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주 천지조화

<환단고기>개천절과 환웅천왕-신시개천 본문

역사 이야기/잊혀진 역사

<환단고기>개천절과 환웅천왕-신시개천

세덕 2016. 9. 30. 11:06

<환단고기>개천절과 환웅천왕-신시개천

<환단고기>개천절과 환웅천왕-신시개천



개천절은 ‘하늘이 열린 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개천이란 본디 환웅천왕께서 처음으로 하늘을 열고 백두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홍익인간·재세이화의 뜻을 펼치기 시작한 사건을 가리킨다. 개천開天(하늘이 열림)이라 함은 배달국을 건설한 사건을 표현한 것으로 민족사의 시작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 한민족사는 실질적으로 신시神市 배달에서 시작 하므로 환웅천왕께서 신시를 여신 날을 개천절로 삼는 것이 옳다. 오늘날 대다수의 국민이 개천은 BCE 2333년 10월 3일에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날은 실제로는 단군이 나라를 세운 날이다.

 

『단군세기』에는 “배달국 신시 개천 1565년(戊辰: BCE 2333) 10월[上月] 3일에 신인 왕검께서 오가五加의 우두머리로서 무리 8백 명을 거느리고 단목 터에 와서 백성들과 더불어 삼신상제三神上帝님께 천제를 지내셨다. 왕검께서 지극히 신성한 덕성과 성인의 자애로움을 겸하시고, 능히 선대 환인·환웅 성조의 가르침을 받들고 하늘의 뜻을 계승[繼天]하시니 그 위용이 대단하였다. 이에 구환의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고 진실로 복종하여 천제의 화신으로서 임금으로 추대하니, 이 분이 바로 단군왕검이시다”라고 했다. 이렇듯 개천절은 동방 고조선의 출발을 경축하는 기념일이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 동천왕 21년(247) 조에는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이 살던 곳이다. 다른 기록에는 ‘(선인 왕검이) 왕이 되어 왕험王險성에 도읍했다’고 하였다[或云王之都王險]”라고 전한다. 여기서 ‘선인 왕검’은 곧 단군으로서 왕험성 도읍에 관한 다른 기록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일연이 『삼국유사』 왕력王曆에서 고구려 시조에 대해 “성은 고高, 이름은 주몽朱蒙인데… 단군의 아들이다”라고 쓴 것이나, 이승휴가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시라尸羅(신라)·고례高禮(고구려)·남북옥저·동북부여·예穢·맥貊·응膺(백제) 등 여러 임금이 누구의 후손인가를 묻는다면 세계世系는 역시 단군에서부터 이어져 왔다”라고 쓴 것처럼 단군은 민족사의 시조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인식은 조선조에도 이어졌다. 조선은 개국년(1392) 8월 “단군은 동방에서 처음으로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이라며 제사를 지내게 했다. 영조는 “환웅은 곧 단군의 아버지이고, 환인은 곧 단군의 할아버지이다.(『영조실록』 41년 12월 8일)”라고 말했고, 정조는 “우리 동방의 개국은 단군으로부터 시작되었다.(『정조실록』 16년 8월 12일)”라고 말했다. 이처럼 ‘개국시조=단군’은 조선에서도 하나의 상식이었다.


단군을 민족적 정체성과 통합의 구심점으로 삼은 전통은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구성되면서 국가의 제도의례 속에 편입되었다. 그리하여 개천절이 국경일로 제정되고, 단군기원檀君紀元(단기)이 정부의 공식 연호로 지정되었던 것이다. 국경일로 지정되면서 그동안 음력 10월 3일에 열렸던 개천절이 양력 10월 3일로 고정되었다. 개천절이 음력 10월 3일로서 우리의 고유한 제천행사 시기와 일치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즉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음력 10월을 상달이라고 부르며 제천의식을 거행해왔다. 이는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예맥의 무천 등에서 확인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 동방문화의 시조 단군은 유독 집요하게 부인 되어왔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심지어 일연一然이 『삼국유사』에서 단군을 창작했다고까지 주장했다. 개천절이 명실상부한 민족의 명절이 될 때 민족사의 국통 맥은 바로잡힐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