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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밑돌 깔고 일제가 못박은 ‘평양’의 한사군 본문

역사 이야기/잊혀진 역사

중국이 밑돌 깔고 일제가 못박은 ‘평양’의 한사군

세덕 2013. 10. 22. 12:30

중국이 밑돌 깔고 일제가 못박은 ‘평양’의 한사군

중국이 밑돌 깔고 일제가 못박은 ‘평양’의 한사군


중국이 밑돌 깔고 일제가 못박은 ‘평양’의 한사군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


한사군의 미스터리

현재 주류 사학계는 일제 식민사학의 구도에 따라 평양 일대를 한사군 낙랑군 지역이라고 비정하지만 일제도 처음부터 그렇게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조선통감부가 도쿄대 공대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에게 평양의 석암동을 비롯한 전축분(벽돌무덤) 조사를 의뢰할 때만 해도 ‘고구려 고적조사 사업’의 일환이었다. 이런 ‘고구려 유적’이 ‘한(漢) 낙랑군 유적’으로 바뀌게 된 데는 도쿄대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의 역할이 컸다.

일제, 식민지성 강조하려
한사군을 조선사 시작점으로 조작

중국 기록 미심쩍은데도
실증사학 미명아래 한국사 정설로

도리이 류조는 만철(滿鐵)의 의뢰로 남만주 일대에서 ‘한(漢) 낙랑시대 고적조사 사업’을 수행했던 인물이다. 남만주 유적조사를 마친 그는 대동강변에서 중국식 기와를 발견했다면서 이 일대를 낙랑군 지역이라고 주장했으나 별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유적들이 고구려 유적이라는 것은 일종의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바뀐 후 도리이 류조가 ‘고구려 고적조사 사업’을 ‘한 낙랑시대의 고적조사 사업’으로 개칭하자고 제안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훗날 조선사편수회를 주도하는 이마니시 류(今西龍)도 처음에는 평양 일대의 유적을 고구려 유적으로 보았으나 총독부의 방침을 알고는 태도가 달라졌다. 이후 이마니시 류는 가는 곳마다 2000년 전 한나라 시대의 와당과 봉니(封泥)를 발견하고 2000년 전에 세웠으나 그간 아무도 보지 못했던 ‘점제현 신사비’를 최초로 발견하는 ‘신의 손’이 되었고 평양 일대는 낙랑군 유적이 되어갔다.

   
 


» 평양에 있는 기자의 묘. 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가 조선까지 왔다고 믿고 이를 근거로 조선인과 중국인을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했다. 일제는 한국과 중국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한국인을 일본인과 동족으로 만들기 위해 기자를 부인했다.
 
 
 

 일제, 평양 일대 낙랑군 유적지 규정

그런데 평양지역을 낙랑군의 치소라고 규정해놓고 보니 기자(箕子) 문제가 발생했다. <상서대전(尙書大典)> <사기> 등에 따르면 기자는 은(殷)나라 주왕의 그릇된 정사를 간쟁하다가 투옥된 인물이다. 주(周)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석방시켜주었으나 기자는 주나라를 인정할 수 없다면서 동쪽으로 망명했다.

<한서> ‘지리지’는 “은나라의 도가 쇠하자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고 그의 망명 전에 조선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는 물론 단군조선일 것이다. 현재 요령성 대릉하 상류 객좌현(喀左縣)에서 기후(箕侯)라는 명문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기자가 이 지역까지 왔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조선의 상당수 유학자들은 기자가 한반도까지 왔다고 믿고 조선과 중국을 같은 민족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총독부는 평양 지역에서 출토된 중국계 유물들이 조선과 중국이 같은 민족이라는 관념이 강해지는 계기가 될 것을 염려해야 했다.

조선총독부는 1916년 <조선반도사 편성 요지 및 순서>에서 “조선반도사의 주안점은… 첫째 일선인(日鮮人: 일본인과 조선인)이 동족(同族)인 사실을 분명히 할 것…”이라고 규정했는데 이 목적에 장애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마니시 류는 1922년 ‘기자조선 전설고(考)’에서 기자는 낙랑의 한(韓)씨가 가문을 빛내기 위해 기자의 후예라고 가탁했을 뿐 조선인들의 조상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현재 한국 사학계 주류가 단군을 ‘만들어진 전설’이라고 부인하고 기자도 부인하는 것은 이마니시 류가 만든 이런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따른 것뿐이다.

‘한사군→임나일본부→조선총독부’

이마니시 류는 1935년 출간한 <조선사의 길잡이>에서 한국사(조선사)의 시작을 한사군부터라고 서술했다. 한국사의 주요 흐름을 ‘한사군→임나일본부→조선총독부’로 연결시켜 일제의 한국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평양지역은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서기전 108년보다 무려 2100여년 후에 일제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한사군의 중심지인 낙랑군 지역으로 재탄생되었다. 한국사의 식민지성을 강조해 일제의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였다.

