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내다 본 ‘예언가' 조헌
김진수 js@gimpo.com
▲ 중봉 조헌
김포출신 중봉 조헌 선생 인물에 대한 이미지는 그 동안 학자, 정치개혁가, 문인(시인), 의병장 등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조헌 선생이 임진왜란을 예언하고, 천문과 지리에 밝은 도가사상의 전문가였다면 조헌선생의 이미지에 누가 되는 것일까?
조헌 선생은 예언가로서 또 다른 모습을 갖고 있었음을 지나칠 수 없다. 어쩌면 학자로서, 정치개혁가로서 그의 진면목은 도가사상에 뿌리를 두었던 것이 아닌가도 생각해본다. 이 부분에 대해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예언을 했다’거나 ‘음양에 밝았다’거나, ‘점을 쳤다’거나 ‘천문지리에 밝았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붙게 되면 학자로서 인식이 평가절하 되는 편견들이 있다. 그 동안 정통 학자로서 가치를 부여해온 인물을 ‘예언가'로 규정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일까?
‘예언가'로 활동한 새로운 조헌선생을 만나보자.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수정실록 선조25년(1592) 8월1일자 기사는 조헌이 ‘예언가임을 말해주고 있다. 기사 제목을 보면 ‘조헌이 천문과 인사의 길흉을 헤아렸다’고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제목으로만 보면 분명 조헌은 천문, 지리에 밝은 ‘예언가'로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도통한 한학자로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는 지금까지 조헌 선생에 대한 인식이 전면적으로 바뀌어야 할 부분이 될 수 있다.
“<중략>그러나 그 계책이 채택되지 않자 밤마다 천문(天文)을 우러러 살피면서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온종일 먹지 않기도 하였는데, 곁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그리고 늘 처자로 하여금 무거운 것을 지고 걷는 일을 연습하게 하였으며, 또 문인(門人)으로 하여금 글을 읽는 여가에 날마다 30리씩 걷는 연습을 시키면서 말하기를 ‘머지않아 왜적의 난리를 피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시급한 업무이다’ 하였는데, 문인들이 모두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일본이 조선을 침공할 것이라는 예언의 내용으로써 30리씩 걷는 연습을 시켰다는 것은 피난준비를 했다는 말이다. 상식적으로 조선의 성리학자로 볼 수 없는 행동거지다.
하늘의 징조를 보고 천문을 예언
계속해서 같은 자료의 내용이다. “<중략>신묘년(1591/선조24년) 가을에 문인 박정로(朴廷老)와 함께 금산사(金山寺) 누각에 올랐는데, 붉은 기운 세 가닥이 하늘 북쪽에 길게 뻗치고 서남쪽으로 반쯤 뻗쳐 있는 것을 보고 박정로에게 말하기를 ‘수길(秀吉)의 군사가 이미 움직였으니 내년에 틀림없이 이 기운처럼 대대적으로 침입해 올 것이다. 모름지기 일찍 피난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하였다. 그리고는 이 해 봄에 선조의 묘소에 성묘하고 제문을 지어 제사하며 난리가 일어날 것이므로 하직한다는 뜻을 고하였다. 그 뒤 처(妻)의 장례를 치르려고 친척과 빈객이 와서 모여 있었는데 갑자기 공중에서 우레처럼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이에 ‘왜병이 바야흐로 바다를 건넜다’ 하고는 장례를 재촉하여 끝내고 공주(公州)로 돌아왔는데, 적이 과연 그날 우리 지경을 침범하였다” 조헌이 하늘의 징조를 보고 즉 천문 예언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또한 조선 인조 때의 문신 김상현의 시문집인 청음집★ 제28권 ‘고(故) 의병장(義兵將) 증(贈) 이조판서 중봉(重峯) 조선생헌(趙先生憲)의 신도비명 병서’에도 조헌의 예언에 대한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중략> 그러나 상소를 올린 지 3일이 지나도록 비답이 내려지지 아니하였다. 이에 선생은 주춧돌에 이마를 찧어 피가 얼굴에 흘러내렸다. 이를 본 어떤 사람이 선생께서 괜히 자신을 괴롭게만 하는 것이라고 조롱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말하기를 ‘내년에 산골짜기로 피난을 가게 되어서는 반드시 내가 한 말을 떠올릴 것이다’하였다.<중략>”라고 예언하고, 또 자료는 “선생은 <주역>의 점술에 아주 능하였다. 임진년 4월에 동남쪽에서 우레가 울리는 것과 같은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는 크게 놀라 말하기를 ‘이는 하늘의 북소리이다’하였다. 