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주 천지조화
우주 일년의 시간법칙을 밝힌 소강절 본문
우주 일년의 시간법칙을 밝힌 소강절
5700년 전 태호복희(太昊伏羲)께서 인류문명사 최초로 하늘로부터 하도를 받아내려 팔괘를 그으신 이래, 하늘의 이치를 알고자하는 수많은 이들이 평생을 바쳐 구도의 문을 두드렸지만 진정 통(通)의 경지에 오른 이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하늘의 이치를 주재하시는 증산 상제님께서 그 깨달음의 경지를 인정해주신 한 구도자가 있었으니 바로 소강절(邵康節) 선생이시다.
소강절 선생(1011∼1077)은 북송시대의 대학자로서 휘는 옹(雍), 자는 요부(堯夫)요, 강절(康節)은 송나라 철종이 1086년 선생께 내린 호다. 소강절 선생은 북송오자(北宋五子)의 한 사람으로 그 학문의 업적은 후세에 크게 영향을 미쳐 주자(주희朱熹 : 1130∼1200, 성리학을 집대성)나 화담 서경덕(徐敬德 : 1489∼1546, 이지함 선생의 스승) 등 수많은 학자들이 그의 사상을 이어받는다.
저서로는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 『어초문답』 등이 있는데 『황극경세서』 중 관물내편(觀物內篇)과 관물외편(觀物外篇)은 철학에 관한 중요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세상 이치를 깨우치다
소강절 선생이 태어난 1011년은 송나라 3대 황제인 진종(眞宗)이 제위하고 있던 기간으로 진종은 도교를 신봉하고 산업과 학문을 장려하였다. 중국 범양지방에 살았던 선생의 선조들은 대대로 학식이 뛰어났으며, 소강절 선생의 부친인 소고(邵古) 또한 평생 글을 읽고 시를 지었던 유학자였다.
소강절 선생의 집안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는데 12세 때 부친을 따라 중국 공성(共城)지방으로 간 후 그곳에서 본격적인 학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소강절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대단한 독서광이었다. 청소년 시절에는 주로 유학서적을 탐독하였는데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학문을 하는데 일부러 고생스러운 길을 택하여 삼복더위에도 부채를 쓰지 않았고, 추운 겨울에도 화로를 쓰지 않았다. 한번 책상에 앉으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책에만 열중하여 밤을 지세우기를 며칠이고 하였다.
청소년기에 이미 유학 서적들을 두루 탐독하여 요순우탕(堯舜禹蕩)의 치세 심법을 배우고 수천년 문명사에 깊이 통했다. 특히 주역을 열렬히 신봉하였는데 ‘역을 배우는 것은 천하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치세에 역의 원리를 적용하여 유학사상을 연구하기도 했다.
청소년 시절, 선생은 공성(共城)의 영주였던 이지재(李之才, 자 挺之, ?∼1045)를 만나게 된다. 당시 소강절 선생은 밭에서 일을 하며 힘겹게 책을 읽고 있었는데 이지재가 소옹이 학문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시험 삼아 그의 오두막집에 찾아가 물었다.
“선생은 유학 외에 물리학(物理學, 사물의 이치를 밝히는 학문)과 성명학(性命學, 인간 본성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선생이 대답하기를 “가르침을 받으면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소강절 선생은 이지재를 스승으로 모시고 《하도》, 《낙서》와 복희(伏羲)씨의 8괘 64괘의 그림을 전수받았다. 그런데 이지재가 전수한 것은 기본적인 내용일 뿐 심오한 깨달음을 준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이지재는 그 얼마 뒤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소강절 선생은 꾸준히 공부를 계속하여 천지이치와 합일된 정신으로 현묘한 깨달음을 얻어 넓고도 광대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선생은 천지의 운행과 음양의 변화, 과거와 현재의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 풀과 나무의 특성에 이르기까지 환하게 들여다보는 눈을 가지게 된다. 대부분은 선생 자신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니 그 정성과 선생의 재능이란 가히 쉽게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의 법칙을 밝히다
소강절 선생의 이러한 연구는 선생이 낙양(洛陽)으로 이사한 40세 이후에 그 열매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선생은 《역경(易經)》이 지금의 형태로 만들어지기 전에 복희씨가 만든 원초적인 역(易)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것을 뒷날의 후천역(後天易)과 구별하기 위해 선천역(先天易)이라 하고 몇 가지 그림으로 복원했는데, 주역 설괘전을 바탕으로 건남곤북(乾南坤北)과 리동감서(離東坎西)의 괘상을 복원한 것이 선천도(先天圖) 혹은 복희팔괘도(伏羲八卦圖)다. 선생은 이 선천도를 바탕으로 유불선의 사상을 포용하고 상수철학의 정신을 엮어 ‘선천학(先天學)’이란 학문을 처음 제창하였다.
