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염병을 일으키는 병원체와 숙주(동물·사람) 사이의 작용은 크게 유행성-풍토성-공생 세 단계로 이뤄진다. 전염병이 유행하는 유행성 단계 이후엔 일정 수준의 감염률을 유지하는 풍토병으로 남거나, 서로 이익을 주는 공생 단계로 접어든다. 이때 전염병이 전세계적인 유행으로 번지면 ‘범유행’이라 부르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예가 많다.
가장 잘 알려진 예는 흑사병(페스트)이다. 흑사병의 1차 범유행은 540년 이집트 남부에서 시작됐다. 이 병은 그 후 6년 내 유럽 전역으로 번졌고, 소규모의 국소적인 발병을 일으키다가 14세기 유럽에서 2차 범유행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유럽 인구의 3분의 1 이상(2500만명 추정)이 사망했으며, 사망자가 속출하자 노동력이 감소해 사회·정치적인 변동까지 일어나 중세시대가 르네상스 시대로 이행되는 전환점이 됐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을 몰살시킨 호흡기 질환도 대표적이다. 15세기 각종 질병에 면역을 가진 유럽인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면서 전파된 두창, 홍역, 유행성 이하선염 등은 원주민 대부분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유럽인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이 전염병의 유행으로 비교적 손쉽게 이뤄졌다는 분석도 많다. 또 19세기 초 유럽을 정복한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는 러시아 원정을 떠나면서 발진 티푸스와 이질로 고생하다 전쟁 전사자보다 더 많은 사망자를 낳았다. 전염병의 유행은 나폴레옹의 절대권력이 쇠퇴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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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 중세유럽을 떨게 만든 흑사병. 사진은 흑사병으로 고통받는 유럽인들이 등장한 잉그마르 베르그만의 영화 ‘일곱 번째 봉인’ (우) 가축의 집단사육으로 인수공통전염병이 늘고 있다. photo 조선일보 DB
점차 과학이 발달하면서 인류는 전염병의 원인을 밝혀내기 시작했다. 1854년 영국인 의사 존 스노(John Snow)는 콜레라의 유행이 음용수 오염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1880년대 루이스 파스퇴르(Louis Pasteur)와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도 탄저균과 콜레라균을 발견하면서 특정 세균이 특정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하지만 의외로 인류 역사상 가장 무서운 전염병 범유행은 20세기 초에 발생했다.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유행했던 ‘스페인 인플루엔자(스페인 독감)’는 인류 역사상 같은 기간 그 어떤 질병보다도 많은 사람, 특히 청년층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1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약 4000만명이 사망했으며, 치사율은 무려 2.5%였다.
우리나라도 상황은 비슷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는 1918년 11월부터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인플루엔자 관련 기사를 내보냈다. 이 신문은 1918년 11월 13일 ‘진주 경내는 도당관으로부터 막벌이꾼까지 감기 걸린 사람 투성이요, 화장장에서는 주야로 분주’, 11월 28일 ‘충청남도 서산 지역은 심한 곳은 한 촌이 모두 병에 걸려… 사람이 없는 참혹한 광경’이라 기사화했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도 ‘1918년 11월 유행성 독감이 급속히 퍼지면서 조선인 742만2113명이 발병했고, 13만9128명이 사망’했다고 전했다. 이를 근거로 추산할 경우 우리나라의 1918년 당시 인플루엔자 치사율은 무려 1.9%에 이른다.
진화 과정을 더듬어 보면, 치명적인 전염병은 대개 이전엔 접촉한 적 없는 동물과 새롭게 접촉하거나 병원체 자체적으로 변이를 일으켜 발생한다. 특히 동물-사람 간에 감염되는 병을 가리켜 ‘인수공통전염병(Zoonosis)’이라 한다. 1918~1919년 범유행을 일으킨 ‘스페인 인플루엔자’뿐 아니라 에이즈·광우병·사스·신종 인플루엔자 등 중요한 질병도 모두 인수공통전염병이다.
오지 개발로 인한 새로운 동물과의 접촉, 초식동물인 소에 대한 동물성 사료 사육, 동물과의 직접적인 접촉 확대, 대규모 축산산업으로 인한 밀집된 사육 등이 주범으로 지적된다. 특히 가축의 집단 사육은 병원체의 변이 가능성을 더욱 높여 폭발적인 유행을 일으킬 수 있고, 이러한 변이는 인간에게도 영향을 주게 된다.
앞으론 기존 미생물에 새로운 변이가 일어나거나 인간이 이전엔 접하지 못했던 병원체에 노출될 가능성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현대 인류의 발전 속도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항생제는 계속 발달하고 있지만, 오남용으로 인한 내성 병원체가 속출하면서 강력한 항생제에도 죽지 않는 ‘수퍼 박테리아’가 출현했다. 가축의 사료에 들어가는 항생제도 인수공통전염병에 내성을 일으켜 감염을 촉진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지구 이외의 행성이나 우주에서 들여온 새로운 미생물의 출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지구 온난화는 기후 변화를 초래해 생태계 변화를 일으킬 것이고, 이로 인해 과거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질병도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서식하는 모기 종류가 변하면서 열대성 질병이 유행할 수 있다. 또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그 안에 감추어져 있던 미생물이 활성화될 수도 있다.
만성질환도 예외가 아니다. 자궁경부암-인체 유두종바이러스(Human papilloma virus), 간암-만성 B형 또는 C형 간염바이러스, 위암-헬리코박터 파일로리(Helicobacter pylori)의 관계와 같이 병원체가 암을 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앞으로 암의 주된 원인으로 병원체의 역할이 계속 밝혀질 것이고, 미생물은 암의 치료와 예방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인간의 평균 수명 증가와 치료 기술 발달로 병·의원을 중심으로 ‘기회 감염(면역성이 떨어질 때 질환을 일으키는 감염균)’이 함께 늘어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병원체는 항생제 내성인 경우가 많아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생물 테러(Bioterrorism)’의 수단으로도 병원체가 사용될 수 있다. 실제 1346년 타타르군(중국 소수민족 군대)은 페스트로 사망한 병사의 시신을 적진의 성 안으로 던져 넣었고, 1767년 영국군은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두창으로 오염된 담요를 제공한 역사적 사례가 있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미국을 ‘백색 공포’로 몰아넣었던 ‘탄저균 편지 테러’도 이 같은 예다.
/ 임현술 동국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