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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으로 풀어본 삶과 죽음의 원운동

세덕 2012. 10. 30. 13:45

 

음양으로 풀어본 삶과 죽음의 원운동

 

음양운동...음(陰)과 양(陽)이 만나 짝을 이루는 우주의 기본 이치는 그 이면에 큰 뜻을 숨기고 있습니다.
즉 마주 보던 짝이 합일(合一)되면서 비로소 그들의 일생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삶과 죽음의 순환이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뚜렷한 짝의 구분은 유성생식(有性生殖)을 하는 생물에서 볼 수 있는데 고등해질수록 더욱 확연해집니다.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 단계이면서 무성생식(無性生殖)을 하는 박테리아(bacteria)를 통해 짝의 개념을 더욱 소상히 밝혀 봅시다.
박테리아는 자연계에서 토양, 천연수, 공기, 식물과 동물의 표면 등 거의 없는 곳이 없을 만큼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습니다.
박테리아는 가장 원시적인 단세포 생물인데 오직 현미경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대단히 작은 생물입니다. 그 크기는 약 1~10미크론 입니다.
실제로 이놈은 생물과 무생물의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는데 종류에 따라 산소 없이도 살 수 있고 끓는 물 속, 영하의 추위에서도 무한정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이놈이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바로 짝이 없이(암수의 구별이 없이) 영원히 살아간다*는 겁니다.

(*생명체(生命體)는 다른 힘이 그를 죽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기의
(命)이 다하면 죽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박테리아는 다른 힘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命이 없습니다. 생체(生體)라고 부를 수는 있을지라도 생명체(生命體)는 아닙니다.)

후손을 만드는 작업이 없고 단순히 자기 몸을 둘로 쪼개서 두 개의 박테리아로 늘어납니다. 약 10~20분이면 둘로 나뉜 박테리아는 먹이를 먹고 적절히 자라나 또다시 분열해서 4개로 늘어납니다.

이들에게 짝이란 개념은 무의미합니다.
또한 죽음이라는 개념 역시 통하지 않습니다.

박테리아를 죽이는 바이러스나 백혈구 혹은 항생제가 없는 이상적인 상황에서는, 이중 분열을 하거나 멈춘 상태에서 영원히 존재합니다.



영원히 산다는 것이 부럽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박테리아는 영원히 살아 있다는 표현보다는 영원히 존재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립니다. 영원히 살아 있음은 영원히 죽어 있음과 같습니다. 삶과 죽음이 함께 하지 않는 한 삶이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박테리아를 보는 관점에 따라 무생물로 볼 수도 있는 겁니다.

반면에 영원히 죽어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무생물이라고 부릅니다.
영원히 살아 있는 박테리아 같은 것을
(陽)이라 한다면
영원히 죽어 있는 무생물 같은 것은
(陰)이라고 합니다.

여러 박테리아 중 조금 더 진화되어 짝이 있는 놈을 살펴봅시다.
에스케리키아 콜리(Escherichia Coli)는 대장균의 일종인 박테리아입니다. 이놈들은 형태상 보통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길쭉한 놈, 둥글둥글한 놈으로 구별됩니다.

현미경으로 관찰해 보면 길쭉하게 생긴 수컷 대장균이 둥글둥글하게 생긴 암컷 대장균에게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러곤 짧은 관을 암컷 대장균의 세포벽에 밀어 넣고 유전 물질을 투입합니다.
그 결과 암컷은 소위 말하는 자식 박테리아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짝을 이루는 가장 원시적 모습으로 비로소 암컷과 수컷이 나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몸의 일부만 떼어 내 새로운 자식을 만드는 방법을 고안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사실이 두가지 있습니다.

첫째, 수컷과 암컷의 대장균이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합쳐서 자식 대장균에게 물려준다는 사실입니다. 자연히 자식 대장균은 부모에 비해 보다 더 뛰어난 환경 적응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몸의 일부만 떼어 내었던 암수 대장균은 그 대가로 늙어서 죽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性)을 통해 짝이 생기면서 다음 세대의 진화를 이루고, 그 대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분법 상태의 불멸은 상실했지만 다음 대에 보다 우수한 형질을 선택적으로 물려줌으로써 후대(後代)가 보다 진화되고 독특한 개체성을 획득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자연계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동식물들은 이와 같은 원칙에 의해 짝이 있는 것이며 보다 나은 다음의 세대를 개척해 나가는 것입니다.

짝이 있음으로 삶과 죽음이 반복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무생물과 무성생식의 단계에서는 영원히 죽어 있거나 영원히 살아 있는 존재로
직선 운동만이 있을 뿐입니다.

짝이 있는 생명체로 진화함으로써 비로소 삶과 죽음의
원운동이 완성됩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대의 삶이 끝나는 것을 죽었다는 표현보다 '돌아가셨다'는 말을 보편적으로 씁니다.



죽음이란, 한없는 직선의 길을 걷다가 그 길의 끝에 벼랑이 있어 떨어져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고, 삶이 시작되었던 어떤 점에서 출발하여 둥근 길을 따라 걷다가 다시 그 점으로 돌아간다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즉 짝이 생기면서 죽음이 시작됐지만 그 죽음은 삶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삶이 죽음을 돕고 죽음이 삶을 돕는 태극 속의 죽음인 것입니다.

태극도를 잘 보십시오.
살아 있음은 완전히 살아 있는 것입니까?
죽은 것은 완전히 죽은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