훗날 이 학문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에게 전해진다. 오늘날 우리가 배우고 있는 복희팔괘도가 선천도로서 바로 소강절 선생께서 처음으로 복원한 그림이다. (일부 대성사께서 정역팔괘를 내려받으신 후 문왕팔괘를 선천팔괘, 정역팔괘를 후천팔괘라고 하지만 소강절 선생 당시에는 복희팔괘를 선천팔괘, 문왕팔괘를 후천팔괘라 하였다.)
무엇보다 소강절 선생의 가장 불후의 역작은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다. 선생이 황극경세서를 완성한 것은 60세가 넘어서지만 황극경세서는 선생의 인생 전체를 통한 깨달음이 모두 녹아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황극경세(皇極經世)’라는 말은 임금(皇極)이 세상을 경영한다는 뜻이다.
무극(無極)의 위치에 계신 상제님께서 자연섭리대로 우주를 다스리시듯, 상제님으로부터 천명을 받고 세상을 통치하는 황극(皇極)의 역할 또한 자연섭리를 온전히 인간 세상 위에 실현시키는 것이다. 소강절 선생은 이 책에서 세상을 경영함이 하늘의 이치에 부합해야 하고, 결국 그 이치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인간의 역사가 전개됨을 밝혀 놓았다.
《황극경세서》는 총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극경세서의 내용에 대해 후세 학인들의 평과 주석이 담긴 〈찬도지요(纂圖之要)〉와 황극경세서의 본론이라 할 수 있는 〈관물내편(觀物內篇)〉, 소강절 선생이 여러 학인들과 나눈 담론을 엮은 〈관물외편(觀物外篇)〉이다.
12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관물내편에는 소강절 선생의 심오한 깨달음이 녹아 있어 그 경지를 이해하는 학자는 많지 않다. 선생께서는 태극에서 음양, 사상, 팔괘가 갈라져 나오는 이치를 바탕으로 주역의 괘상을 상수학적으로 풀어 원회운세(元會運世)의 시간법칙을 발견해 내었는데 이는 인류역사상 누구도 해내지 못한 소강절 선생의 학문의 백미이며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원회운세의 시간표에 따르면 요임금 때에 이르러 오회(午會)에 들어서게 되고 지금 시대는 미회(未會) 운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또한 선생은 시간법칙뿐 아니라 역사가 흘러가는 것도 자연섭리와 합치됨을 밝혀놓았다. 즉 역사는 황·제·왕·패(皇帝王覇)로 전개되는데, 황(皇)이란 도로써 세상을 다스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듯 하지만 백성들은 스스로 화합하고 잘살게 되는 이상적인 군주를 말하고, 제(帝)란 진실된 덕으로 세상을 다스려 백성을 위하고 세상을 위하는 봉사정신을 가진 군주를 말한다.
왕(王)은 의(義)를 숭상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군주를 말하며, 패(覇)는 힘으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군주를 말한다. 역사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황의 시대에서 제의 시대로, 제의 시대에서 왕의 시대, 왕의 시대에서 패의 시대로 전개됨을 이치를 통해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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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상으로 다가올 일을 예견하다
선생은 세상 이치에 통달하여 앞을 훤히 내다보는 능력이 뛰어나 많은 일화가 전해지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어느 추운 겨울 오후, 용변을 보기 위해 선생이 마루턱을 내려오는 순간, 앞뜰 매화나무에 앉은 겨울새 두 마리를 보았다. 다복다복 눈이 쌓여 눈가지를 이룬 매화나무에 새 두 마리가 앉아 있으니 화조도(花鳥圖)에서나 보던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이는 정녕 보통 일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하며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새들이 싸움을 했다.
한 마리가 입으로 다른 새의 날개를 쪼며 소리를 질러댔고, 다른 한 마리도 지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하여 대항했다. 그러자 나뭇가지에 소복하게 쌓여 있던 하얀 눈이 아래로 우수수 떨어져 새는 기진맥진한 채 죽음직전의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그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괘(卦)를 풀어보았다.
