地方:북경일대)과 회대지방(淮垈地方:산동지역과 양자강하류역)의 동이(東夷)제후들을 평정하여 직접 분조(分朝)를 두어 당시의 중원정치를 감독하게 하고 직접 5년마다 순수하시어 순(舜)이 네번이나 조근(朝覲)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때 전해준 삼보로는 ‘王土의 篆(문자의 일종)이 새겨진 천부왕인(天符王印)’, ‘물의 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는 신침(神針) 일매’, ‘험하고 중요한 곳의 물을 진압할 수 있는 황거종의 보물’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법을 적은 금간옥첩(金簡玉牒)을 주었는데, 『오월춘추(吳越春秋)』에는 “금간옥첩을 창수사자(蒼水使者)가 夏의 禹에게 준 치수의 비결”로 기록되어 있어 대비된다.
중국고대에는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가 있었는데 삼황으로는 염제신농, 태호복희, 황제헌원 등이다. 『환단고기』중 『삼성기』나 『태백일사』「신시본기」등에는 삼황의 인물들이 모두 한웅시대의 후손으로 중원지역에 발달된 문화를 전파하고 정착한 것으로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오제의 인물들도 역시 같은 계보를 지닌 것으로 나와있다.
순임금도 동이계통으로 확인되는데, 『맹자(孟子)』 이루장구(離婁章句) 하편에,
- 순은 제풍에서 나고, 부하로 옮겼으며, 명조에서 졸하였는데, 동이의 땅이고, 순은 동이인이다(舜生於諸風, 移於負荷, 卒於名條, 東夷之地, 舜東夷之人也) -
라 하였고, 『환단고기』에는 순의 아버지 유소씨(有巢氏)가 단군조선의 신하로 기록되어 있다.
단군조선에서 분조를 두고 산동지방 낭야성에 5년마다 순수하였다는데, 이에 대해 『서경(書經)』 虞書 舜傳을 보면,
- 2월, 동쪽으로 순수하여 대종에 이르러 시일을 협의하고 도량형을 맞추며 오례의 법을 닦고 다섯가지 옥과 세가지 비단, 두가지 산짐승과 한가지 죽은 짐승의 예물을 정리하였고, 다섯가지 제기는 제사가 끝난뒤 되돌려 주었다.(歲二月,東巡守之于岱宗,協時月正日,同律度量衡,修五禮五玉三錦二生一死執如五器卒乃復) - 고 하였다.
중국에서 최초의 왕조로 불리는 하(夏)의 시조 우(禹)가 치수사업에 성공하여 그 공으로 군장위를 이어받았는데, 우의 성공비결은 창수사자에게서 나온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중국사람들의 춘추필법(春秋筆法:중화중심의 역사관)은 창수사자라는 모호한 명칭으로 진실을 가리고 있지만, 『환단고기』는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 대단히 명쾌한 설명을 해 주고 있는 것이다.
2) 현재의 중국사에서는 산동지방과 양쯔강일대 평야지대에 옛부터 동이족들이 터전을 마련하고 생활해왔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들은 북방에서 이주해 온 종족이며, 황하문명을 꽃피운 은(殷)나라도 이들 동이계통이 세운 고대국가였다. 이러한 결론에는 중국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성과가 큰 몫을 담당하였다. 중국사에 등장하는 동이관련 기록은 단편적이나마 그 원형을 살펴볼 수 있으므로 이를 『환단고기』의 기록들과 비교검토해 보자.
『단군세기』 4세단군 오사구(烏斯丘)조를 보면,
- 임인19년(B.C.2119) 하나라 주 상이 덕을 잃어 단군께서 식달에게 명하여 남·진·변 3부의 병력을 이끌고 그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천하가 이를 듣고는 모두 복종하게 되었다. -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東夷列傳)」에는
- 하후씨 태강이 덕을 잃어, 동이인들이 모반을 시작하였다. 註에 태강은 익으로 하여금 물리치게 하였다.(夏后氏太康失德,夷人始畔...註,太康...爲익所퇴也) -
라고 되어 있고,
『죽서기년(竹書紀年)』 夏王 相元年(B.C.2146)조에는
- 원년에 견이를 정벌하고, 2년에 풍이와 황이를 정벌하고, 7년에 우이가 내빈하였다.(元年,征犬夷,二年,征風夷及黃夷,七年,于夷來賓) -
라고 되어 있다.
