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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고유종 '크리스마스 트리'?!

세덕 2012. 12. 12. 17:02

한라산 고유종 '크리스마스 트리'?!

 

1. 빼앗긴 종자들

- 한라산 '크리스마스 트리'?

1950미터의 높이로 제주 섬 전체를 굽어보는 한라산은 산허리부터 구름에 싸여 있습니다. 해발 1100미터를 넘어서자 흰 구름을 뚫고 푸른 잎의 나무들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학명 Abies koreana Wilson, 구상나무입니다.

구상나무는 백록담을 중심으로 해발 약 1400미터까지 팔백만평에 넓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살아서 백년, 죽어서 백년을 지킨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라산의 푸르른 모습은 이 구상나무에게서 나옵니다.

이 나무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그 중에서도 한라산에만 자생하는 고유종입니다. 차가운 기운이 서려있는 고지대에서만 군락을 이루고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이 나무는 '크리스마스 트리'로 해외에서 더 유명합니다.

지난 1904년 유럽으로 유출된 뒤 개량을 거쳐 미국에 등록됐습니다. 이제는 성탄절이 다가오는 연말에 날개 돗친 듯 팔려나가는 '크리스마스 트리'로 불립니다. 우리나라 고유종이지만 재배하려면 오히려 미국에 종자사용료를 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미국에서 전체 시장의 30%를 차지하고 있는 일명 '미스킴 라일락'도 원래는 북한산 정향나무입니다. 유출된 것입니다.

지난 100년간 미국은 한반도에서 4천종 이상의 콩 종자를 수집해 갔고 이를 바탕으로 개량에 개량을 거친 결과 콩 수출 세계 1위 국가로 도약했습니다.

소위 '종자주권'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을 때, 이 구상나무를 비롯해 많은 고유 종자가 해외로 유출됐습니다. 그 당시 유출된 종자만 해도 2만 4천여점이나 된다고 하니 해외의 종자 채집자 입장에서 본다면 한반도는 그야말로 '종자의 보고' 였을 법 합니다.

좋은 일에 쓰인 경우도 있습니다. 미국의 농학자 노먼 볼로그는 1944년 다수확 밀 종자인 '소로나'를 개발했습니다. 이는 개발도상국의 굶주리는 아이들을 위해 시작한 연구인데 여기에도 우리의 고유종인 '앉은뱅이 밀'이 사용됐습니다.

강한 바람에 낱알이 떨어져 수확량이 줄어들자 서양 밀에 비해 키가 절반 밖에 되지 않는 우리나라 고유종 '앉은뱅이 밀'을 다른 종자와 교잡해 생산성을 4배 이상 증가 시킨 겁니다. 결국 노먼은 공로를 인정받아 197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합니다. 한국 토종인 '앉은뱅이 밀' 종자 하나가 1억명의 생명을 살린 겁니다.

2. '총성없는 전쟁' 종자 쟁탈전

- 고유종을 확보하라

이렇게 빼앗긴 종자들이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종자산업의 비약적인 성장 때문입니다. 종자산업의 세계 시장 규모는 우리돈으로 80조원 규모. 불과 7년 뒤인 2020년에는 170조를 넘어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파프리카나 토마토의 일부 종자는 같은 무게의 금보다 최고 2배정도 비쌀 정도로 종자산업은 이미 고부가 가치 산업으로 인식되고 있고, 세계 최대 종자기업인 '몬산토'의 한 해 종자수익은 삼성 전자가 반도체를 팔아 버는 5조 원대에 이르고 있습니다.

선진국에서 고유 종자를 채집해 모으는 건 바로 이 종자 하나하나가 품종 개량을 위한 소중한 '자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종자의 종류는 약 30만종으로 추산되는데 이 가운데 종자의 성질이나 특성이 규명된 건 5천여종에 불과합니다. 약 98%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셈입니다.

품종 개량을 하면서 막다른 골목에 부딪쳤을 때 이를 해결하는 열쇠는 이런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고유종입니다. 예를 들어 기후가 변하거나 이제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병충해가 생겼을 경우 이를 견딜 수 있는 고유 종자를 가지고 있어야 이 종자를 바탕으로 개량종을 만들 수 있습니다.

