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주 천지조화
<광개토대왕비>광개토대왕비가 바라보는 한반도 세계 본문
<광개토대왕비>광개토대왕비가 바라보는 한반도 세계
<광개토대왕비>광개토대왕비가 바라보는 한반도 세계
1876년경 청국 관리가 발견한 뒤로 광개토대왕비는 글자의 마멸, 무수한 탁본, 석회칠, 비문 조작설, 내용에 대한 논란과 주관적인 해석 등 숱한 고초를 겪으면서 점차 본모습을 잃어버려 지금은 상흔을 많이 입은 불구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현재는 석회를 칠하기 이전에 제작된 탁본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비문 조작설이 매우 퇴조하고 일부 마멸된 글자에 대한 논란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비문 자체에 대한 왜곡된 해석들이 난무한다는 점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광개토대왕비문에 등장하는 한반도 세계를 바라보는 고구려인의 사관을 무시하고 그릇된 선입견에 입각하여 곡해하는 일이 한국인의 역사 인식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제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와 한반도 세계의 관계에 대한 몇 가지 쟁점을 추적하고, 이를 광개토대왕비문의 사관에 입각하여 해석해 보고자 한다.
‘신묘년 기사’의 해석
광개토대왕비문의 내용 가운데 한 · 일 양국 사학계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되어 온 유명한 ‘신묘년 기사’를 알아보자.
기사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백제와 신라는 본디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바쳐 왔으나, 왜가 신묘년(391)에 백제, 신라 등을 깨뜨려 신민으로 삼으므로, 영락 6(396)년 병신에 광개토대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국을 토벌하였다는 것이다. 맥락으로 볼 때 이를 ‘신묘년 기사’라고 일컫는 것은 합당하지 않지만, 이미 오래도록 써 온 명사이기 때문에 그대로 쓰기로 한다.
기사를 위와 같이 해석한 것은 일본 사학자들인데, 이들은 이 기사를 이용하여 임나일본부설, 즉 4세기 말 고대 일본이 가야 지역에 임나일본부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한반도 남부를 식민 지배하였다는 이론을 정당화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한국 사학자들이 수많은 비판을 내놓았다. 정인보 등은 기사의 주체를 고구려로 보아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는데도 고구려가 왜는 치지 않고 백제만을 쳤다는 점이 어색하다고 하였다. 또, 이진희 등은 아예 비문의 글자가 일제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단언하였다. 이진희의 이 비문 조작설은 한 · 일 양국 사학계에 큰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인보 등과 같이 기사의 주체를 고구려로 보아야 한다면, 비문을 쓴 사관은 기사에서 왜를 전혀 기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체를 고구려로 본다면 짤막한 기사에서 주어가 여러 번 바뀌어 혼란스러울 뿐 아니라, 더욱이 앞뒤 문맥과는 전혀 관계없이 왜가 언급되는 꼴이기 때문이다.
비문 조작설 또한 문제가 많다. 이진희 외에도 다른 몇몇 학자들이 조작설을 여러 번 제기한 바 있었지만, 우선 조작설 자체가 단순한 추측 차원에서 성립된 가설일 뿐만 아니라 현재 쏟아져 나오는 원석 탁본들 가운데에도 조작설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없다. 지금은 증거가 부족하여 조작설이 많이 퇴조하였지만, 일반인들은 아직까지 그 조작설을 사실로 믿고 있는 현실이다.
이와 같이 대주어를 고구려로 보는 해석들은 주체가 고구려여야 한다는 선입견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이 ‘신묘년 기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결국 일본 측이 처음 내놓은 해석이 정확하다. 일본 측의 해석이 문맥적으로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아야만 광개토대왕의 한반도 정벌이 정당해지기 때문이다. 아들 장수왕은 부왕을 무지막지한 침략자로 묘사하기 위해 비를 세운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정벌의 명분을 정당화하고자 왜를 끌어들인 것이다.
비문에 등장한 백제는 고구려의 주적이었나?
