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주 천지조화

<단군조선>몰락하는 단군조선, 44세 구물단군의 치적-대부여 본문

역사 이야기/잊혀진 역사

<단군조선>몰락하는 단군조선, 44세 구물단군의 치적-대부여

세덕 2023. 8. 24. 18:31

 

<단군조선>몰락하는 단군조선, 44세 구물단군의 치적-대부여

<단군조선>몰락하는 단군조선, 44세 구물단군의 치적-대부여

삼한에서 삼조선으로

구물단군은 삼한을 삼조선三朝鮮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로부터 삼조선이 비록 대단군을 받드는 제도는 그대로 유지하였지만 화전和戰의 권한, 즉 병권兵權은 이제 단군 한 분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단군조선은 우화충 반란 이후 국력이 급격하게 쇠미하였는데, 이렇게 된 실제적인 원인은 바로 병권의 분립에 있었습니다.

즉 44세 구물단군 이전에는 진조선의 천왕인 대단군 한 분이 중앙집권적으로 삼한(삼조선)의 병권을 집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삼조선 체제로 바뀌어 삼조선이 각기 전쟁 수행 권한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병권 분립은 단군조선 체제가 약화되어 붕괴의 길을 걷는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병권 분립은 신교 삼신사상을 뿌리로 하는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를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구물단군의 노력
구물단군은 재위 이듬해 대영절을 맞아 친히 천제를 올려 삼신상제님의 보살핌을 간절히 서원하였습니다. 제도를 고치고 아홉 가지 맹세(九誓之盟)을 정하여 백성의 화합과 교화를 도모하였습니다. 하지만 대부여는 예전의 진한 또는 진조선과 같은 막강한 통치력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삼한관경제가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습니다. 양 날개와 같은 두 조선의 부단군이 중앙의 쇠약해진 진조선의 대단군과 대등한 관계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때부터 단군조선은 급속하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쇠락을 길을 걷는 46세 보을普乙단군

후기로 가면서 단군조선은 점점 쇠락해져 갔습니다. 45세 여루단군 이후 단군조선과 국경을 접한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가 끊임없이 침입을 해 왔습니다. 번조선의 68세 왕인 해인解仁이 연나라 자객에게 시해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서기전 323년에는 번조선 제후인 읍차邑借 기후箕詡가 병사를 이끌고 번조선 궁에 진입하여 스스로 번조선 왕이 되고, 사람을 보내 이를 윤허해 달라는 청을 올리자 단군은 어쩔 수 없어 이를 인정하였습니다. 이러한 사건은 나라 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단군의 영향력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반증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이 기후의 후손으로 6명의 왕이 나오는데, 이를 두고 ‘기자조선’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불성설입니다. 번조선의 마지막에 기자 후손으로 추정되는 여섯 왕대가 나왔다고 해서 단군조선의 종통이 기자로 계승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보을단군의 보위를 찬탈하는 내란까지 발생하였습니다. 한개韓介가 수유須臾의 군사를 이끌고 궁궐을 점령,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올랐던 것입니다. 단군조선에는 4대 반란 사건이 있었습니다. 9세 아술단군 때의 우착, 22세 색불루단군 때의 신독, 43세 물리단군 때의 우화충 그리고 46세 보을단군 때 벌어진 한개의 반란입니다.

보을단군에 닥친 이 위기의 순간에 상장군 고열가高列加가 의병을 일으켜 한개를 격파함으로써 반란은 진압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로부터 나라의 힘이 심히 미약해지고 살림살이가 넉넉지 못하게 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보을단군께서 붕어하셨습니다.

조선의 멸망, 47세 고열가단군

마지막 단군 고열가

46세 보을단군 때 있었던 한개의 반란을 진압한 상장군 고열가는 43세 물리단군의 현손玄孫이었습니다. 반란을 다스린 공로가 있고, 백성의 사랑과 공경을 받았기 때문에 추대를 받아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고열가 단군은 백악산에 단군왕검의 사당을 세웠고, 이를 책임질 유사有司로 하여금 계절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단군은 어질고 인자하였으나, 우유부단하여 명령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장수가 자신의 용맹을 믿고 화란禍亂을 자주 일으켰습니다. 나라 살림은 쪼들리고 백성의 기운도 더욱 쇠약해져 갔습니다.

제위帝位를 버리는 단군
기원전 238년 3월 제천 행사를 행한 날 저녁, 고열가 단군은 오가五加와 더불어 의논하며 마지막 말씀을 하였습니다.

“옛날 우리 성조들께서 처음으로 법도를 만들고 국통國統을 세워 후세에 전하셨노라. 덕을 심으심이 넓고도 멀리 미쳐 만세의 법이 되어 왔느니라. 그러나 이제 왕도가 쇠미하여 모든 왕[汗]이 세력을 다투고 있도다. 짐이 덕이 부족하고 나약하여 능히 다스릴 수 없고, 이들을 불러 무마시킬 방도도 없으므로 백성이 서로 헤어져 흩어지고 있느니라. 너희 오가는 현인을 택하여 단군으로 천거하라.” (단군세기)

이에 옥문을 크게 열어 사형수 이하 모든 포로를 석방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단군께서 마침내 제위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수도하여 선인仙人이 되었습니다. 이에 기원전 238년부터 기원전 232년의 6년 동안 오가五加가 국사를 공동으로 집행하는 과도기 공화정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렇게 단군조선은 시조 단군께서 조선을 연 이래 2,096년 만에 그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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