夏의 태강과 상은 각각 다른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단군세기』는 이에 대해 두사람을 한사람으로 혼동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 관해서는 『규원사화』「단군기」에 보다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연대설정이 『환단고기』와 다르지만, 내용상의 흐름은 『환단고기』와 유사하여 상호 참고될만 하다.
『규원사화』「단군기」3세단군 가륵조와 4세단군 오사구조를 보면,
- (가륵조)때에 夏王이 失德하여 그 신하중 찬역(왕을 추방)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식달로 하여금 남진번의 백성을 이끌고 이를 정벌하니 국위가 더욱 빛났다.
(오사구조) 夏王 后相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후에 사신을 보내 화친하고 서로 통교했다. - 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건의 개요를 보면 동이가 하왕 태강을 정벌하여 이겼지만 상에게는 진 것으로 되어 있고, 이는 중국의 사서들과 같은 내용이다. 중국의 고대사서에는 동이족을 구이(九夷)로 나누어 불렀다.
견이(犬夷), 풍이(風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양이(暘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현이(玄夷:鳥夷 혹 北夷) 등인데 조이(북이)의 위치가 발해북안지대일 것으로 보는 외에 다른 이족들의 중국내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 대개 이들 구이는 산동반도와 회대지방(양쯔강하류역)에 분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3) 하나라와의 관계사를 한가지 더 보자. 『단군세기』 11세단군 도해(道奚)조에
- 丁卯38년(B.C.1854)... 徵民가운데 장정을 뽑아 모두 병사로 삼고 選士 20인을 夏의 도읍으로 보내 처음으로 國訓을 전함으로써 위세를 보였다. -
고 하였는데, 중국측 『죽서기년』 夏王 發 원년(B.C.1837)조에
- 發 원년, 諸夷들이 왕에게 인사하고 夷人들이 춤을 추었다.(帝發元年,諸夷賓于王門...諸夷人舞) -
라고 하여 단군조선과 하나라와의 친선관계를 보여주는 기록으로 연대도 유사하고 있다.
4) 夏나라는 은나라에게 멸망하였는데 은나라를 구성한 종족은 발달된 청동기문화를 꽃피웠으며 한자(漢字)의 기원인 갑골문자(甲骨文字)를 사용한 종족으로 북쪽에서 내려온 동이계통으로 알려져 있다. 중원지역에서는 하와 은의 교체기에 동이족이 권력구도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환단고기』상으로는 단군조선의 결단에 의한 것으로 나타난다.
『단군세기』 13세단군 흘달(屹達)조에,
- 甲午16년(B.C.1767) 겨울, 殷人이 夏나라를 정벌하니 夏의 桀王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단제께서 읍차인 末良으로 하여금 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殷의 湯王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命을 내려 군대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夏의 桀王은 조약을 위배하고 병력으로 길을 차단하며 약속을 깨려하였다. 이에 殷人들과 함께 夏의 桀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 于亮을 파견하여 견이(夷)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과 합쳐 진격하여 關中의 분기땅에 점거하여 관제를 설치하였다. -
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의 구환은 구이를 말한다. 이는 환인,환웅의 자손이라는 의미이다. 낙랑은 고대 발해서북지역 지명이고 관중의 분기는 섬서성일대를 지칭한다.
이에 대한 중국측 기록인 전한(前漢)의 유향(劉向:B.C.77~)이 저술한 『설원(說苑)』夏王 癸(桀)52년(B.C.1767)條에 보면,
- 탕이 걸을 토벌하려 하므로 걸왕이 노하여 구이의 군사를 일으켜 탕을 토벌하니 탕이 이에 사죄하였다.(湯欲伐桀,桀怒起九夷之師以伐之,湯乃謝罪) - 라고 되어 있고,
계속하여 53년조에 보면,
- 탕이 걸왕에게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다시 구이의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구이가 군사를 일으켜주지 아니하므로 마침내 탕이 군사를 일으켜 걸왕을 토벌하여 남쪽변두리로 추방하였다.(湯不貢桀起九夷之師,九夷不起,湯乃興師伐之,遷桀南巢) -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상의 기사를 보면 구이(九夷)가 세력향방의 변수로 작용할만큼 막강한 힘을 가진 것으로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중국의 춘추필법으로도 감추지 못할 사건의 결과인 것이다.
