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호천금궐(昊天金闕)에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동방의 땅에 살아온 조선의 백성들은 아득한 예로부터 삼신상제(三神上帝), 삼신하느님, 상제님이라 불러 왔나니, 상제는 온 우주의 주재자요 통치자 하느님이니라. 동방의 조선은 본래 신교(神敎)의 종주국으로 상제님과 천지신명을 함께 받들어 온, 인류 제사 문화의 본고향이니라. (道典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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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공식호칭, 상제님! 그러나 이제 우리는 상제(上帝)라는 말조차 낯설기만 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과연 선조들은 상제님을 어떻게 받들어 왔을까요? 행촌 이암의『단군세기』를 보면, 옛날 고조선 시대에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에서 상제님께 천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MBC는 지난 1990년 개천절 특집 프로그램으로 한민족 고유의 상제님 신앙과 제천의례(祭天儀禮), 그리고 백두산에서 봉행된 천제를 방영했습니다. 본지에서 전반부의 주요 내용을 발췌하여, 우리 민족의 천제문화의 발자취를 소개합니다. (이하 방송내용 발췌 정리) 백산(白山)에서 천제를 올려온 한민족 하늘에 대해 우리 민족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문명의 동이 틀 무렵, 우리 민족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하늘님, 즉 천신(天神) 개념을 터득했으며, 스스로를‘하늘님의 백성’으로 여기고 있었다. 『삼국유사』는 그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인간 세상에 뜻을 품어온 하늘님의 아들 환웅은 아버지 환인의 허락을 얻어 천부인 세 개와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 신시(神市)를 열었다. 비, 구름, 바람의 도움을 받아 인간을 널리 이롭게 다스리던 중 웅녀에게서 아들을 얻었으니, 그가 고조선의 시조인 단군왕검이라.” 우리 민족의 발원지로『삼국유사』에 기록된 태백산은 백두산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그런데 우리 지명에는 백두산 외에도‘밝다’는 뜻의‘흰 백’자가 들어간 지명이 곳곳에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백산(白山)을 섬긴다 하여‘배달민족’으로 일컬어왔다. 배달의 어원은‘밝다’, 그 뜻은‘밝고 신성한 땅 혹은 산’이다. 왜 우리 민족은 곳곳에 백산을 두고 백산을 섬기며 살아왔는가? 원래 신시가 열렸던 태백산, 즉 백산 중의 백산은 백두산이다. 그러나 왕조가 바뀌고 국경이 달라지면서 백산도 여럿이 됐다. 남한 제일의 백산인 태백산. 이곳이 백산인 징표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천단에 있다. 그리고 산의 정기를 받은 천지(天池)로서의 역할을 해온 황지(黃池, 태백시 소재)에 있다. 결국 신시의 백성과 우리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하늘에 제사를 올림으로써 분명히 깨닫는 자기자신이‘하늘의 자손’이라는 자각이다. 그리고 국호가 달라지고 시대가 변해도 결코 변할 수 없는 배달민족의 이름이다. 한국인 정신사의 중요한 물줄기, 제천의식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일대에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단군 유적과 유습이 많이 남아있다. 그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강화도 마리산. 이 마리산 정상에는 단군이 몸소 쌓았다는 참성단이 있다. 이곳에 몸소 단(壇)을 쌓고 하늘을 우러른 단군왕검. 숙종때 참성단을 중수했던 강화유수 최석항의 중수비(1716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 후손들은 수 천년 동안 끊임없이 단군을 섬겨왔다. 그런데 어찌 무너진 단을 중수치 않겠는가!” “참성단에서는 전통적으로 우리민족이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그러나 조선조 이후 왕조에서는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많은 여러 종교단체라던가 지방토호들이 여기서 각각 제사를 지내는 전통이 있어 왔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 민족이 유불선 3교가 들어오기 이전, 아주 아득한 옛날부터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전통이 있어왔는데, 유불선 3교로 대표되는 체제종교나 체제왕조 또는 체제정권 차원에서가 아니라 우리민족 고유의 신앙전통, 즉 참성단에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얼과 민족문화 주체성을 그리는 예배전통이 이어져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윤이흠 / 서울대 종교학과) 단군왕검으로 비롯된 제천의식(祭天儀式)과 천신사상(天神思想)1)은 고조선 사회에서부터 한말 근대사회에 이르기까지 한국인 정신사의 밑바탕을 흐르는 중요한 물줄기요, 민족문화를 구성하는 주춧돌이었다. 