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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집권기부터 이어진 암투와 피의 역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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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집권기부터 이어진 암투와 피의 역사

세덕 2013. 12. 10. 17:22

 김일성 집권기부터 이어진 암투와 피의 역사
김일성 집권기부터 이어진 암투와 피의 역사

김성애·김영주 숙청 뒤 김정일 후계 구도 완성 선례도

숙청(肅淸) 【명사】

1. 어지러운 상태를 바로잡음.

2. 정치단체나 비밀결사의 내부 또는 독재국가 등에서 정책이나 조직의 일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반대파를 처단하거나 제거함.

줄기가 곧게 뻗으려면 곁가지를 지속적으로 쳐내야 한다. 북한이 수령 1인 지도 체제를 유지·계승하기 위해 끊임없이 숙청을 거듭해야 하는 이치다. 북한이 중국·소련 같은 집단지도 체제로 전환하지 않는 한,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 또한 걷게 될 길이기도 하다. 언제인지는 몰라도, 언젠가는 고모부 장성택 당 행정부장의 부담을 떨쳐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김일성 주석(이하 호칭 생략)은 한국전쟁 때 '연안파'의 무정을 숙청한 것을 비롯해, 남로당계와 소련파, 연안파 등을 꾸준히 제거했다. 그의 집권 과정은 경쟁 세력을 하나씩 제거해가는 과정이었고, 그 결과 1946년 2월부터 1994년 7월까지 48년 장기 집권의 안정적인 토대를 얻었다.

국내 기반 취약했던 김일성

김일성은 만주와 조선 북부 국경지방에서 유격대를 이끌며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소련의 붉은 군대 88여단 내 조선인들의 구심적 구실을 했다는 화려한 이력을 갖고 있었다. 그 덕에 전국적 명성을 얻었고, 그와 함께한 '빨치산파'는 집권 가능성이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해방 직후 북한엔 빨치산파 이외에도 주목할 만한 세력이 다수 공존했다. 우선, 일제 때 국내, 특히 함경남도 지역에서 항일 공산주의 운동을 벌여온 오기섭·주영하 등 이른바 '국내파'가 있었다. 국내파는 서울의 박헌영 주도 조선공산당을 지지했다. 중국에서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만들어 항일투쟁을 했던 무정·김두봉 등 '연안파'도 있었다. 소련군의 통역이나 행정요원으로 함께 북한에 들어온 소련계 한인들('소련파')도 있었고, 조만식처럼 일제에 협력을 거부한 우익 민족주의자 세력도 있었다.

여기에 한반도 공산주의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자랑하던 박헌영도 있었다. 애초 소련 외무성과 정보기관은 김일성이 아닌 박헌영을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추천하고 지원했을 정도다. 다만 박헌영은 소련군이 진주한 북쪽이 아니라 남쪽의 서울을 고수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1946년 9월 미군정이 박헌영 체포령을 내리면서 남로당 지도자들은 속속 북한으로 탈출했다. 북한의 복잡한 권력 지형도에 남로당계가 보태졌다.

이들 가운데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조만식 등 온건 민족주의 세력이었다. 소련은 당초 대미 관계를 고려해 김일성이 실질적 권력을 행사한다 해도 정권의 최고책임자로는 조만식을 추대할 구상이었다. 그러나 조만식은 1946년 1월 신탁통치를 반대하면서 스스로 탈락했다. 지주·자본가들이 남쪽으로 도피한 탓에 우익은 이미 기반이 없었다. 결국 민족주의 세력은 자연 소멸해버렸다.

국내파는 박헌영이 중심인 서울 당중앙의 권위를 강조하면서, 김일성이 추진한 북조선분국 설치에 반대했다는 '원죄'가 있었다. 김일성의 경쟁 세력이 차례로 제거될 때 적용된 '종파분자' 혐의를 가장 먼저 받은 것이 바로 국내파였다. 1948년 3월 노동당 제2차 대회에서 오기섭은 '종파 활동'에 대한 비판 속에 잘못을 시인하고 자아비판을 하는 수모를 겪었다.

