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주 천지조화

환단고기 위서론? 술이부작(述而不作)과 궐의(闕疑) 문화에 대한 무지가 빚은 참극. 본문

역사 이야기/잊혀진 역사

환단고기 위서론? 술이부작(述而不作)과 궐의(闕疑) 문화에 대한 무지가 빚은 참극.

세덕 2013. 8. 13. 12:31

 

환단고기 위서론? 술이부작(述而不作)과 궐의(闕疑) 문화에 대한 무지가 빚은 참극.

환단고기 위서론? 술이부작(述而不作)과 궐의(闕疑) 문화에 대한 무지가 빚은 참극.

 

 

“환단고기”를 처음 읽었을 때 느낌은 장바구니 담겨 있는 씻지도 않은 음식 재료들을 날것으로 씹는 듯한 raw 한 느낌 이었다. “규원사화”는 감상문의 느낌이었다면 “환단고기” 완성된 역사책이라기 보다는 훗날 역사책을 적기 위한 첫 작업으로 원문자료를 모아 둔 “역사 원문 data base 자료집”의 느낌이었다.

 

환단고기에는 어떻게 역사원문 data base가 이렇게 방대하게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1. <성리학의 나라 조선>

기분 내키는 대로 목을 댕강 대강 짜르고 마음 내키는 대로 문서 조작하는 일본 사무라이 “위서론” 문화와 달리 유교의 한자 문화권은 상당히 보수적이다. 특히 조선왕조가 숭상한 주자의 성리학 문화권은 그리 호락 호락하지 않았다.

 

1) 一字千金 (일자천금) 의 저술정신

전국시대 진나라의 재상이자 진시황의 진짜 아버지였다는 가설로 유명한 “여불위”. 그가 지은 “여씨춘추”를 편찬한 뒤에 한 이야기가 일자천금(一字千金)이다. “이 책에서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사람에게 글자 한자 당 천금을 주겠다.”는 이야기. 경전의 원문을 적을 때 쓰는 한자 단어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값어치가 천금에 해당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만큼 하나의 책을 낼 때에는 학자들이 심사숙고 해서 한단어 한단어를 선택하여 완벽한 완성도를 가지고 글을 쓴다는 뜻이다. 쓸때 없는 단어가 한단어도 들어가 있지 않을 정도의 완벽함. 또한 문법과 문체, 그리고 어구 대비에 엄청나난 공력을 들이는 강박관념의 텍스트가 한자 고전이다.

자유로운 영어 원문을 읽던 사람이 한자 경전을 보면 가슴이 깝깝하고 답답한 느낌을 받는 이유가 이것 때문인 거 같다.

 

 

2) 述而不作 (술이부작)의 문화

공자 이래로 전통 문헌을 다루는 태도는 “고전에 대한 풀이는 하되 창작은 하지 않는다.” 는 술이부작이다. 단지 그 텍스트에 대하여 전해 내려 오는 선인들의 학설이나 이론을 기술할 뿐 자기의 생각을 가미하여 창작하지 않다는 뜻. 텍스트에 절대 손을 대지 않는 다는 뜻이다.

 

 

3) 闕疑 (궐의) 정신

궐의는 해석자는 해석이 의심스러운 곳에서 자의적으로 주관을 개입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멈추어 “잘 모른다.”라는 겸손의 표현과 비워두는 절제력을 통해 “텍스트” 자체에 대한 존중을 드러내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모르는데 아는 척” 하지 않는 다는 뜻이다.

 

4) 註釋 (주석)의 문화

세월이 흘러가고 새로운 세상에 맞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 하게 되었다. vs 그런데 원문 텍스트는 불변의 법칙이다. 이 모순점을 해결 한 것이 송나라 때 나온 성리학의 주석 문화이다.

쉽게 이야기 하면 주석은 인터넷 “원문”에 다는 댓글 놀이 같은 것이다. 후대 사람들이 원문을 읽고 느낀 생각과 해설을 적는 것을 말한다. 자신들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고전의 원문을 인용하고 그에 대한 주석을 통해서 말하고 소통하는 것이다.

 

5) 원문과 주석의 경계

한자 문화권은 따옴표나 쉼표가 없이 한자가 줄줄이 사탕처럼 이어져 있는 문장이다. 그러다 보면 경전을 읽을 때 어디가 원문이고 어디가 주석인지 구분이 안 갈 수 있다. 물론 한자의 고수들은 글자의 문체와 문법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구분을 할 수 있지만 처음 한자 공부 하면서 이기 작업을 하는 후학들의 경우에는 원문과 주석을 구분 하지 못한다. (후대 사람들이 환단고기 읽을 때 발생하는 문제도 이것이다.)

그래서 주석을 달 때에는 텍스트의 절대성을 존중하면서 겸손하게 자신의 생각을 적는 다는 것을 밝히는 단어를 써준다. 주자는 愚謂(우위)라는 단어를 썻고 태백일사 이기작업을 한 일십당 이맥 선생은 竊想(절상) 이라는 단어를 썼다.