많은 연구자들은 광개토대왕비문이 후연과의 전쟁은 한 줄도 싣지 않고 백제와의 전쟁을 위주로 서술된 것으로 인식한다. 심지어 백제와의 전쟁만으로는 왕의 업적을 노래할 수 없으며, 후연과의 전쟁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땅을 넓혔다는 ‘광개토경’의 의미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말하는 연구자도 있다.
무슨 이유로 광개토대왕비문이 백제와의 전쟁을 위주로 서술된 것으로 오해하고 있을까?
여기에는 비문의 사관을 잘못 이해한 일부 그릇된 해석들이 영향을 미친 것이다. 물론 백제가 비문에 한 번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문 자체가 백제와의 전쟁을 위주로 서술되었다는 증거는 내용 어디에도 없다. 비문에서 백제는 영락 6(396)년과 9(399)년, 17(407)년에 등장하며, 더욱이 백제와의 전쟁은 6년과 17년이다. 그밖에는 거의 왜군과의 투쟁을 중심으로 짜여 있다.
당시 고구려는 백제를 주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다만 복속의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고구려가 6년에 벌인 백제와의 전쟁도 두 나라가 서로 대등하게 맞붙은 것이 아니라 한쪽이 다른 한쪽을 복속하기 위해 벌인 것이다. 고구려가 백제를 주적으로 간주하였다면, 전쟁을 마치고도 백제왕의 노객 맹세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비문이 백제와의 전쟁을 위주로 서술되었다는 해석은 영락 10(400)년과 14(404)년, 17(407)년에 걸쳐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을 모두 백제가 주도한 것으로 오해한 데서 나온 것이다.
영락 9년 신라를 침략한 것은 백제 · 왜 · 가야 연합군인가, 왜군인가?
고구려 군대가 왜군을 무찔러 신라를 구원한 사건은 한국인이라면 거의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사건이다. 고구려와 왜의 충돌 사건 가운데 지금의 여러 역사책에서 강조되는 것도 이것이다.
그런데 많은 연구자들은 이상하게도 영락 9년 신라를 침략한 것이 백제 · 왜 · 가야 연합군인 것으로 이해한다. 역사를 탐구하는 많은 사람들도 이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이다.
무엇 때문에 백제 · 왜 · 가야 연합군이 신라를 침략하였다는 오해가 생겼을까?
해당 기사에는 다만 신라를 침략하다가 고구려에게 패퇴한 왜군만이 등장할 뿐이다. 백제 · 왜 · 가야 연합군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결국 이 주장은 백제가 전쟁을 주도하였을 것이라는 고정 관념 속에서 나온 것이다. 즉, 백제가 주도하고 왜와 가야가 추종하는 양상으로 오해한 데서 나왔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전쟁을 백제가 주도하였다는 내용이 비문 어디에 있는가?
백제는 다만 9년에 왜와 내통한 것으로 묘사될 뿐이다. 전쟁을 주도한 사실은 기사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가야 또한 왜와 연합한 일도 없고, 신라를 침략한 사실도 없다. 다만 고구려 군대가 신라 땅에서 후퇴하는 왜군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잠깐 등장하여 아무런 저항 없이 고구려에 항복하였을 뿐이다. 백제 · 왜 · 가야 연합군을 이야기하는 연구자들은 왜를 해적질, 노략질이나 일삼는 수준의 약소한 족속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에 백제가 왜와 가야를 조종하여 신라를 침략하였다고 오해한 것이다.
영락 17년 고구려가 토멸한 세력은?