숙청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한층 살벌해진다.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1950년 12월 당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연안파 무정, 소련파 김열 등 주요 인사들이 지위에서 해임됐다. 전쟁 수행 과정에서의 '오류'가 이유였다. 소련파 허가이도 1951년 11월 당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비판을 받고 당 조직부장에서 제명됐다. 당원 관리 문제에서 나타난 정책적 과오 탓이었다. 허가이는 1953년 숨진 채 발견됐다. 발표된 사인은 자살이었지만 암살 의혹이 일었다. 주요 정적들의 제거를 통해 김일성의 권력은 강화됐다.

8월 종파 사건과 연안·소련파의 몰락

1953년 초 남로당계 12명이 미국 스파이 활동, 정부 전복 기도 등의 혐의로 체포돼 그중 10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박헌영 등 남로당 핵심 간부들도 같은 혐의로 1955년 12월 사형을 선고받았다.

1956년 8월에는 연안파와 소련파가 김일성 개인 숭배 문제와 경제발전 노선과 관련해 김일성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 무렵 스탈린 사후 소련에서 진행된 '스탈린 격하 운동'의 영향이었다. 실패였다. 김일성은 이미 공고했다. 이들은 당에서 제명당하고 모든 직위에서 해임됐다. '8월 종파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 이후, 국내파·연안파·소련파 간부들은 1960년까지 대부분 숙청됐다. 일부 소련파는 소련으로 돌아갔다. 형장에서 살해된 사람이 몇백 명에 이르고, 감옥에 갇힌 이가 1천여 명이었다는 증언도 있다.

김일성은 이 무렵 소련과 동구권에서 일부 진행됐던 전임자 비판과 정책 변화를 지켜보면서 권력 승계에 대한 고민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들 김정일의 권력 의지는 상승작용을 불러왔다. 김정일은 대학생이던 1960년대에, 아버지 김일성을 따라 전방부대 시찰 등에 동행하면서 정치 감각을 익혔다. 1964년 대학 졸업 뒤 비서처에서 당 사업을 시작했다. 1967년 5월 당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김정일은 빨치산파 내에서 다소 이질적이던 갑산파의 숙청을 주도했다. 가장 큰 죄목은 '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에 대한 반대'였다. 1인 지배 체제에 소극적이었다는 얘기다. 이후 김정일은 김일성 신격화를 이끌며 실권자로 떠올랐다. 1969년엔 빨치산파 내 군벌주의자들도 제거됐다.

1970년 초 김정일은 김일성의 둘째 부인 김성애와도 상당한 갈등을 빚었다. 김성애는 김정일과 비슷한 시기 정국의 주요 인물로 떠올랐다. 김일성에 이은 2인자인 양했고,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의 우상화에 반대하며 빨치산 세대에 도전했다. 김정일은 1974년 2월 후계자 지명 뒤 김성애와 그 측근들을 모두 숙청했다. 배다른 동생 김평일은 아무도 가까이 접근하지 않는 '기피 인물'이 됐다.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는 이 시기 중병을 앓고는 김일성의 뜻에 따라 스스로 권력에서 멀어졌다. 1976년 김정일 후계 체제와 관련해 반대의 뜻을 밝힌 김동규(당 비서 겸 국가부주석)를 김일성이 나서 숙청했다. 1970년대 후반이 되자 북한에서 김정일에 반대할 이가 아무도 없었다. 김정일은 1980년 비로소 대외적으로 공식 후계자임을 천명했다.

숙청과 세습, 그 필연의 욕망

문제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혁명과 건국을 주도했던 최고지도자들이 대개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자신의 투쟁을 '신화화'하려 했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1인 지배 체제를 확립하면,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절차마저 자리잡을 틈이 없다. 내란이나 대중봉기 등이 터지지 않는 이상, 숨을 거둘 때까지 권력 승계는 이뤄지지 않는다.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면, 유사시 권력이 분산될 위기에 놓이는 것이 당연히 걱정스럽다. 레닌·호찌민·김일성 정도를 제외하면, 사회주의 최고지도자들은 무덤에 누워서도 하나같이 후계자들의 혹독한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북한에 숙청과 세습의 욕망은 필연이었을 수 있다. 그들 스스로를 부르는 '민주주의공화국'이라는 이름에는 비록 결코 어울리지 않을지라도.

김외현 기자osca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