괘를 만들어(作卦) 본 결과 택화혁(,澤火革: 64괘 중에 하나)이란 본괘(本掛)와, 택산함(, 澤山咸)이란 변괘(變卦), 그리고 천풍구(,天風펮)라는 호괘(互卦)가 나왔다. 소강절 선생이 작괘를 마친 후, 새가 싸우다 떨어진 연유의 괘의(掛意: 괘가 지니고 있는 뜻)에 대해 내일 저녁에 한 여자가 아름다운 꽃을 몰래 꺾다가 정원을 관리하는 하인에게 발각되어 정신없이 도망가다 땅바닥에 넘어져 마침내 다리를 다칠 것으로 판단하였다.
다음날, 저녁이 되자 선생이 판단했던 대로 여자가 꽃을 꺾다 정원을 관리하는 하인에게 들켜 도망치다 넘어져 다리를 다치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제자 한 명이 선생에게 그 까닭을 묻자 선생께서는 “우선 택(澤)은 젊은 여자, 화(火)는 불(澤火革에서), 천풍구(天風펮)에서의 천(天)은 쇠붙이고 풍(風)은 다리와 나뭇가지며 택산함(澤山咸)에서의 산(山)은 흙이라는 각 괘가 지니고 있는 상징물이니, 젊은 여인을 말하는 택금(澤金)이 나뭇가지인 풍목(風木: 천풍구에서 나온 괘)을 금극목(金克木)하므로, 이를 종합해보면 젊은 여자가 나뭇가지 즉, 꽃을 꺾게 된 연유이고 땅에 넘어져 다리를 다쳤다 함은 풍목(風木)이 다리가 되는 것으로 택금(澤金)으로부터 금극목(金克木)하므로 다리를 다치게 된 원인이 되느니라.”
그러나 제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선생님 말씀대로 각괘(各卦)가 지니고 있는 대상물의 상징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한 마디로 내일 저녁에 젊은 여자가 꽃을 꺾다가 넘어져 다리를 다칠 것이라고 단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선생은 웃음을 띄우며, “봄여름 없이 가을에 오곡백과를 거둘 수 없듯이 갈고 닦지 않고 어찌 명 판단이 있겠느냐? 처음 괘(卦)를 가까이 하는 사람은 기초 공부에 신경을 써야 하는데도 신기(神奇)한 것만 먼저 논하게 되니 이는 참으로 잘못 된 처사였느니라. 그리하다보면 갈수록 더 어려운 것만 같고 예리한 판단을 할 수가 없게 되나, 반대로 조석으로 갈고 닦으며 정성을 다하게 되면 ‘심역현기(心易玄機)’의 경지에 이르러 나와 같은 판단도 가능하게 될 것이니라.”고 했다.
그러자 제자가 다시 심역현기에 관해서 물었다. “심역현기란 학문적이고 체계적인 논리에 의해서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마음이 순하지 못하고 불결하면 자신이 원하는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도깨비에 홀리는 사람처럼 방향마저 잃어 깊은 산골짜기에서 헤매는 것과 같으니라. 그러나 마음이 순하고 청결하며 학문에 게으르지 않으면 스스로 깨달은 바가 많아져 자연 심역현기하게 되느니라.” “심역현기는 사방에 있는 물을 한 곳으로 모아 큰 바다를 이루는 것과 같은 것으로, 택화혁괘(澤火革掛)를 보고 여자가 꽃을 꺾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도 학문적으로 그 내용을 풀어보면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을 것이니라. 그리고 짧은 시간에 보다 정확한 판단을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심역현기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느니라.”
심역현기의 소강절
남송의 주자(朱子) 선생은 주렴계,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과 함께 소강절 선생을 도학(道學)의 중심인물로 삼았다. 선생은 나라로부터 관직에 나오라는 숱한 제의도 마다하고 낙양에 거주하면서 부필(富弼), 사마광(司馬光), 여공저(呂公著), 구법당 등과 교류하며 한평생 진실된 학자로서 소박한 삶을 살았다. 자신의 거처를 안락한 집[安樂窩]이라 하고 스스로 ‘안락(安樂)’선생이라 호를 지어 불렀던 선생의 삶은 항상 책과 사색, 시와 함께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한 요즘 세상에서 순리(順理)를 따라 평생을 일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지식은 사욕으로도 채워지지만, 깨달음은 사욕이 채워진 마음에는 절대로 응하지 않는다. 지식이 아닌 깨달음, 선생은 심역현기(心易玄機)를 통해 올바른 구도의 길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참고자료>
『화담 서경덕』, 이종호, 일지사
『황극경세서』, 소강절 저 노영균 역, 대원출판
『邵雍評傳』, 唐明邦, 南京大學出版社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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