글자의 마멸이 심한 영락 17년 기사의 정토 대상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커다란 쟁점이 되어 왔다. 고구려의 5만 대군이 적군을 참살하여 철갑옷 만여 벌과 무수히 많은 전리품을 획득하고 개선하면서 6개의 성을 깨뜨렸다는 것이 요지이다. 문제는 대상을 기재한 부분이 마멸되어 이를 두고 백제, 왜, 가야, 후연 등 의견이 분분한데, 대부분 후연 쪽으로 기울고 있다. 기사의 정토 대상이 후연이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거반 고구려가 후연을 멸망시켰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중원을 칠 명분도 기재되어 있지 않은 짤막한 기사에 왜 갑자기 방향이 바뀌어 후연이 등장하는가? 이는 광개토대왕을 명분도 없이 후연군을 참살한 무지막지한 침략자로 묘사하는 것으로서, 비문의 사관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는 것이다. 후연을 내세우는 연구자들은 온갖 사료와 시대 상황을 내세워 정토 대상을 후연으로 고정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해답은 매우 간단하다. 앞서 9년 기사에 백제가 왜와 내통하고, 14년 기사에 왜가 고구려 땅을 침략하자 광개토대왕이 이를 무찔렀다고 밝혔으므로, 17년 기사의 정토 대상은 당연히 왜와 백제가 되는 것이다. 백제는 일찍이 노객을 맹세하고도 그것을 어겨 고구려 중심의 천하 질서를 위반하고, 왜는 신라 땅을 유린한 것도 모자라 고구려 영토까지 침공하였으니, 광개토대왕이 완전히 그 뿌리를 뽑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후연을 내세우는 연구자들은 이미 토벌한 왜와 백제에 다시 5만 대군을 보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주장하지만, 왜의 침략군을 무수히 참살하고도 그 근거지를 치지 않는 한 왜는 얼마든지 다시 침략군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에, 광개토대왕은 왜의 연이은 침략을 막기 위해 대대적으로 그 근거지를 파괴한 것이다. 그리고 광개토대왕은 왜와 결탁한 백제를 응징하고자 평양으로 내려갔지만 왜의 도발 때문에 실행하지 못하였으므로, 수년 동안 응징을 못 하고 벼르다가 결국 17년에 정벌하여 백제를 무력화한 것이다.
또, 후연을 칠 명분을 기재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후연은 고구려의 철천지원수이므로 명분을 적을 필요도 없으며, 후연이 고구려 땅을 침략한 사실을 적는 것도 고구려에게는 치욕적인 기술일 뿐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전자는 어떻게든 후연을 고정시키기 위해 아전인수 격으로 동원한 말도 안 되는 주장일 뿐이다. 그리고 후자도 문제가 있는데, 후연의 침략은 한 줄도 기재하지 않으면서 14년 왜의 침공은 구체적으로 기술한 이유가 무엇인가?
후연이 기재될 만한 아무리 타당한 근거를 내세운다고 할지라도, 어차피 전체적인 맥락에서 후연을 등장시키지 않는 비문의 논리상 후연은 결국 정토 대상으로 기재될 수 없다. 기사에 보이는 ‘참살탕진(베고 죽여 남김없이 싹 쓸었다.)’이라는 잔혹한 표현도 백제나 가야에게는 쓸 수 없고 후연이나 왜에게만 쓸 수 있으나, 비문의 전체적인 논리상 후연은 언급하지 않으며, 백제는 고구려 중심의 천하 질서를 위반한 탓에 6개 성이 깨어졌으므로, 결국 해답은 왜와 백제가 되는 것이다.
후연을 내세우는 연구자들은 기사에 보이는 철갑옷 만 벌의 언급을 들어, 당시 철갑옷 만 벌 이상을 운용할 수 있는 국가는 중원의 후연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꼭 후연만이 철갑옷 만 벌 이상을 운용할 수 있다는 관념 역시 어디까지나 선입견일 뿐이다.
철갑옷 만 벌의 문제는 광개토대왕이 10년과 17년에 파병한 ‘보병과 기병 5만 명’에 의하여 간접적으로 풀린다. 5만 대군은 광개토대왕이 왜군을 무찌르기 위해 파병한 군대인데, 이는 그 정도의 병력을 내어야만 상대할 수 있는 강적이 왜군이었음을 말해 준다. 즉, 왜가 고구려와 맞먹도록 최소 5만 명 이상의 대병력을 보유하였다는 뜻이다. 왜의 병력이 5만 이상이므로 철갑옷 만 벌쯤은 얼마든지 운용할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주적, 왜군
삼국사기에는 백제와의 싸움이나 후연과의 싸움이 많이 기재되어 있지만, 광개토대왕비문에는 후연과의 싸움은 전혀 싣지 않을 뿐더러 백제조차도 진짜 적이 아니고 왜군이 고구려의 주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특히 광개토대왕은 백제와 신라, 가야의 노객 맹세는 받았지만, 왜군은 고구려에 대해 항복이란 것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왜군에 대해서는 어떠한 항복이나 맹약도 받지 않았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왜는 강력한 군사 체제를 갖추고 고구려의 남하 정책을 저지하는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비문에서 이를 알 수 있는 여러 기사가 있다.