해방 후 신생 대한민국은 일제가 만든 이런 역사상에 대한 종합적 검토를 통해 일제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새로운 한국사 체계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해방 후 수립된 냉전 구도 속에서 일제 식민사학은 실증주의란 미명 아래 한국사 주류 학설로 계속 살아남았다. 그리고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존재했고 낙랑군이 평양 일대에 존재했는지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면 재야로 몰아 학계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하나뿐인 정설로 만들었다.

   

 
                                                    » 사마천(왼쪽) · 기자(오른쪽)
 
 
 

그러나 이를 정설로 받아들이기에는 의문점이 너무 많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20세기에 만든 후대의 시각이 아니라 한사군이 설치되었다는 서기전 2세기의 당대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먼저 <사기>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이 여러 의문점을 제공한다.

<사기>에 따르면 한 무제는 고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좌장군 순체와 누선장군 양복에게 5만7000명의 대군을 주었다. 두 장군은 1년이 넘는 전쟁 기간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고조선 왕실을 무너뜨리고 귀국했다. 그러자 한 무제는 좌장군 순체는 사형시킨 후 시신을 조리돌리는 기시(棄市)형을 내렸고, 누선장군 양복도 사형선고를 내렸다가 막대한 속전(贖錢)을 바치자 목숨은 살려주되 귀족에서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켰다. 위산(衛山)은 고조선과 강화협상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이미 사형 당했으며, 제남(濟南)태수 공손수(公孫遂)도 마음대로 군사형태를 바꾸었다는 이유로 사형 당했다. 그래서 사마천은 “태사공(太史公)은 말한다”라는 사평(史評)에서 “양군(兩軍)이 함께 욕을 당하고, 장수로서 열후(列侯)가 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라고 혹평하고 있다. 게다가 기시형을 당한 좌장군 순체는 “본시 시중(侍中)으로 천자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는 인물이어서 무제가 이 전쟁 결과에 얼마나 분개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전쟁에 나갔던 장수가 승전하고 돌아오면 제후(諸侯)로 봉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고조선과 전쟁에 나섰던 장수들은 제후는커녕 모두 사형 당했다. 숱한 고생 끝에 적국의 수도를 점령하고 그 지역에 식민통치기구를 설치하고 개선한 장수들을 사형시키는 왕조가 존속할 수 있을 것인가?

사마천이 제공하는 의문은 이뿐이 아니다.

사마천(서기전 135년~서기전 90년)은 이 전쟁의 목격자였음에도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정벌하고 사군(四郡)으로 삼았다”라고만 적고 사군의 개별적 이름도 적지 않았다. 먼 옛날의 전쟁도 현지답사를 통해 꼼꼼하게 확인했던 이 역사가는 왜 한사군의 이름도 적어 놓지 않은 것일까?

한사군의 이름은 조한전쟁이 끝난 200여년 후에 반고(班固)가 편찬한 <한서(漢書)> ‘무제(武帝) 본기’에 처음 등장한다. 낙랑·임둔·현도·진번이란 명칭이 이때 나타나는 것이다. 전쟁의 목격자 사마천이 적지 않았던 이름을 200여년 후의 반고는 어떻게 적을 수 있었을까?

반고는 흉노 정벌에 나섰던 두헌(竇憲)을 따라 종군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중화(中華)사관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한서>도 의문투성이다. 한사군에 대한 기술들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다. <한서> ‘무제본기’는 4군으로 적었으나 ‘지리지’는 “현도·낙랑은 무제 때 설치했다”고 2군으로 적었으며, ‘오행지’(五行志)는 “두 장군이 조선을 정벌하고 삼군을 열었다”고 3군으로 적었다. 같은 <한서>지만 ‘사군’(무제 본기), ‘이군’(지리지), ‘삼군’(오행지)으로 제각기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기> <한서>같은 고대 역사서가 의문투성이로 기록하고 있는 한사군을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확고하게 각인시킨 세력은 물론 일제 식민사학이었다. 한국사의 시작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이를 한국 주류 사학계가 현재까지 정설로 떠받들자 중국은 ‘이게 웬 떡이냐’하고 동북공정에 그대로 차용해 ‘한강 이북은 중국사의 영토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과 일본은 예부터 역사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한 전통이 깊은 나라들이다.

중국은 고대부터 춘추필법이란 미명 아래 사방의 다른 민족들에 대해 의도적으로 비하하는 서술을 해왔다. <한서> ‘위현(韋賢)열전’은 “동쪽 조선을 정벌함으로써 흉노(匈奴)의 왼쪽 팔을 끊었다”라고 적고 있는데 조선과 흉노의 연관성은 차치하고라도 다른 민족의 이름을 ‘오랑캐(匈) 종(奴)’이라고 적는 데서 중국인들의 비뚤어진 시각을 알 수 있다.

서기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日本書紀)> 역시 19세기에 나가미 지요(那珂通世)가 시조 신무(神武)의 즉위년이 조작되었다는 참위설(讖緯說)을 주장한 것처럼 역사왜곡에 있어서는 뒤지지 않는 나라였다.

중화 패권주의 사관의 발로인 중국 동북공정은 20세기 일제 황국(皇國)사관의 21세기 판에 불과한 것이다. 해방 6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눈이 아니라 타자의 눈으로 그린 것을 한국사의 시작이라고 가르친다면 후세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