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주 천지조화
<증산도>제 2변도운의 전개1-안운산 태상종도사님 본문
<증산도>제 2변도운의 전개1-안운산 태상종도사님
<증산도>제 2변도운의 전개1-안운산 태상종도사님
지구촌 통일 황제(천자)를 꿈꾸었던 차경석 성도는 27년의 헛도수(1909~1936년)가 끝나면서 병자(1936)년에 죽고 일제의 민족종교 탄압령으로 증산계 교단은 을유(1945)년까지 대휴게기(10년)를 갖게 된다. 여기에서 제1변 도운시대가 막을 내리고 보천교 등의 제1변 도운시대의 난법신앙을 좀 더 극복한 증산교시대를 열었다. 난법을 일단 마무리 짓고, 그 난법의 정신을 수렴, 승화, 발전시켜 고수부님이 셋째살림의 진법에서 씨를 뿌려놓은 그곳에서 해방 후에 이상호 형제와 더불어 안운산 태상종도사님(총사수)이 주역이 되어 제2변 도운의 새 역사를 개척하셨던 것이다. 이 부분이 많이 왜곡되어 있는데, 이제 제2변 도운이 일어난 도수 정신을 상제님의 성구말씀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하루는 공우를 데리고 용화동(龍華洞)을 지나며 이르시기를 “이곳이 곧 용화도장이라. 이 뒤에 이곳에서 사람이 나서거든 부디 정분을 두고 지내라.” 하시니라. 하루는 용화동 뒤의 계룡봉(鷄龍峯)을 가리키며 말씀하시기를 “이곳이 불무 발판이니 불무는 두 발판을 부지런히 밟아야 바람이 나는 것이라. 그러니 이곳을 자주 밟아야 바람이 나게 되리라.” 하시니라.(도전6:66)
●태모님께서 용화동에 계실 때 천지에서 신도가 크게 내리매 여러 차례 용봉(龍鳳)을 그려 깃대에 매달아 놓으시고 공사를 행하시더니
용화동을 떠나시기 얼마 전에 다시 용봉기(龍鳳旗)를 꽂아 두시고 이상호에게 이르시기를 “일후에 사람이 나면 용봉기를 꽂아 놓고 잘 맞이해야 하느니라.” 하시고 “용봉기를 꼭 꽂아 두라.” 하시며 다짐을 받으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용화동은 동요동(東堯洞)이요, 건곤(乾坤)의 사당(祠堂) 자리이니 미륵이 다시 서니라. 사람들이 많이 오게 되나니 법은 서울로부터 내려오는 것 아니더냐. 앞으로 태전(太田)이 서울이 되느니라.” 하시고
“사람 욕심 내지 마라. 올바른 줄 하나 치켜들면 다 오느니라.” 하시니라(도전11:365)
⇒결국 용화동 교단의 이상호의 역할은 상제님 도운 창업사 과도기 과정(2변 도운)에서 추수도운의 용봉도수의 두 지도자가 출세하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상호와 이정립 형제는 진주도수의 대두목인 용봉(龍鳳)을 속으로 꿈꾸었지만 태모 고수부님께는 종통대권의 상징인 용봉기龍鳳旗를 꽂아놓고 태전을 서울 삼아 출세하는 두 사람을 잘 맞이하라고 천명을 내리시고 계신 것이다. 안운산 태상종도사님은 이상호와 손을 잡고 2변 도운을 중창했으나 신앙의식과 진리의식이 성숙하지 못한 과도기 도운의 한계로 인해 2변 도운을 정리하고 태전에 증산도 본부를 두고 안경전 종도사님과 제3변 진법 추수도운을 열게 된다.