그리고 또 어느 날 밤에는 천문을 살펴보다가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더니 한참 뒤에는 다시 하늘을 우러러 보고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화(禍)가 행조(行朝)에 미쳤는줄 알았는데, 다시금 자세히 살펴보니 북쪽으로 가신 두 왕자께서 필시 적중에 빠졌겠구나’하였다. 문인들이 이를 기록해 두었는데, 그 뒤에 보니 같이 밝아서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반드시 천리와 인심의 정도에 근거를 두고 시무(時務)와 사의(事宜)의 변칙(變則)을 참고하였는바, 이는 실로 추산하거나 억측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자료는 구체적으로 조헌이 <주역>의 점술에 능하였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헌의 예언 능력은 예사롭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헌은 이 같은 예언의 능력을 어디에서, 또는 누구를 통해 배웠을까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해답은 정철(鄭澈)의 아들 정홍명(鄭弘溟)이 인조21년(1643)에 지은 <기옹만필(畸翁漫筆)★★ >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중략> 조중봉(趙重峰 조헌)은 토정에게 배웠는데, 경서와 역사에 깊이 잠심하여 노력을 남보다 더하였다. 그의 저술한 글을 보면, 앞일을 아는 슬기가 자연히 부합되니, 이것이 이른바 ‘지성(至誠)은 미리 안다’는 것인가. <중략>중봉은 천문학에 밝았는데, 신묘년(1591, 선조 24) 세모에는 매양 왜구를 근심하여 전후 상소를 올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임진년 초봄에 아내가 죽어 장사지내는데, 미처 구덩이를 덮기 전에 문득 매우 놀라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천고(天鼓)가 동하였으니, 반드시 평수길(平秀吉)이 군사를 일으켰다’하였다. 그리고 집안사람과 장례에 참석한 친척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각기 돌아가서 빨리 피난할 준비를 하라. 나는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할 것이다’ 하니, 듣는 사람들이 대부분 믿지 않았는데, 얼마 안 되어서 적의 경보가 이르렀다” 고 말하고 있다.
이 내용으로 보면 조헌의 예언능력은 토정 이지함 선생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천문학에 전문가이고, 일본의 토요테미 히데요시가 군사를 끌고 조선을 침공할 것이므로 피난준비와 조헌 본인의 운명을 예언하고 있다. 이 예언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조헌은 자신이 예언한 대로 의병들과 함께 전사했다.
그러면 조헌의 예언의 능력과 토정 이지함과는 어떤 인연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토정 이지함은 그는 누구인가?
토정 이지함은 조헌의 스승
▲ 토정 이지함
조헌과 이지함은 어떤 관계인가? 우선 ‘토정 이지함’하면 우리에게 낯익은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존재다. 이제는 그러한 풍속도 거의 사라져 버리고 없지만, 매년 해가 바뀌어 새해 정초가 되면 사람들마다 ‘올해 신수가 어떤가를, 즉 토정비결(土亭秘訣)을 본다. 사람마다 자기 나이와 생일을 어떻게 보태고 빼고 하면서 숫자를 내고, 그 숫자에 맞추어 토정비결 책에 나온 운수풀이 수효를 읽는 것인데 이 운수풀이가 수백 년 동안 이 땅에서는 가장 많이 읽힌 책이다. 바로 이 토정비결을 쓴 사람이 이지함인 것으로 알려져 내려왔다. 더욱이 토정 이지함은 김포와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는 인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토정 이지함 선생은 조강포 나루터에서 조수간만의 때를 측정하여 ‘조강물참’이라는 일화를 남겼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이지함 선생은 조수간만의 차이를 찾으며 강화와 유도 및 강령포구를 거쳐 조강포로 오면서, 조강포 뒷산에 있는 큰 우물 둥치에 움막을 짓고 생활하면서 달뜨는 시간과 좀생이별을 보고 밀물과 썰물의 기준을 파악했다는 것이다.
토정 이지함은 1517년(중종12)에 낳아 1578년(선조11)에 사망한 예언가로 천문(天門), 지리(地理)로부터 음양(陰陽), 술서(術書)에 이르기까지 모두 도통한 한학자요, 기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의학의 태두이다시피 소문난 명의이기도 했으며 점을 치는 데도 귀신이요, 또 수학에도 남이 따를 수 없는 비상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다.
