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본을 서양제국주의를 몰아내는 천지 일꾼으로 내세우심
러·일전쟁을 붙여 서양세력을 물리치심
이제 만일 서양사람의 세력을 물리치지 않으면 동양은 영원히 서양에 짓밟히게 되리라. 그러므로 서양 세력을 물리치고 동양을 붙잡음이 옳으니 이제 일본사람을 천지의 큰 일꾼으로 내세우리라. (道典 5:27:4∼5)
내가 일러전쟁을 붙여서 일본을 도와 러시아를 물리치려 하노라. (道典 5:26:2)
상제님은 당시 동양에서 가장 개화하고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일본을 천지의 큰 일꾼으로 내세워 역사시키셨다.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얻은 요동반도를 러시아가 주도한 3국간섭으로 이를 반환하게 되었고, 조선과 만주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경쟁관계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에 일본은 러시아와 프랑스의 러불동맹(1894)에 맞서 러시아의 남하를 두려웠던 영국과 영일동맹(1902)을 맺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애기판 씨름이 시작되었으니 이것이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이다.
한반도를 바둑판으로 두 신선은 판을 대하고 두 신선이 훈수한다는 말씀에 따라 일본과 러시아가 각기 판을 대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훈수를 두는 애기판 씨름을 붙여 일본으로 하여금 러시아를 물리침으로써 서양세력을 막아내게 하셨다.
“내가 일러전쟁을 붙여서 일본을 도와 러시아를 물리치려 하노라.” 하시니 성도들이 그 말씀을 믿지 않고 “…약소한 일본을 도와서 천하 막강한 러시아를 물리친다 하심은 더욱 터무니없는 말씀이라.” 하더니 12월에 과연 일러전쟁이 일어나서 일본 군사가 승세를 타고 국경을 지나가매 … (道典 5:26:1∼5)
당시 일본은 100만 신식군대를 만들었고, 러시아는 40만 군대를 극동으로 투입했다. 반면 조선은 일본군의 100분의 1도 안 되는 신식군대가 있었을 뿐이었으므로 이들 싸움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아시아 국가가 서양의 열강과 싸워 이긴 적은 단 한번도 없었기에 일본은 그 동안 꾸준히 부국강병을 위해 노력했음에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러시아는 세계 최강의 육군 보유국이었기에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축제 분위기에 들떴다.
1904년 2월, 여순군항에 대한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엄청난 희생자를 내며 고전했지만 전사자의 시체를 밟으며 죽음의 전진을 계속했다. 치열한 공방전 속에 육전은 결국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다. 처음부터 일본을 얕보며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던 러시아는 육전에서의 패배를 해전에서 만회하려 했다. 일본이 아무리 육전에서 승리한들 러시아는 무적의 발틱함대가 있었기에 자신만만했다. 반면 일본은 과거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육군이 승승장구 하다가 이순신의 해군에 패배했던 쓰라린 경험이 있었기에 긴장했다.
그러나 페테르부르크를 출발하여 원정에 나선 러시아해군은 몇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이 수에즈 운하 이용을 거부함으로써 발틱함대는 아프리카의 최남단인 희망봉을 돌아 장장 7개월에 걸쳐 30,000㎞라는 아주 먼 원거리 항해를 해야했다. 이로 인해 병사들의 피로가 가중되고 연료가 부족했다. 따라서 최단 거리로 대한해협을 통과하여 러시아 극동항구에서 연료를 재보급 받아야 했다. 또한 정식훈련을 받지 않은 수병들이 많아 정확한 포격을 하지 못했고, 지휘체계도 부실했다. 반면 일본은 대한해협에 해군을 주둔시키고 러시아 해군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일 러시아 해군이 이 해협을 통과하여 극동함대와 합세하고 연료를 재보급 받는 날에는 일본은 전쟁에 지는 위기상황에 빠질 수도 있었다.
1905년 5월 27일, 러시아 해군은 야음을 틈타 대한해협을 통과하려고 전군에 소등을 지시했다. 그런데 군함1척이 명령을 알아듣지 못하고 등화관제를 지키지 않아 일본에게 발견되어, 결국 일본 연합함대에 전멸하다시피 격파되었다. 일본군의 기적같은 승리였다.