용화동에서는 “바로 여기가 상제님이 말씀하신 정통이요, 앞으로 매듭짓는 곳이 용화도장이다”라고 해왔으나 상제님과 태모님 말씀은 『“용화동은 사룡(死龍)이 되리라.”』(도전6:100)고 하신 것이다. 현재 용화동 교단은 다 망하고 노인들 몇몇이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는 이들도 희망은 “태전의 증산도 뿐이다”라고 하고 있다. 상제님의 말씀은 이곳에서 수부공사(셋째 살림)와 제2변 부흥 시대와 제3변 결실기를 매듭짓는 인물이 나온다는 말씀인 것이다. 즉 제1변 도운의 핵심인 보천교에서 모든 조직경험, 신앙체험, 지도자 차경석 성도의 심법, 그리고 그의 역량, 또한 선천 성도들의 신앙심, 신앙 목적, 도덕과 윤리관을 가장 광범위하게 체험하고 나온 이상호·이정립 형제가 일찍이 보천교 혁신운동에 실패하고 방주인方主印을 회수당한 뒤, 그곳을 탈퇴하여 김형렬 성도의 판(미륵불교)에 들어갔다. 다시 탈퇴하여 무진(道紀58,1928)년 동지절에 동지 치성절을 계기로 따로 판을 연 것이 동화교(東華敎)이다. [이 과정에서 상제님 진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책자《증산천사 공사기》가 병인(1926)년에 발간되어 나왔으며, 도문을 연 4개월 후(1929년 7월)에는 《대순전경》이 간행되어 나왔다.]
이 때(무진년 동지) 이상호 형제는 상제님 성도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는데 아무도 오지 않고, 오직 박공우 성도만 상제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찾아왔다. 이 뒤에 이상호·이정립 형제는 고수부님을 찾아가, “상제님이 세 살림을 말씀하셨는데,이제 용화동으로 가시는 것이 어떻사옵니까?” 하고 수차에 걸쳐 간곡히 말씀드리자 고수부님은 결국 “네 말이 옳다”고 허락하시고 조종골과 동화교 통합교단의 교주로 취임하셨다. 상제님의 회갑절인 이 때 신미(1931년 11월 14일)년에 고수부님은 이제 후세들이 도운의 본궤도로 진입하는, 실질적인 새 시대의 문화적 역량을 가지고 신앙하는 교단시대를 열어 주시기 위해 최초로 상제님의 영정을 김옥현에게 그리게 하셨다(실패작으로 끝남). 그 후 화가 채용신으로 하여금 상제님의 영정을 그리게 하여, 고수부님이 그 영정을 친히 모시고 용화동으로 이사가셨다. 조종골에서 고수부님을 모셔와서 통합교단을 연 이 사건은 고수부님의 세번째 살림을 마련해 준,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여기에서 제1변 도운의 난법을 마무리 짓고, 바로 이 자리(용화동)를 중심으로 추수할 사람이 나올 도운(道運) 역사의 제2단계의 도약대로서 제2변 부흥시대의 기초를 닦아놓아 주신 것이다. 즉 상제님이『 “공우야, 무진(戊辰)년 동짓날에 기두(起頭)하여 묻는 자가 있으리니 의통인패(醫統印牌) 한 벌을 전하라』고 박공우 성도에게 말씀하신 그 자리에 이상호 씨가 교문을 열고, 여기에서 고수부님께서 ‘추수할 사람이 이 곳에서 다시 나온다’고 하신 말씀 그대로 안운산 태상종도사님에 의해 해방 후에 2변 도운 개척의 역사가 벌어진 것이다.
용화동으로 세번째 살림을 옮기신 2년 후(癸酉, 1933), 고수부님은 이상호에게 “일후에 사람이 나면 용봉기를 꽂아 놓고 잘 맞이해야 하느니라.”하시고 임피군 오성산으로 들어가셔서, 그곳에서 을해(乙亥,1935)년 10월 5일에 56세로 이 세상을 떠나셨다. 돌아가실 때는 횃대에 자신의 수의를 걸어놓고 목욕재계 하신 뒤에 “증산 상제님이 오시면 나도 올 것이요, 내가 오면 상제님도 오시리라.”는 한 마디 말씀을 남기고 24년에 걸친 고독한 개척교단의 세 살림살이를 끝맺고 홀연히 떠나신 것이다.
『관통증산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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