이에 대해 『죽서기년』夏王 癸(桀)條에서는,
- 계(걸)3년(B.C.1816)...견이인이 岐땅에 들어와 모반을 일으켰다. 6년(B.C.1813) 기땅에서 물러나고 사죄하였다.(帝癸三年...(田犬)夷人于岐以叛...六年岐踵戒來賓) -
라 하여 걸왕때 견이가 岐에 들어와 夏에 반하였다는 내용이 일치되고 있다.
『단군세기』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규원사화』에는 분기땅에서 철수하는 기사가 있는데, 철수이후의 기록이 또한 『단군세기』에 전해지고 있다. 단군조선이 殷을 도와 夏를 멸망시킨 후 근 4백여년 동안 은과 지속적인 친선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규원사화』 단군 흘달(벌음)조에는,
- 商王 湯이 어진 정치를 크게 베풀었으므로 단제께서 말씀하시기를 ‘德이 있는 임금으로 가히 서로 침범할 수 없다’하시고 이에 그 군사를 거두시고 후에 화해하였다. -
라고 되어 있고,
『단군세기』 15세단군 벌음(흘달)조에는,
- 庚辰元年(B.C.1661) 殷主 小甲(B.C.1672~)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구했다. -
라고 되어 있는데,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東夷列傳)」商湯元年(B.C.1766)條에,
- 앞서 桀의 난리때 빈기사이의 땅에 침입하여 점거하고 있던 견이를 쳐서 물리쳤다.(先是,后桀之亂,(田犬)夷入居빈岐之間,成湯...興伐而攘之) -
라고 되어 있어 서로 비교된다.
5) 은나라와 지속된 4백년간의 친선관계가 단군조선 내부의 정변(政變)을 틈탄 은의 세력확장으로 깨어지고 정변을 수습한 단군조선은 마침내 은나라 내지(內地) 깊숙이 들어가 분국(分國)을 설립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중국역사에서 수수께끼의 나라로 전해지는 이른바 엄국(奄國)과 서국(徐國)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밝혀지는 부분으로 동양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대목이다. 『단군세기』 21세단군 소태(蘇台)조를 보면,
- 甲辰元年(B.C.1337) 殷왕 武丁(B.C.1339~B.C.1280)이 鬼方을 쳐서 이기더니 대군을 이끌고 索度,令支 등을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 -
라고 되어 있고,
『단군세기』 22세단군 색불루(索弗婁)조에는,
- 丙申元年(B.C.1285) 11월, 제께서 몸소 九桓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차례 싸워 殷의 도읍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부쉈다. 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黃河상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弁韓의 백성들을 淮垈(양쯔강하류유역)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크게 떨쳤다.
乙卯20년(B.C.1266) 때에 藍國이 매우 강성하여 孤竹君과 함께 여러 적들을 쫒아내고 南으로 이동하여 奄瀆忽에 머물렀으니 殷의 경계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기땅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그곳의 유민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黎라 칭하고 西戎과 함께 殷의 제후들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藍氏의 위세가 매우 강성하여 단제의 교화는 멀리 恒山(하북서부지방)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 라고 되어 있다.
계속하여 『단군세기』 23세단군 아홀(阿忽)조에,
- 甲申元年(B.C.1237) 황숙인 固弗加에게 명하여 樂浪忽을 통치하도록 하고 웅걸손을 보내 藍國君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로 하여금 殷나라 땅에 대읍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다투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니 마침내 병력을 진격시켜 공격하여 이를 격파하였다.
乙酉2년(B.C.1236) 藍國君 今達이 靑邱君,九麗君과 周?에서 회합하고 蒙古里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殷나라의 城柵을 쳐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淮垈의 땅을 평정하더니 浦古氏를 奄땅에, 寧古氏를 徐땅에, 邦古氏를 淮땅에 각각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 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
라고 되어 있는데, 이상의 기록들은 또한 『규원사화』의 내용과도 동일하다.
