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차길진의 시크릿 가든 <59> = 신문이나 TV 뉴스를 보면 종종 의료사고가 보도된다. 본의 아니게 살릴 수 있었던 환자가 급작스레 죽는다든가, 수술시 봉합을 잘못한다든가 해서, 환자들이 병원을 상대로 간혹 소송을 낸다. 이미 죽은 환자를 어떻게 다시 살려낼 수 있겠냐마는, 병원은 이에 성실히 임할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의료사고는 비단 병원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다. 필자가 접하는 영계에서도 의료사고가 발생하곤 한다.
몇 년 전 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어느 아파트 단지에서 여고생 투신 자살사건이 벌어졌다. 한밤중에 경비원이 순찰을 돌던 중 ‘툭!’하는 소리에 뒷 화단에 나가보니 여고생이 떨어져 숨져있었다. 누가 봐도 이는 자살사건임에 분명했다. 빈번히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한 여고생 뉴스를 접한 이들도 모두 자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고생에겐 자살할 만한 이유가 없었고, 여고생의 부모는 필자를 찾아왔다.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자살한 딸 때문이었다. 도대체 이유라도 알았으면 좋겠다는 것. 애지중지 키운 딸의 자살은 부모에게 분명 큰 충격이다. 그러나 부모는 딸이 자살한 만큼 좋은 곳으로 천도를 해줬으면 하는 바람도 갖고 있었다. 나 역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연극 ‘구명시식’에도 자살한 여고생 영가가 등장한다. 자살한 학생들의 천도를 위해 찾아오는 부모들을 볼 때마다 얼마나 심란한지. 나 역시 자식을 키우는 부모니 마음이 편치 않다.
드디어 구명시식이 올려졌다. 여고생은 왜 죽은 것일까. 그런데 내 앞에 나타난 여고생 영가의 고백은 정말 황당했다. 어떻게 이런 사건이 벌어질 수 있었는지. 사건 당일 여고생은 평상시처럼 저녁을 먹고 TV를 보다가 답답한 마음에 밤하늘의 별을 보고 오겠다면서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다. 밤하늘의 별은 여고생의 생각처럼 찬란했다. “사실 그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지만 성적이 오르지 않았어요. 답답한 마음에 밤하늘의 별을 보러 옥상에 올라갔습니다. 한참동안 별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환한 빛기둥이 나타나더니 공중에 길을 냈어요. 저도 모르게 그 빛 길을 따라 걸었을 뿐인데….”
이런! 이것은 자살이 아니었다. 명백히 영계의 의료사고였던 것. 알아본즉 원래 저승사자가 데려가려했던 여고생은 그녀가 아니었다. 분당에 거주하는 동명이인 동갑내기 여고생인데 마침 밤하늘의 별을 보러 옥상에 올라갔던 여고생이 그녀인줄 알고 실수를 저지른 것.
3박자가 척척 맞아떨어졌으니 저승사자도 헷갈렸을 터. 하필 분당에 동갑내기 동명이인이 있을 것은 또 뭐였겠는가. 같은 시각 그녀도 분당 아파트 옥상에서 자살을 기도하였을 텐데. 얼굴을 확인하지 않고 끌고 간 저승사자의 실수로 아까운 여고생이 영가가 된 게 아닌가.
나는 저승사자에게 강력히 이의를 제기했다. 인간사라면 소송을 해서 보상금이라도 받을 수 있다지만 영계에서 잘못했으니 이를 어찌할까. 여고생 영가는 “부모님께 제가 자살이 아니었다고 알려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했지만 그 말을 들으니 더욱 가슴이 아팠다. 안타까운 사연이지만 이미 죽은 목숨, 다시 살릴 방도는 없었다. 다만 염라대왕의 배려로 환생 시기를 최대한 앞으로 당길 수 있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이렇듯 영계에서도 실수를 한다. 의료사고 역시 사람의 생명이 달린 문제지만 영계사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영계에서 벌어지는 실수는 자주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일은 몇 천만 분의 일의 확률이랄까.