지난 2009년 전세계를 휩쓸었던 신종플루는 8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신종플루의 유일한 치료제였던 '타미플루'는 바로 중국의 고유종인 '팔각나무'에서 추출한 물질로 만든 신약이었습니다.

만약 이 고유종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신종플루에 대한 치료제 생산은 불가능하거나 훨씬 어려웠을 것이고 아마 더 많은 사상자를 냈을 것입니다.

- '최후의 날 저장고', '현대판 노아의 방주'

북극에서 약 1300킬로미터 떨어진 노르웨이령 스발바르 군도에는 땅 속 깊이 묻혀 있는 인공 동굴이 있습니다. 지하 130미터 깊이에 진도 6.2의 강진에도 끄덕 없고 핵미사일 공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됐습니다. 영구동토층에 자리 잡은 이 시설은 365일 영하 18도의 온도로 일정하게 유지됩니다.

이 곳은 바로 '스발바르 국제 저장소'로 종자를 저장하는 시설입니다. 왜 이런 시설을 만들었을까요? 우리 옛 속담에 '농부는 굶어 죽더라도 종자를 깔고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종자야 말로 인간 문명의 원초적인 자원이자 어떻게 보면 백지상태에서 공동체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단서가 된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 세계를 삼키는 '종자 거인'들

이런 종자의 가치에 일찍 눈을 뜬 몇몇 국가들은 엄청난 투자를 통해 종자를 수집했고 현재는 이 종자들을 바탕으로 소수의 다국적 기업들이 산업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실제 몬산토와 신젠타, 듀폰 등 10대 종자기업들이 전체 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몬산토' 한개 기업이 한 해 연구개발비로 쏟아붓는 돈은 약 1조원. 우리나라 전체의 연구개발비를 몽땅 합친 7천억원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국가별로도 유전자원이 풍부한 미국 중국 인도 등 상위 6개국이 전체 시장의 54%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또 이런 다국적 기업들은 거대 곡물 기업인 카길, ADM 등과 함께 전략적 제휴를 맺고 '종자개발-가공-유통'까지 수직계열화된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3. 국내 종자산업의 현실

- 점령당한 밥상

다국적 기업을 앞세운 종자 선진국들의 위세 앞에 우리나라의 종자산업은 한없이 나약해 보이기만 합니다. 실제 국내 종자산업의 시장규모는 약 1조원 규모. 전체의 1%가 조금 넘는 수준입니다.

우리나라가 보유한 유전자원은 26만여 점인데요. 수치상으로만 보자면 세계 여섯 번째 종자 보유국입니다. 그러나 국내에서 국산종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낮은 게 현실입니다.

우리가 먹는 양파와 당근, 토마토는 약 80%, 무와 배추, 고추는 50% 이상이 그 종자의 소유권을 외국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나마 이는 나은 편입니다. 식량주권과 직접 관련이 없는 꽃과 과수의 경우 약 90%가 외래종입니다.

우리가 친숙하게 여기는 매운맛의 대명사 청양고추도 종자의 소유권을 미국이 가지고 있고 금싸라기 참외와 삼복 꿀수박 등은 한참을 해외에서 떠돌다 최근에야 우리나라 기업으로 귀속됐습니다.

- 재배할수록 손해? 로열티의 경제학

거대 다국적 종자 기업들의 종자 사용료, 즉 로열티에 대한 요구는 점차 거세지고 있습니다. 우리 토종 자원이라 하더라도 결국 다른 나라에 등록이 돼 있으면 '종자값'을 내야 합니다. 이는 우리나라도 가입돼 있는 국제 신품종 보호 연맹, 즉 UPOV의 협약에 따라 올해 초부터 모든 품종으로 그 범위가 확대됐습니다.

이 로열티는 고스란히 농가의 부담으로 남게 됩니다. 취재 과정에서 방문한 서양란(西洋蘭) '심비디움' 농가의 경우 묘목 1개당 가격은 1만 5천원 정도. 그런데 이중 로열티는 절반 가량인 7-8천원선입니다. 이 심비디움은 중국에도 수출되는데 이렇게 화훼 수출이 늘어날 수록 막대한 로열티가 해외로 나가는 악순환이 지속되는 겁니다.

