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주 천지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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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서방 경략의 교두보이자 방파제인, 번조선의 역사
초대 왕 치두남蚩頭男과 낭야琅邪
중원 지역과 직접적으로 맞닿은 지역은 번조선 영역입니다. 단군조선 초기 중국은 국가의 존망이 달린 대홍수를 당하였습니다. 이전에 단군조선의 도움으로 보위에 오른 순舜은 9년 동안 계속된 물난리를 단군조선의 도움으로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단군왕검께서는 서방 한족을 제지하고자, 한족이 두려워하던 치우천황의 혈통인 치두남蚩頭男을 번한 왕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지금의 허베이성 개평 동북쪽에 있는 탕지보湯池堡에 수도를 세웠습니다. 이곳이 험독險瀆으로 왕검성王儉城이라고 칭하였습니다.
치두남은 허베이성 난하 부근인 요수遼水 주변에 12성을 쌓았습니다. 치두남이 세상을 뜨자 아들 낭야琅邪가 즉위하였습니다. 즉위한 해에 가한성可汗城을 개축하였는데, 이를 낭야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이후 부루태자가 명을 받고 특사로 도산에 갈 때 도중에 낭야에 들러 반달 동안 머물며 백성의 사정을 묻고 들었습니다. 낭야왕은 태자의 명으로 경당을 크게 일으키고, 아울러 태산에서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렸습니다.
15세 왕 소전少佺의 하나라 정벌
중원 지역에 하夏나라를 세운 우禹임금은 부루태자가 금간옥첩을 전해 준 지금의 저장성 회계산인 도산塗山에 묻어 달라고 할 만큼 단군조선의 은덕을 잊지 못했습니다. 이후에도 하夏나라는 단군조선을 상국으로 모셨습니다. 그 후 폭군 걸왕桀王 때 상나라의 초대 임금인 탕이 하나라를 정벌하고자 할 때 단군조선의 허락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당시 13세 흘달단군은 처음에는 걸을 지원하였으나, 걸의 포악한 정치가 개선되지 않자 결국 탕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때 번한의 15세 왕 소전은 기원전 1767년 갑오년에 장수 치운출蚩雲出을 보내 탕을 도와 걸을 정벌하게 하였습니다. 이듬해에는 묵태墨胎를 보내 탕임금의 즉위를 축하하였습니다. 묵태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고죽국孤竹國 임금의 성씨입니다. 백이伯夷·숙제叔齊의 고사로 잘 알려진 충절의 대명사 백이의 이름은 묵태윤墨胎允이고 숙제의 이름은 묵태지墨胎智입니다.
색불루단군의 혁명이 가져온 번한의 변화
이후 번한 28세 왕 해모라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세상을 떴습니다. 이에 진한의 소태단군은 우사雨師 소정小丁을 번한 왕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이는 늘 소정의 지모가 출중함을 꺼렸던 고등이 임금께 권하여 번한으로 보낸 것입니다. 이때 상나라 왕 무정武丁이 전쟁을 일으키자 고등이 상장上將 서여西余와 함께 격파하였습니다. 이때 서여는 군사를 번한의 수도 안덕향安德鄕에 주둔시켰는데, 자객을 보내 소정을 죽였습니다. 이후 색불루단군의 혁명이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이에 대립하던 서우여徐于餘를 번조선 왕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단군조선 제2왕조 시대를 연 22세 색불루단군이 기존의 ‘삼한’ 체제를 ‘삼조선’ 체제로 고쳤으므로, 서우여는 ‘번조선’을 다스리는 30세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70세 번조선 왕이 된 수유 사람 기후
번조선(번한)은 중원 지역과 인접해서 그런지 여러 정치적 변동이 많았습니다. 68세 해인解仁왕은 즉위한 해에 자객에게 살해되었습니다. 뒤를 이은 아들 수한水韓왕 때 연나라가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 공격해서 수도인 험독까지 쳐들어왔습니다. 번한으로서는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이때 수유 사람[須臾人] 기후箕詡가 젊은 청년[子弟] 5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전쟁을 도왔고, 이어 진한과 번한의 군사가 함께 협공하여 연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습니다. 이에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인질을 보냈습니다. 이후 수한이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니 기후가 명을 받들어 번조선의 왕이 되었습니다.
번조선의 마지막 75세 왕 기준箕準
기원전 232년 74세 왕 기비箕丕가 즉위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삼한관경제가 무너지고 천하가 혼란에 빠진 상태였습니다. 기비는 종실 사람 해모수解慕漱와 함께 새 나라를 열자는 약속을 하였고, 힘을 다해 해모수가 천왕이 되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로 하여금 능히 대권을 잡을 수 있게 한 사람은 오직 기비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들 기준 때에 떠돌이 도적 위만衛滿에게 속아 마침내 배를 타고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준왕은 황해를 건너 지금의 금강 하구 지역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군산으로 왔다고도 하고 익산으로 왔다고도 합니다. 금강 하구에 있는 어래산御來山은 임금이 오신 산이라는 뜻으로 준왕의 도래 사건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단군조선 개국 이래 서방 진출의 교두보이자 외부 침략을 막는 방파제 구실을 하던 번조선은 이렇게 역사의 막을 내렸습니다.
위만의 번조선 찬탈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을 피해 넘어온 한족 난민으로 번조선 땅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난민 중 위만衛滿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한 고조 유방의 죽마고우이자 연나라 왕이었던 노관盧綰의 부하였습니다. 한 고조가 죽은 뒤 정권을 잡은 여태후의 공신 숙청을 피해 위만은 조선인으로 변장하고 부하 1천 명과 함께 번조선 준왕에게 투항하였습니다. 기원전 195년의 일입니다. 준왕은 위만을 받아 주었을 뿐 아니라, 박사博士로 임명하고 서쪽 변방인 상하운장을 지키는 장수로 임명하였습니다. 상하운장上下雲障은 지금의 난하 서쪽 지역에 위치한 국경 요새로, 난하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 근처를 흐르는 강입니다.
그런데 위만은 그곳에서 몰래 세력을 길러 이듬해에 한나라 군사가 열 길[十路]로 나누어 쳐들어온다고 거짓으로 고하고 왕검성을 방비한다는 핑계로 대군을 이끌고 물밀듯이 왕검성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이를 감당하지 못한 준왕은 도망하였고, 위만은 자신을 거두어 준 은인 준왕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위만정권은 위만의 손자 대인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 무제에게 멸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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