한편 당시 해전의 주역이었던 일본군 아끼야마 중장은 꿈에서 발틱함대가 대한해협을 통과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며, 해전 당일에는 동남풍이 불어서 전략을 유리하게 전개하였다고 당시의 상황을 증언했다. 일본인들은 이 바람을 자기들의 민족신이 도와준 것이라 하여 ‘가미가제(神風)’라 부른다.
작은 섬나라 일본이 어떻게 거대한 러시아를 이길 수 있었을까? 일본은 그 민족성이 침략열이 강한데다 군국주의적 요소가 강하고, 또 권력층의 내분이 끝나고 일단 중앙집권이 완료되면 상부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며 일사분란하게 국력을 집결시켰다. 반면 당시 러시아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내부갈등이 벌어졌고, 겉모양만 현대식으로 바꾼 러시아의 전제왕조는 민중의 거센 저항을 받았으며, 혁명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일본이 승리한 데는 이러한 현실적인 요인이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운이 따르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본이 대강국인 러시아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증산 상제님의 공사로 인함이다. 상제님께서 공사를 집행하시어 일본에게 기운을 붙여주었기에 일본은 모든 이의 예상을 뒤엎고 전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그 동남풍(가미가제)이 증산 상제님께서 신권으로서 불리신 것임을 그 누가 알았으랴. 당시 동남풍을 불렸던 상제님의 공사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루는 “이제 49일 동안 동남풍을 빌어 와야 하리라.” 하시고 성도 서너 명을 거느리고 남고산성(南固山城)으로 가시어 만경대(萬景臺)에서 공사를 행하실 때 장대에 종이를 달아 세우시고 글을 써서 축사하신 후에 성도들로 하여금 공사를 행하신 곳에 머무르게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제갈량이 제단을 쌓고 7일 동안 밤낮으로 공을 들여 동남풍을 불렸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니라. 공들이는 동안에 일이 그릇되어 버리면 어찌하겠느냐.” 하시니라.
또 상제님께서 “너희들은 바람이 불거든 오라.” 하시고 남고사(南固寺)로 들어가시니 과연 조금 후에 동남풍이 크게 진동하거늘 성도들이 들어가서 아뢰니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차길피흉(此吉彼凶)이로다.” 하시고 산성(山城)을 내려오시니라. (道典 5:27:1∼20)
역사상 가장 큰 해전의 하나로 기록되는 이 해전의 파급효과는 매우 컸다. 전쟁초기에 비웃음을 받았던 일본은 그 지위가 세계적으로 격상되었고, 태평양뿐 아니라 유럽의 세력균형도 흔들어 놓았다. 반면 극동진출의 꿈이 좌절된 러시아는 발칸반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하여 역사상 유례없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또 사회주의혁명을 성공시켜 자본주의를 견제하는 거대한 세력을 등장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2>증산 상제님은 왜 일본을 천지 일꾼으로 내세우셨는가?
서양 문명의 잔악함
조선을 서양으로 넘기면 인종이 다르므로 차별과 학대가 심하여 살아날 수 없을 것이요 (道典 5:122:2)
만약 서양으로 가면 다시 올 날이 없으리라. (道典 5:119:5)
증산 상제님은 일본을 서양세력을 몰아내는 천지의 일꾼으로 내세우셨다. 그리고 러·일전쟁을 붙여 일본을 도와 러시아를 물리치셨다. 그런데 만일 당시 제국주의의 식민쟁탈에서 우리 민족이 서양의 손에 넘어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 만일이란 가정은 있을 수 없지만 흥미있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지금 우리 민족은 온통 혼혈 일색이고, 한글이나 한국어는 일부 사람들에 의해 겨우 명맥만 유지될 뿐, 지금처럼 한민족의 순수한 혈통과 문화를 그대로 보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본래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은 백인우월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타민족의 인종과 문화를 철저하게 파괴했던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16세기 스페인의 침략을 받은 아메리카 대륙의 아즈텍, 잉카 문명은 지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현재 중남미는 원주민의 60%가 혼혈인이며, 90%가 고유종교와 언어를 잃었다. 엘살바도르 같은 나라는 95%가 혼혈인이다. 필리핀의 경우도 스페인에 이어 미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현재 고유언어인 타갈로그어와 영어가 주로 쓰이지만 방송이나 공식석상에서는 영어가 주된 언어로 통용되며, 어릴 때부터 영어로 교육을 받고있다. 인종 또한 스페인계와 중국계의 혼혈이 대부분이며, 종교도 93%가 기독교이다.