몇 해 전 필자에게 할머니 한 분이 찾아와 과연 천도(天道)라는 게 있는지 물어왔다. 할머니가 그런 의문을 갖게 된 사연은 몇 년 전 서울 천호동에서 있었던 사건에서 비롯됐다. 당시 천호동 모 아파트촌에는 소문난 아기엄마가 있었다 한다. 그녀에게는 일곱 살과 다섯 살 난 아들이 있었는데 아주 잘생기고 똑똑해서 온 동네 엄마들의 부러움을 샀다.
놀이방에 데려가도 그 집 애들만 눈에 들어와 “아역 탤런트를 해도 되겠다”, “애들이 너무 똑똑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교우관계도 좋아 아이들이 모두 그 집 애들하고 놀려고만 했다. 어디를 데리고 가도 아이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시장에 가도, 백화점에 가도 애들이 있기에 그녀는 매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애 아빠가 퇴근할 무렵 저녁을 준비하던 그녀에게 애들은 “떡볶이가 먹고 싶다”며 조르기 시작했다. “좀 있다가 아빠 오시면 저녁을 먹자”고 해도 애들은 막무가내였다. 도무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애 엄마는 혹시나하는 생각에 아파트 문을 모두 잠그고 떡볶이를 사러 나가면서 “엄마가 곧 갔다 올 테니 그 때까지 TV 보면서 얌전히 놀고 있어”란 말을 잊지 않았다.
내심 불안해하면서도 아이들이 똑똑하니 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스스로 안심시키며 떡볶이를 사서 돌아오는데, 아파트 근방에 다다랐을까 갑자기 어디선가 ‘쿵!’하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놀란 마음에 소리가 나는 쪽으로 뛰어가니 이게 웬일인가! 그녀의 첫째 아들이 10층에서 떨어져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엎어져 있는 것이었다.
“악!” 정신없이 소리를 질러대며 119를 불렀다. 둘러싼 인파 사이를 뚫고 구급차로 추락한 아들을 옮기려는 순간 또 다시 쿵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막내였다. 그 광경을 그대로 목격한 아이 엄마. 금지옥엽 기르던 아들 둘이 자신이 보는 앞에서 10층에서 떨어져 추락사하자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고 그 사건의 여파로 이혼까지 하고선 매일 정신병원을 드나들며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데….
할머니는 이 비극적인 얘기를 들려주면서 이렇게 고백했다. “사실 제가 그 옆집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꿈에 저승사자가 나타나 제 손자를 끌고 가려고 하기에 눈물을 흘리며 사정을 했죠. 옆집에 가면 우리 손자보다 잘 생긴 애들이 둘이나 있으니 차라리 걔네들을 데려가라고요. 설마 꿈이니 괜찮겠지 했는데, 바로 다음날 그런 비극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를 어떻게 속죄해야 할지….”
꿈이 현실로 벌어지고 말았으니 할머니의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할머니는 자신이 죽기 전 그 아기 엄마를 위해 구명시식을 올리고 싶다면서 눈물을 흘리며 부탁했다. 사연을 묵묵히 듣고 난 뒤 나는 조용히 손수건을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다.
“조선시대에 정씨 가문에는 잘나기로 소문난 아들 둘이 있었습니다. 어찌나 똑똑하든지 둘 다 나란히 장원 급제를 하여 말을 타고 금의환향을 하던 중 어찌된 일인지 둘 다 동시에 맷돌에 떨어져 그 자리에서 즉사를 하고 말았지요. 사태가 이렇게 되자 두 사람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지나가며 ‘시신을 모두 산에 갖다 버리시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알고 보니 그 둘은 전생에 정씨 가문의 큰 원수였던 것입니다.”
전생에 큰 원수였던 이 둘은 이래저래 복수를 하려다 모두 실패하자 잘난 자식으로 태어나 한날한시에 비참하게 죽음으로써 정씨 가문에 큰 복수를 한 것이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윤회(輪回)인가. 자식으로 태어난 인연이 얼마나 컸겠냐마는 사실 자식으로 위장한 원수였던 셈이다. 이렇듯 은혜는 은혜대로, 복수는 복수대로 거두는 것이 천도를 행하는 업보인 것을 어찌 천도가 없다 하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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