전통적으로 동이족(東夷族)의 활동지역인 양쯔강하류의 비옥한 평야지대인 회대의 땅에 단군조선 초기의 분조(分朝)보다 더 대규모인 분국(分國)을 설치하였는데 이 분국들이 은나라 후대의 주(周)나라와도 지속적으로 세력을 다투게 된다.
『후한서』「동이열전」 - (商王)仲丁六,征于藍夷 -
『후한서』「동이열전」殷王武乙條 - 東夷寢盜,分遷淮垈,漸居中土,所謂徐夷是也 -
『후한서』「동이열전」周王勵條 - 勵王無道,淮夷入寇,王命괵仲,征之,不克 -
『후한서』의 기록에서처럼 동이의 강성함이 은나라와 주나라와 대등하면 대등하였지 결코 떨어지지 않음을 알수 있는데, 이후의 『단군세기』에는 특히 周나라와의 비교적 평화적인 관계가 지속되는 한편, 춘추시대(春秋時代) 이후의 초(楚),제(濟),조(趙) 등의 나라와도 관계를 맺고있는 것으로 나오고 단군조선 말기에는 특히 연(燕)과의 관계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춘추좌전(春秋左傳)』을 비롯한 주대(周代)이후의 문헌에도 동이구족(東夷九族)을 대표하여 ‘淮夷’,‘徐夷’등이 주나라와 춘추시대 제후국들과 지속적인 투쟁의 관계를 맺고 있음이 보이고 있다.
중국내륙에서의 동이족의 활동을 중국사서와 비교해서 보았는데, 중국측 문헌에는 단군조선에 대한 언급없이 중원의 왕조와 관련되는 사건에 대해서만 단편적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순임금때부터 서주(西周)까지 간간이 등장하는 ‘숙신(肅愼)’에 대한 전거가 단군조선의 ‘조선(朝鮮)’에 대한 일단의 실마리를 제공할 뿐, 중국내 동이족과의 관련면에서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숙신’과 ‘조선’을 같은 명칭에 대한 다른 시대적 한자표기로 여기고 있지만, 종족구성에 있어서는 ‘숙신’을 퉁구스계통으로 보는 등 아직 일치하지 않고 있다.
중국사에 등장하는 ‘숙신’은 읍루(邑婁)와 물길(勿吉)로 이어지는 만주지방에 있던 고대의 종족명칭이고 호시((木苦)矢:싸리나무화살),석노(石弩:석궁)가 유명한 곳으로 알려진다. 춘추시대이후의 문헌에는 ‘조선’이란 국명이 정식으로 등장하는데 그 위치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과거의 한반도위치설에서 요녕지역으로 중심지가 이동되어지고 있다.
이는 고고학적 발굴성과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지만 문헌상에서도 조금씩 해석상의 오류를 수정하고 있는 결과이기도 하다.
『환단고기』의 고조선에 대한 역대단군들의 상세한 치세기록은 이러한 불확실한 역사에 대해 실로 명쾌한 해답을 주고 있고, 또한 사실들에 대한 기록이 중국과도 일치하고 있음을 주목하여 그 가치를 재고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헌적 비교검증외에도 최근까지의 고고학적 발굴성과는 『환단고기』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입증하고 있으며, 특히 이 책의 천문기록에 대한 과학적 검증은 『환단고기』를 단순한 위작이 아닌 명백한 실제기록임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부분적 비판도 필요하겠지만 전반적인 검토가 더 중요한 시점이 된 것을 알아야 한다.
'역사 이야기 > 한민족 X파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국호의 의미 (0) | 2012.05.09 |
---|---|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해인삼매[海印三昧]미스테리 (0) | 2012.05.08 |
日 “미국에 설치한 위안부 추모비, 돈 줄게 없애라”… 철거 외교력 노골화 본문 (0) | 2012.05.04 |
인당수에 빠진 효녀 심청이. 누가 살렸나요? (0) | 2012.05.03 |
싸가지없다 의 의미는? (0) | 2012.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