더욱이 이지함은 농업중심의 사회에서 상업이나 수공업 해양자원의 적극적인 개발, 국제무역까지 주장한 그의 혁신적인 사회경제 사상은 조선 후기 북학사상의 원류가 된다는 것이 최근 연구결과로 밝혀지고 있다. 또한 16세기를 대표하는 학자 이이, 조식, 성혼, 서경덕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특히 이지함은 서경덕의 문인으로 분류할 수 있는 학자로서 학문의 다양성과 개방성을 추구한 대표적인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서경덕에게서 상수학과 <주역>을 배웠다.
중봉 조헌과 토정 이지함과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선조수정실록 선조25년(1592) 8월 1일자 기사를 통해서 확인된다.
“<중략> 그 뒤 성혼과 이이가 무함을 당하게 되었으나 조헌은 더욱 정철과 가깝게 지내고 이발 등과는 엄격히 교제를 끊었다. 이 때문에 당인(黨人)들이 원수처럼 여기게 되었으며, 서로 알고 아끼는 사람들까지도 그의 언론이 과격하고 처신이 고벽(孤僻)한 것을 보고는 사정에 오활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지함(李之菡)만은 언제나 칭송하기를 ‘지금 세상에 초야(草野)에서 인재를 보기가 드문데, 조여식(趙汝式)만은 안빈낙도하며 명예와 이익을 털어버리고서 지극한 정성으로 임금을 사랑하며 나라를 걱정하고 있으니, 옛날 사람 중에서 찾는다 해도 실제로 그와 짝할 만한 이가 드물다. 이 사람을 빼놓고는 나는 다른 사람은 모른다’ 하였는데, 남들이 더러 그가 평론을 잘못했다고 의심하자, 이지함이 말하기를 ‘뒷날 응당 알게 될 것이니 내 말만 기억하라.’ 하였다”
이 내용은 조헌이 동인과 서인의 분립 과정에서 과격한 언론으로 말미암아 정치적인 어려움을 겪자 토정 이지함이 조헌의 인물됨을 피력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조헌과 이지함 사이가 특별한 사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토정 이지함은 후에 조헌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말하고 있다.
조헌은 1570~71년 무렵 파주ㆍ홍부목의 교수직으로 관직 생활을 하면서 이들과 사제관계를 맺었다. 1571년 홍부목에 있을 때 그는 토정 이지함의 학식이 대단함을 알고 찾아가 사제의 인연을 맺고 가르침을 청했다. 이때 이지함은 스승으로서는 이이, 성혼, 송익필, 학우로서는 그의 조카인 이산보와 서기를 추천했다고 한다.
특히 우계 성혼은 조헌이 27세(1570)에 파주목 교수가 된 후 직접 우계를 찾아가 학문을 청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헌은 스승인 우계 성혼에게 우주만물은 물론 길흉화복까지도 꿰뚫을 수 있다는 역경(易經)을 가르쳐 줄 것을 청하자 성혼이 수락하여 가르쳤다.
조헌은 율곡과 우계 성혼에게서 <주역>을 배운 뒤 미래의 일을 점치는 것이 능통하였으며, 천문과 지리에도 밝아 실제로 인사에 활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1589년 11월4일 유배에서 풀려난 뒤 올린 <청절왜사제삼봉사>에서 조헌은 천문을 관측하여 병란의 조짐이 있음을 살피고 왜란의 침입을 경계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조헌, 27세 차 스승 이지함과 돈독한 우정
조헌은 이지함을 가장 존경하는 스승으로 받들었다. 선수19년(1586) 10월 1일자 기사에서 조헌은 붕당의 시비와 학정의 폐단을 논한 상소문에서 스승 이지함에 대해 얼마나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었던가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중략> 이지함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깨우치는데 더욱 힘을 기울였다. 이산보(李山甫)(이지함의 조카)의 효우충신(孝友忠信)과 박춘무의 염정자수(焰靜自守)가 모두 이지함에게서 근원하였으며, 심지어 서기 같은 사람은 천민 출신으로 가난하여 학문에 전념하지 못하자 재물을 아끼지 않고 도와주어 성취시켰다’라고 하여 제자들을 기르는 데 힘을 기울인 이지함의 열정을 소개하고 국가적으로 치제해야 할 인물임을 역설한다.
상소문에서 조헌은 이지함의 뛰어난 행실을 칭송하고, 이지함이 조식과 정신적인 교제를 돈독히 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결론적으로 이지함이 문무의 재능을 겸비한 인재를 길러 국가의 쓰임에 대비하고, 밝은 시대에 벼슬길에 나아가 소임을 다했기 때문에 국가에서 관작을 추증하고 제사를 지내줌이 마땅하다고 건의한다. 이처럼 조헌은 이지함을 평생의 스승으로 삼은 골수 ‘이지함맨’이었다.