이에 따라 로열티 지급액수도 급격히 늘고 있습니다. 지난 2000년 30억원 규모에 불과하던 로열티 액수는 지난해 200억원을 돌파했고 향후 700억원에서 천억원 규모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 '불임씨앗'으로 돈 번다 : '터미네이터 종자'

최근에는 이 종자값을 제대로 받아내기 위한 맞춤형 종자기술까지 등장했습니다. 이른바 '터미네이터 종자'라 불리는 이 기술은 종자를 구입한 뒤 농사를 짓고 여기서 나오는 씨앗으로 농사를 지으면 아예 싹이 나지 않거나 소출이 현저하게 줄어들도록 만드는 겁니다.

유전자 변형 기술을 이용해 인공적으로 '불임씨앗'을 만드는 건데 이렇게 될 경우 매년 울며 겨자먹기로 종자를 새로 사와야 하고 로열티를 꼬박꼬박 낼 수밖에 없습니다.

4. 포기할 수 없는 산업 : 출구는 있다

- '황금 씨앗' 제조기술

늦가을이 지나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11월부터는 탐스러운 '딸기' 수확철입니다. 최근 딸기 농가를 방문하면 순서대로 빨갛게 물이 오르는 딸기들을 볼 수 있습니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딸기 종자는 '설향'인데요. 이는 순수 국내에서 개발된 품종입니다. 어찌나 품종 개발이 잘 되었던지 촉성재배가 가능해 생산량은 기존 일본 품종인 '장희', '육보'에 비해 거의 2배 가량 많고, 표면이 매끄럽고 굴곡진 데가 없어 상품성도 높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맛'일 텐데요. 이 '설향'은 당도도 높고 특히 수분 함량이 높아 과즙이 풍부합니다.

이 '설향'에 힘입어 7-8년 전 10%미만이던 국내종자 비율이 최근에는 74%까지 뛰어올랐습니다. 너도 나도 맛과 모양, 생산량이 월등한 설향을 재배하게 되면서 생긴 놀라운 결과입니다.

이 설향의 성공은 다른 작물 또한 꾸준한 품종개량을 통해 국산 종자 비율을 높일 수 있고 로열티 지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지금은 많진 않지만 드물게나마 이런 성공 사례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 '몸집' 키우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종자의 개발이 바로 작물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종자라도 시장에서 제 값을 주고 팔리려면 합리적인 가격으로 공급돼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채산성을 갖춘 대단위 생산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평균 경작 면적이 1.6ha에 불과한 '소농' 중심의 환경인데다 종자 기업의 규모도 영세합니다. 국내 천여 곳의 종묘 기업 가운데 직원이 10명이 넘는 곳은 단 20곳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 문제는 거시적인 안목과 추진력

농촌진흥청 산하 유전자원연구센터에는 약 17만점의 종자가 보관돼 있습니다. 보존이 까다로운 작물을 위해 영하 196도의 특수 저장고 시설도 완벽하게 갖춰놓고 있습니다. 기술과 인력은 갖춰져 있습니다. '종자 산업'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면서 인력과 자원을 활용해 산업을 발전시켜 나갈 때입니다.

- 우리집 살림 옆집에?

이런 종자주권과 관련된 논의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종자의 개량이 지속적으로 이뤄지는 상황에서 그 종자의 국적을 따지는 건 무의미하고 굳이 국산종자로 농사를 지어야 하느냐는 반문도 나옵니다. 일견 '종자 국수주의'로 오해를 살 소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먹거리'의 원천이 되는 종자를 다른 나라에만 맡겨 두는 것은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국제 정세와 기후 등 자연환경을 고려해 볼 때 자칫 무책임한 결정이 될 수 있습니다. 종자개발과 이용에 대해 다른 나라와 교류하고 공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불안정한 미래에 든든한 대비를 해두는 건 필요합니다.

정부는 지난해부터 2021년까지 10년에 걸쳐 예산 4천 9백억원을 투입해 종자 수출 2억달러를 달성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명칭대로 '골드 시드', 즉 황금 씨앗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