그리고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할 당시 3,500만명 이상이었던 인디언은 그로부터 100년 후에는 300만명으로 줄어들었다. 원주민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한 것이다. 이러한 인구감소는 노동력의 부족을 가져왔고, 이 때문에 아프리카의 흑인을 노예로 잡아 아메리카 대륙으로 운송하게 되었다. 당시 유럽의 상인에 의해서 미대륙에 운송된 흑인노예는 300년 동안에 1500만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들은 흑인들을 짐승인양 마음대로 매매하고, 살육하고, 막노동꾼으로 부려먹었다.
한마디로 서양의 인종차별과 학대라는 것은 씨종자를 말려버리고, 민족성을 뿌리 채 뽑아버리는 것이기에 상제님은 후천의 종주국이 될 조선을 서양에 넘기지 않으셨던 것이다.
<3> 조선신명을 서양으로 보내 세계대전을 일으키심
제1차 세계대전 공사
이 지방(조선)을 지키는 모든 신명을 서양으로 건네 보내어 큰 전란(戰亂)을 일으키게 하였나니 이 뒤로는 외국사람들이 주인 없는 빈집 드나들듯 하리라. (道典 5:21:1∼3)
그 신명(관운장)이 지금 이 지방에 있지 않고 서양에 가서 큰 난리를 일으키고 있나니 치성은 헛된 일이니라. (道典 5:299:1∼3)
신축(辛丑, 1901)년 이후 조선왕조는 현실적으로는 망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내면의 신도세계에서는 선천의 구질서를 청산하고 지구촌일가의 새문명을 여는 인류사의 새 질서를 준비해 가는 역사개벽의 칼을 조선민족이 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증산 상제님은 조선 땅을 지켜주는 조선의 수호성신들을 서양으로 보내 큰 전쟁을 일으키게 하셨다.
당시 유럽은 중앙에 위치한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3국동맹과 그를 포위하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3국협상(연합국)의 2대 세력으로 나뉘어진 채, 1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삼엄한 군비 강화 하에 겨우 평화가 유지되어 나가는 이른바 무장평화시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실례로 영국과 독일간의 공개적인 건함 경쟁이라든지 또는 프랑스와 독일간에 벌어진 육군의 군비 확대 경쟁 등이다.
이러한 와중에 조선신명으로 하여금 서양의 큰 난리를 일으키는 상제님의 세운공사는 제국주의 본 고장인 유럽에 전쟁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이것이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이곳을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F.페르디난트 부부가 반(反)오스트리아 폭력단체에 소속된 가블릴로 프린시스라는 19세의 대학생에게 암살된 사건이다. 암살자는 보스니아의 해방을 다짐하던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였다.
유럽의 모든 나라는 황태자의 암살에 경악했으며, 오스트리아는 암살의 배후에 세르비아의 음모가 있다고 단정하고 모든 책임을 세르비아 정부에 돌렸다. 그 이전 1908년 오스트리아는 범슬라브계열인 세르비아가 탐내고 있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한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를 포함하고 있는 대제국이었는데 보스니아를 합병함으로써 세르비아의 반발을 가져왔었다.
오스트리아 황제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동의를 얻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고, 이어 충분한 군수품을 생산할 능력도 없는 러시아가 국내에 넘쳐나는 불만세력을 밖으로 돌리고 정권을 안정시키고자 세르비아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전쟁에 개입했다. 한편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인 독일은 러시아에 이어 프랑스, 영국에 선전포고함으로써 세르비아 청년 한 명의 총질이 5년간(1914∼1918)에 걸쳐 동맹국과 연합군간 34개국이 참가한 역사상 최대규모의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
일본의 참전은 영일동맹의 우의를 표방하고 이루어지지만 일본의 당면 목표는 중국에서 독일의 군사적, 경제적 근거지를 빼앗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중국대륙 침략의 발판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전에 빈집이나 다름없는 조선은 이미 1910년 한일합방이라는 명목 하에 식민지로 삼았다.