첫째, 신묘년 기사에 백제, 신라 등을 신민으로 삼았다고 할 정도로 왜군이 부각되어 있다.
둘째, 영락 9년 기사에 왜군이 신라 땅에 가득하여 신라인을 왜의 신민으로 삼을 정도라는 신라 사신의 말이 있다.
셋째, 10년 기사에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구원하고자 5만 명에 이르는 대병력을 보냈다고 한다. 이는 이 정도의 병력을 동원해야만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왜군이었기 때문이다.
넷째, 14년 기사에 왜군이 고구려 황해도를 침공하였다고 한다. 왜군이 직접 고구려 영토에 침입한 것은 보통 사건이 아니었다. 강국으로 성장하는 고구려를 치려면 그만큼 각오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문에는 ‘불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왜군이 선전 포고 없이 함부로 쳐들어왔다는 것이다. ‘침입’이란 표현도 보통 대등한 나라에 대하여 쓰는 것이므로, ‘왜군이 침입하였다.’고 한 것은 고구려와 왜가 서로 대등하였다고 인식한 것이다. 이때 왜군이 매우 심각하게 고구려 땅을 유린하였기 때문에 광개토대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어야 할 정도였다. 기사에는 고구려군과 왜군이 평양 근처에서 ‘서로 마주하였다.’는 기술이 있는데, 이는 고구려군과 왜군이 대등한 위치에서 싸웠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또, 이해 벌어진 전쟁에서는 여느 전쟁과 달리 두 나라 모두 수군과 육군을 함께 동원했음을 알 수 있다.
다섯째, 17년 기사의 전반부는 고구려군과 왜군이 정면 대결을 펼쳤다고 추정되는 내용이다. 왜군을 ‘베고 죽여 남김없이 싹 쓸었다.’고 할 정도로 양쪽 군대가 격렬한 정면 승부를 펼쳤음을 알 수 있다. 이때 고구려군이 얻은 갑옷은 무려 만여 벌이지만, 왜군을 무찌를 때 항상 5만 대군이 동원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갑옷 만여 벌 정도는 왜군이 충분히 갖출 수 있는 군수품이었다.
이와 같이 왜군은 광개토대왕비문에서 매우 강력한 군대로 묘사된다. 왜는 비문에 묘사된 대로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맞서 싸웠으며, 고구려가 물리치지 않으면 안 되는 강적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의 많은 연구자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기껏해야 왜인은 백제인의 용병이자 하수에 불과하며, 고구려와의 전쟁은 백제가 주도하고 왜군이 추종했다는 식의 궁색한 변명만 늘어놓는다. 왜군이 고구려와 대적할 만큼 막강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속에는 물론 일제 강점기에 겪은 상처와 그로 인한 반일 감정도 조금이나마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비문을 곡해해서는 안 된다. 광개토대왕비문은 고구려의 민족 통일 의지와 남하 정책을 중심으로 서술되었기 때문에, 비문의 중심이 왜곡된다면 광개토대왕비는 일차 사료로서의 가치를 잃게 된다.
이상과 같이 광개토대왕비문에 등장하는 한반도 세계에 관한 여러 쟁점들을 비문에 반영된 고구려인의 사관으로 추적하고 해석해 보았다. 광개토대왕비는 대한민국의 얼굴이다. 따라서 비문에 관한 그릇된 관념들 역시 바로잡혀야 한다. 잘못된 선입견을 과감히 떨치고 광개토대왕비문을 고구려인의 사관에서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우리 역사를 빛내는 데 한몫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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