 

6) 원문 글자 숫자 소개

중국에서 출간된 책들의 서문에 보면 책 원문에 나오는 한자 글자 수를 꼭 적어 놓는 문화가 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소중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또한 한 글자도 더 보탤 수 없게 만드는 장치라 한다. 그러한 문화는 현대 중국에서 나오는 책 문헌에 까지도 남아있다.

 

<텍스트 원본 불변의 법칙>

경전 텍스트 원본의 절대성 이것이 유교의 근본정신인 것이다. 요즘말로 애초에 유교 글쟁이 보수 꼴통들에게는 “위서론”은 통용되지도, 용납 할 수도 없는 문화이다.

 

<원치 않는 사상의 경전 제거 : 분서갱유와 사문란적>

경전의 원문의 절대성을 인정한 문화. 그렇기 때문에 원치 않는 사상을 통제 할 때에

1) 진시황은 원문 조작 보다는 책을 다 불 태워 버리는 분서갱유

2) 조선왕조는 고려 정통성을 뒷받침 하는 역사책을 읽지 못하게 통제 하기 위해 책 소유하는 것 만으로 참수 하는 사문란적 제도를 도입했다.

 

 

 

PS. 사진 설명

좌측 상 : 공자

좌측 하 : 주자

우측 상 좌 : 해학 이기 (환단고기 감수)

우측.상 좌 : 운초 계연수 (환단고기 편찬)

우측 하 : 한암당 이유립 (환단고기 대중화)

 

2. <조선왕조가 숭상한 주자의 성리학>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는 전통 경전을 “텍스트”로 충실하게 대우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중심으로 재정립하였다.

 

<강박관념의 극치>

1) 중용의 “덕성”을 강조한 “정명도” 학파에 비해

2) “문학”을 강조한 “정이천” 학파는 특히나 예법을 강조하였다. 그의 수제자 격인 “주자 스타일”은 예법의 틀에 대한 강박관념의 극치를 달리는 obscessive compulsive한 문화다.

 

<원문 불변에 대한 집착>

조선의 성리학은 주자가 집주를 한 원문 텍스트에 나와 있는 사상을 현실에 까지 그대로 적용 시키려 하는 숨막히는 강박관념을 뜻한다. 융통성 없이 사회에 유교 사상을 적용 하기 위해서는 원문 불변의 법칙이 필수적이었다.

 

<토 달지 말라>

경전 원문에 대한 집착은 텍스트 중시로만 끝나지 않았다. 오죽하면 “토 달지 말라.” 는 말까지 있을까. “동사+목적어”의 한자 문법과 달리 우리나라 언어 문법은 “목적도+동사” 의 우랄-알타이 언어 순을 따르기 때문에 한자를 읽을 때는 토를 달아야 쉽게 읽을 수 있다.

문제는 “토”를 어떻게 다느냐에 따라서 문장의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는데 있다. 그래서 “이황”이나 송자라 불리던 “송시열” 정도 수준의 한문의 대가들 만이 토를 달았다.

초립동이가 처음 “천자문”과 “소학” 경전을 읽는 다는 것은 한자 원문뿐만 아니라 그 토씨 까지 그대로 외우는 것을 의미한다. 성리학의 조선에서는 토씨 하나도 잘못 외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던 보수적인 사회였다.

 

<융통성 없는 강박관념의 성리학 나라 조선>

애초에 성리학 조선왕조에서 “위서”가 허용 되는 문화였으면 반상과 적서의 차별도 없었을 것이고 남존여비도 없었을 것이다. 성리학의 유교는 “위서”를 허용할 만큼의 “융통성” 조차 없었던 문화였다.

 

 

3. <성리학 조선왕조 실록 담당 찬수관 일십당 이맥의 정신>

이제 조선 중종 시기에 ‘조선왕조실록’을 적기 위해 수많은 고대 문헌 data base 이기 작업을 하시던 “이맥” 선생을 보자. 얼마나 꼬장 꼬장하고 깐간했을 지를. 성리학자의 경전의 한자 한글자 한글자에 대한 집착은 21세기 현대에서는 찾기 힘들 정도의 울트라-초강력-강박관념인 것이다.

이러한 고지식한 성리학자의 전통이 배어 있었기에 경전 text의 절대성에 입각하여 자료를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환단고기를 편찬한 계연수 선생도 이맥 선생의 성리학자로서의 전통 방식을 그대로 계승하여 5권의 역사 원문을 합편하여 출간한 것이다.

 

<결론 >

환단고기는 완성된 “요리”가 아니고 요리 하기 위해 사다 놓은 “장 바구니” 인 것이다. 환단고기에 실린 5권의 역사책의 사상과 문체와 관점이 제각각인 이유이다.

 

이 재료들을 가지고 21세기 대한민국의 정신적 허기를 채워주는 “정체성 규명의 역사서”로 요리를 하는 것은 우리들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