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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 대왕의 후연 정벌

세덕 2013. 1. 16. 14:12

광개토 대왕의 후연 정벌

 
 

광개토 대왕의 후연 정벌


고구려와 후연은 400년 이후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후연을 건국한 선비족의 모용씨 세력은 일찍이 고구려를 침범하여 미천왕의 능을 파헤치고 왕태후를 볼모로 잡아가 고국원왕에게 커다란 치욕을 안겼으며, 후일의 광개토 대왕에게 있어 후연은 지난날의 원한을 되갚아야 할 보복의 대상이자 서토 정벌을 위하여 반드시 정복해야 할 국가였다. 고국양왕 때 일어난 후연은 처음에 고구려와 요동 땅을 두고 분쟁을 벌였지만, 얼마 뒤 후연은 북위를, 고구려는 백제를 막아야 함에 따라 두 나라는 우호 관계를 맺었다.

 

| 후연의 맹약 파기 |

그러다가 광개토 대왕 때인 400, 고구려가 낙동강 원정을 떠난 사이 후연은 갑작스레 고구려를 침범하였다. 아래는 사서들의 공통적인 내용이다.

“(400) 1월 고구려왕 담덕이 후연에 사신을 보냈다. 2월에 후연의 왕 모용성이 고구려왕의 태도가 오만하다 하여 고구려를 쳤는데, 표기대장군 모용희를 선봉으로 한 3만 대군으로 신성과 남소성을 비롯한 700리의 땅을 빼앗았다.”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냈는데 후연 왕이 고구려의 오만을 구실로 침범하였다는 것은, 고구려가 후연 왕이 노여워할 만한 요구를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신성과 남소성을 비롯한 700리 땅을 쉽게 빼앗긴 까닭은, 그 해 남정을 떠난 고구려 5만 대군의 공백이 컸음을 말해 준다.

 

| 후연에 대한 응징 |

급작스런 후연의 침략을 받은 광개토 대왕은 남정을 마치고 전열을 정비한 후 곧바로 보복전을 개시하였다.

“(402) 고구려가 후연의 숙군성(랴오닝 성 베이전)을 치니, 후연의 평주 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기록 내용은 매우 짧지만, 평주 자사라는 자가 성을 버리고 달아날 정도로 고구려의 공격이 강력하였음을 말해 준다. 숙군성은 후연의 수도 용성(차오양)의 동북쪽 가까이 있었는데, 고구려는 용성 근처까지 진입하였던 것이다. 이는 후연에 대한 고구려의 첫 번째 보복전이었다.

 

베이징 진출과 요동성 전투 |

얼마 후 광개토 대왕은 또다시 후연을 공격하였는데, 이에 대한 사서들의 기록은 조금씩 다르다.

“(404) 11월 고구려가 후연을 침범하였다.”

고구려가 연군을 노략질하여 100여 명을 죽였다.”

“11월 후연의 왕 모용희가 사냥을 나가 북쪽의 백록산(랴오닝 성 링위안)과 동쪽의 청령(용성 동남쪽), 남쪽의 창해(보하이 만)를 빙 돌았는데, 용성으로 돌아온 병사 가운데 범과 이리에게 물려 죽거나 얼어 죽은 자가 5,000여 명이나 되었다.”

기록 내용은 약간씩 다르나, 공통적으로 고구려가 후연 깊숙이 진입하였다는 기사이다. 두 번째 기록에서 연군은 지금의 베이징인데, 이로 보아 고구려가 베이징까지 진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고구려는 현도와 요동 두 지역을 되찾은 것으로 추측된다. 세 번째 기록에서 후연 왕 모용희가 사냥을 나갔는데 산짐승에게 물려 죽거나 얼어 죽은 병사가 무려 5,000여 명이었다고 한 것은, 요동을 침공한 고구려를 모용희가 방어하다가 패하여 병사 5천이 죽은 사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베이징 진출은 영토 확장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같은 해 낙동강 유역의 왜가 기마병을 앞세워 고구려 국경을 침범하고, 후연의 모용희가 곧장 반격에 나섰기 때문이다.

“(405) 1월 후연 왕 모용희가 고구려의 요동성을 공격하였는데, 성이 위태로울 적에 모용희가 장졸들에게 명하기를 성벽을 먼저 오르지 마라. 내가 황후와 함께 가마를 타고 먼저 입성하리라.’ 하였다. 그 틈에 성내 군사들이 방비를 다시 굳게 하여, 모용희는 끝내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위 기록에서는 후연군의 이상한 작전 덕에 고구려가 요동성을 지켜냈음을 알 수 있다.

 

| 용성 함락과 고토 수복 |

이렇게 후연, 왜와의 싸움으로 국력을 소모한 고구려는 잠시 주춤했다가, 2년 후 패려와 연합하여 다시 후연을 공격하였다.

“(406) 1월 후연 왕 모용희가 거란(패려)을 습격하여 형북에 이르렀는데, 패려의 무리가 많음을 꺼려 돌아가려 하였다. 2월에 무거운 장비를 버리고 고구려를 습격하였으나, 후연군은 3,000여 리를 행군하여 병사와 말이 지치고 추위로 얼어 죽는 자가 길에 깔렸고, 목저성(랴오닝 성 무치)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기사는 전황 서술이 매우 어색하고 모순이 많아 합리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우선, 형북(산시 성 다이 현)은 후연의 땅인데 모용희가 패려를 습격하여 그곳에 다다랐다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으므로, 후연의 땅인 형북을 패려가 침범하자 모용희가 그곳으로 가 막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 후연군이 고구려를 기습할 때 3,000여 리를 행군하였다고 했는데, 실제로 거란에서 고구려 목저성까지의 거리는 3,000리가 채 되지 않으므로 형북에서 목저성까지의 거리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고구려가 후연의 주요 거점을 모두 점령하고 퇴로를 차단하였기 때문에 불가항력적으로 3,000리를 쫓겨 목저성 공격까지 실패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상을 정리하면, 406년 고구려는 패려와 연합하여 후연을 공격하였는데, 패려군은 후연의 후방인 유주(허베이 성)를 들이쳤고 당황한 후연군이 유주로 간 사이 고구려군은 다링 강의 용성을 습격하여 점령함으로써 후연의 세력을 초토화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모두 수복하였다. 406년 전쟁은 고구려와 후연의 마지막 전쟁이자 국제전이었고, 이 전쟁을 끝으로 후연은 극심한 내분과 풍발의 난으로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은 모용씨의 후연이 망하고 고구려인 고운의 북연이 서자, 동족의 정례를 베풀어 북연을 복속하고 다링 강과 허베이 성에 걸친 북연의 영토를 지배함으로써 서토 정벌을 마무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