조헌은 이지함에 대해 ‘선생의 동정과 언행은 모두 처세의 교훈을 암시해주었다’고 격찬하였으며, 이지함 역시 조헌의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당시 이지함은 조헌에 대해 ‘세상 사정에 어둡고 능력이 없다’는 평판이 나돌자 이에 대해 반발했고, 조헌이 늘 자기 분수를 지키면서 왕을 아끼며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는 우국충정을 높이 평가했다. 이지함은 또한 ‘다만 여식(조헌의 자)이 나를 스승으로 하는 것을 알뿐 여식이 진정 내 스승인 물은 모른다’라고 하여 27세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자신이 조헌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는 점을 암시했다. 둘은 비록 세대는 달랐지만, 학문과 사상, 현실 인식의 측면에서 그야말로 동지관계였던 것이다.
조헌의 예언가 계보
<동패락송>과 같은 야사에도 조헌이 이지함과 함께 자주 등장한다. 토정 이지함의 스승은 이사연(李思淵)이다. 이사연의 호는 운홍(雲鴻)으로 조선시대의 대표적 도가서인 <청학집(靑鶴集)>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청학집>은 조여적(趙汝籍)이 1588년(선조21) 과거에 낙방하고 실의에 빠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사연을 만나 그 문하에 들어가 60여 년간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견문한 선가(仙家)들의 행적을 집성한 도가서이다. 이 책에서는 이사연의 스승을 청학산인(靑鶴山人) 위한조(魏漢祚)라 하였고, 이지함은 위한조의 제자로 계보화 해두었다.
이사연의 4대손인 이의백(李宜白)은 저서 <오계집(梧溪集)>에서 조헌이 미래의 일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운홍(이사연)에게서 전수받은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하면 이지함과 조헌은 <청학집>에 나타난 도가의 계보를 매개로도 연결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예언가로서의 면모가 알려져 있지 않았다. 또한 누구도 조헌의 예언가로서의 진면목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조헌이 토정 이지함과 스승과 제자 관계였다는 것과 두 사람 모두 도가사상의 뿌리인 이사연의 제자라는 사실이 조헌을 재평가해야 하는 근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학자와 문인, 그리고 나라를 위해 싸운 의병장의 모습으로 고정화된 조헌에 대해 ‘예언가'로서 새로운 가치평가를 시도해야하지 않을까?
중봉 조헌은 예언가로서 조선의 미래를 바라보았고, 그리고 자신의 죽음도 보았기에 그 운명을 받아들인 것이다.
★청음집[淸陰集] 조선 인조 때의 문신·학자 김상헌(金尙憲)의 시문집. 목판본. 40권 14책. 1861년(철종 12) 간행. 권1∼8은 시(詩) ·가곡(歌曲), 권9는 조천록(朝天錄), 권10은 청평록(淸平錄), 권11∼13은 설고집(雪集), 권14는 표전(表箋) ·교서(敎書) ·상량문 ·책문(策文), 권15는 애사(哀辭) ·제문 ·명(銘) ·찬(贊) ·송(訟), 권16은 게첩(揭帖) ·국서(國書), 권17∼22는 소차(疏箚), 권23은 계사(啓辭) ·의(議), 권24∼29는 비명(碑銘), 권30∼33은 묘갈(墓碣), 권34∼35는 묘지(墓誌), 권36은 묘표(墓表), 권37은 행장(行狀), 권38은 기(記) ·서(序), 권39는 제발(題跋) ·잡저, 권40은 서독(書牘)으로 되어 있다. 효종 때 편간(編刊)된 후 여러 판본(版本)이 전해지는 가운데 조천록과 설고집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중에 저자가 편찬한 것으로, 저자의 서(序) ·발(跋)과 이강선(李康先)의 문집 서, 장연등(張延登)의 조천록 서문 등이 실려 있다.
★★기옹만필[畸翁漫筆] 조선 인조 때의 문신으로 정철의 아들인 정홍명(鄭弘溟)의 수필집. 사계 김장생의 제자. 필사본. 1책.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선학(先學)에 대한 평어(評語), 시문(詩文)에 관한 설화, 친지와 고구(故舊)의 일화, 선친 정철(鄭澈)과 스승 김장생(金長生) 및 이들과 친교가 있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 등이 수록되었고, 간혹 중국의 시문과 문헌에 관한 평해(評解)도 들어 있다. 1643년(인조 21)에 편찬되었으며, 《대동야승(大東野乘)》에도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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