1917년 당시의 국제정세는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세 나라는 비밀조약을 맺고 산뚱반도에 대한 독일의 이권 및 적도 이북의 남태평양 제도가 일본으로 귀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증한다. 이 때 독일은 교전국이나 중립국의 선박을 가리지 않고 차별없이 공격을 가한다는 무제한 잠수함작전으로 마지막 남은 열강인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게 된다. 미국의 연합국 진영 참전은 1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가름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세가 급격히 반전되자 1918년 독일은 킬 군항 해병들의 반란이 혁명으로 확대되어 빌헬름 2세가 물러나게 된다. 이로써 독일의 패배로 전쟁은 종결되었다.
그리고 전쟁의 장기화는 러시아 국민을 지치게 하였고 이것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나게 된 원인으로 작용한다. 서구열강들은 이러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식민지에 대해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전쟁기간동안 물자가 부족해져 해외식민지로의 상품유입이 급감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식민지국가들 스스로 산업을 일으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특히 일본은 유럽 열강들이 전쟁으로 아시아에 관심을 돌릴 겨를이 없는 틈을 타 본격적으로 아시아를 침략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유럽국들이 독점하고 있는 열강의 자리에 일본이 끼였다는 것은 이미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4> 애기판 씨름은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세계일가 통일정부의 1차 발현인 국제연맹의 창설
세계일가 통일정권 공사(世界一家統一政權公事)를 행하시니 성도들을 앞에 엎드리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이제 만국 제왕의 기운을 걷어 버리노라.” 하시니라. (道典 5:236:10∼11)
신축년 이후로는 내가 친히 다스리느니라. 이제 조화정부(造化政府)를 열어 무궁한 선경의 운수를 정하노라. (道典 4:3:2∼3)
일본과 러시아가 판을 대한 애기판 씨름은 서양에 1차 세계대전을 불붙여 그 결과 오만 무도한 제국주의의 침략근성을 뿌리뽑는 계기를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열강은 과다한 전비 사용으로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는 왕정의 붕괴로 나타나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왕가가 몰락했다.
조선 또한 배달국 이후 6천년 동안 지속되어 온 왕정이 무너지고 자유와 평등을 기치로 한 근대국가 건설의 전초작업으로 임시정부를 1919년 상해에 수립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베르사유체제가 수립되고 세계일가 통일정권공사로서 인사와 신도의 일체관계에서 동서의 벽을 허물어 세계를 하나로 만들어 가는 도수가 열려나가, 장차 세계통일의 기반이 되는 천상의 조화정부가 지상에 처음 발현되어 그 첫 모델이 국제연맹(國際聯盟, League of Nations)으로 발족되었다.(1920년, 42개 회원국)
국제연맹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일찍이 없었던 참화를 겪으면서 이를 거울삼아 미국대통령 윌슨의 주창 아래 국제평화유지를 주목적으로 창설되었다. 세계의 민족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즉 정치적 독립과 영토의 보존을 약속했던 소위 민족자결주의는 전세계 수억명에 이르는 약소 민족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원칙이란 어디까지나 패전국의 식민지와 종속국의 처리에만 적용되었을 뿐이다.
즉 동유럽에만 적용되었을 뿐이고 아시아에는 적용되지 않은 것이었다. 일본 역시 유럽의 승전국들처럼 식민지에 대한 이권과 정치적 영향력을 추구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 일본의 야욕 앞에 조선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과 같은 반일투쟁은 무자비하게 진압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 후에도, 전쟁의 근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식민지 보유자체가 그대로 존속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또다른 전쟁을 잉태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오스트리아·투르크에도 민주적인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또한 새로 독립한 나라들 대다수도 민주주의를 택하였다. 19세기에 이미 민주주의의 기반이 확립된 영국·불란서·미국 등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벨기에·네덜란드·스위스는 종전대로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였다.
한편 핀란드·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나라들도 공화제를 채택하였다.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에서는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오스트리아·체코·폴란드에서는 민주적인 헌법이 채택되고, 유고와 루마니아에서도 민주화가 진행되었다.
이와 같이 정체(政體)에 있어 공화제가 늘고 민주주의를 채택하는 나라의 수가 증가하였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 그 자체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즉 19세기에 선거권에 가해졌던 재산소유의 제한이 없어지고, 남녀평등의 보통선거가 일반화되어 유산계급의 제한된 민주주의로부터 대중민주주의(mass democracy)로 발전하였다.