중국의『후한서』나 우리의『삼국유사』에 기록된 상고시대 우리의 제천의례는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예맥의 무천2) 등이 있는데, 주로 추수가 끝난 10월이나 12월에 드렸으며, 크게 모여 며칠씩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었다고 한다. 융성과 쇠퇴의 굴곡을 겪은 천제문화
이러한 우리 민족 고유의 제천의례는 시대적 역사적 조건에 따라 융성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하는 굴절을 겪어야만 했다. 삼국시대 전반기에는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유교사상의 결합으로 세련된 제의(祭儀)를 발전시킬 수도 있었으나, 고려와 조선왕조에 이르러서는 우리민족이 제천의례를 거행할 수 있는 정당성마저 억제되어야 했던 것이다. “조선사회를 중국과의 관계에서 제후국가로 한정시키면서 제천의례의 정당성 문제가 아주 크게 논의되었습니다. 조선초기에는 제천의례가 정기적인 게 아니라 재난에 대한 기원으로서 부정기적으로 거행됐죠. 세조때 정기의례로 회복이 됐긴 했지만 대체로 조선시대를 통해서 중단된 상태였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제천의례의 역할을 했던 것은 도교적인 의례들이었고, 그러다가 고종 때인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고종의 황제등극의례로서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단인 원구단이 건축되고, 그 원구단에서 등극의례가 거행되었습니다.”(금장태 / 서울대 종교학과) 고종황제가 중국으로부터 독립된 황제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원구단(園丘壇)을 짓고 제천의례를 올린것은 세조 3년 이후 440년만의 일이다. 중국의 천자만이 하늘의 제사를 올릴 수 있다는 사대주의를 물리치고 우리가 바로 하늘의 자손이며, 진정한 독립국의 백성임을 내외에 알린 것이다. 그 원구단 자리가 바로 서울 소공동의 조선호텔 자리다. 일제에 의해 헐린 원구단은 철도호텔이 되었다가 지금의 조선호텔이 되었고, 제기와 위패를 보관했던 황궁우(皇穹宇)만이 남아있다. 그야말로 국운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것이다.
| “일청전쟁 이후 조선에서 청나라 세력이 제거되면서 그것을 계기로 천자의 나라, 황제의 나라로 독립선언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칭제건원(稱帝建元),즉 황제를 일컫고 연호를 세운다라고 합니다. 1897년(광무원년)에 고종황제께서‘주상전하’라는 칭호 대신에‘황제폐하’가 되신 겁니다. 황제로 등극을 하려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것이 필수요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다 그것을 아뢰어야 하는 겁니다. 고종황제께서 백관을 다 거느리시고 원구단에 나오셔서 황제의즉위식을 거행하신 겁니다(10월 12일). 그리고 광무2년(1898년) 동짓날에 다시 거동하셔서 황궁우에서 제천행사를 올리게 됩니다.”(최근덕 / 성균관대 유교학과) 사대주의의 그늘에 가려 천제조차 맘대로 올리지 못했던 조선의 왕들. 때로는 왕조를 지탱해주는 수단으로, 때로는 민족자존을 알리는 깃발로 나부꼈던 제천의례. 무너진 단을 다시 세우고 끊어진 하늘숭배의 숨을 다시 불어 우리가 신시의 백성으로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그날은 올 것인가!
태양의 제전祭典 구상(具常) 아득한 그 옛날부터 우리 겨레의 조상들은 백두산 신단수(神檀樹) 아랫마을 신시(神市)에다 동이(東夷)의 여러 부족들을 한데 모아놓고 해마다 상월(霜月)이면 개천(開天)의 축제를 지내었다네 저들은 먼저 하늘에 고사를 드리고 몸과 마음을 옳고 바르게 쓰기를 맹세한 뒤 뜀박질로 날쌔기 내기를 하고 바위를 쳐들어 힘을 겨루고 씨름을 하고, 활을 쏘고, 말달리기를 하고 편을 갈라 진뺏기와 밧줄당기기를 하며 그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낮과 밤을 이어서 잔치를 베풀었다네 저들은 그 놀이와 잔치를 통하여 사람으로 태어난 기쁨을 서로가 나누며 사람이 지닌 능력의 무한함에 눈뜨고 사람의 재주가 저마다 다름을 알아내고 사람의 만남과 그 인정의 존귀함을 맛보고 사람끼리의 협동의 위력과 그 보람을 깨달아서 마침내 홍익인간3)이라는 드높은 이상을 앞세워 비로소 이 땅에 첫 나라인 단군조선을 이룩하였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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